한국일보 판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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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국일보를 설립한 고 장기영 사주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장강재(작고) 전 한국일보 회장이고 둘째가 현재 본사를 책임지는 장재구 회장, 셋째가 한국일보 미주본사의 장재민 회장, 넷째는 해외 원정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장재국 전 회장, 다섯째가 장재근 전 일간스포츠 회장이다.

이들 중 둘째인 장재구 회장과 셋째인 장재민 미주본사 회장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나와 한국일보 미주지사를 운영해 한국에서는 “해외파”로 불리워 왔다. 이들 해외파 형제들은 지난 90년대 까지 국내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회는 찾아왔다. 서울의 한국일보가 4천억원 대의 부채를 지는 등 신문사의 존폐 위기까지 거론될 정도에 다다르자 ‘이때다’라며 “해외파”의 서울 진입 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국일보 판 ‘왕자의 난’의 이모저모를 ‘미디어오늘’의 기사들을 종합해 엮어본다.
 
지난해 1월29일 한국일보 서울본사 건물 7층 회장실은 살얼음판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한국일보사 주주총회를 통해 한국일보의 장래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날 주총에서는 도박원정으로 말썽이 된 넷째인 장재국 회장을 밀어 내려는 둘째 장재구 서울경제 회장의 본사 입성 작전의 공습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라스베가스 도박혐의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고 있었던 넷째 장재국 회장은 벼랑 끝에 밀리는 수세로 최후의 방어선을 대비 중이었다. 이날의 주주총회는 원래 3주전인 1월 7일 개최하려다 이날로 연기된 것이었다. 한국일보의 주주총회는 장씨 일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가족회의나 다름이 없었으나 이날은 한쪽 형제가 다른 형제를 꺾어 버리는 ‘살벌한(?)’ 모임이 예고되고 있었다.

당초 오후 2시에 개회될 예정이던 이날 주총의 계획은 장재구 회장측과 장중호 한국일보 상무측에서 장재국 회장에게 사퇴를 권고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장중호 상무는 한국일보의 첫째 아들 고 장강재 전회장의 아들이다. 한편 자신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눈치챈 장재국 회장은 버티기 작전으로 나왔다.

‘한국일보 판 형제의 난’의 마지막 한판 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장재구 회장측과 장중호 상무 측은 장재국 회장에게 ‘명예롭게 퇴장키 위한’ 장장 7시간 동안의 사퇴권고와 설득을 벌였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자, 오후 8시 40분 일방적인 공격 작전을 벌였다. 즉 공식적으로 해임에 관한 주총의안을 심의하기 시작해 불과 20분만에 ‘장재국 회장 해임안’을 전격 통과시킨 것이다.

이날 주주총회 과정에서 장재구 회장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윤국병 소년한국일보 사장은 몇 차례나 회장실 밖으로 나와 미국에 있는 장재구 회장과 의견을 조율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장 회장은 미국에서 작전계획을 원격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97년에 잠시 본사 회장직을 맡은 적이 있던 장재구 회장은 당시 장재국 회장에게 밀려난 것을 이 기회에 되찾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언론사 회장이 주총에서 해임 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기록하고 말았다. 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 ‘문제의 주총’에 대해 한국일보 측 관계자는 “최대 주주인 장중호 상무 측과 장재구 회장 측이 주총에서 장 회장에게 자진 사퇴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고 보고 수 차례 이를 권했으나, 장재국 회장은 ‘안 하겠다’고 버텨 결국 7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오후 8시40분 주총을 공식 개회해 해임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날의 장재국 회장 해임안은 장재구 회장, 장재민 한국일보 미주본사 회장이 장중호 상무와 함께 동의해 통과됐다. 원래 장재구 회장과 장재민 회장이 소유한 한국일보 본사의 지분으로는 장재국 회장을 제거할 수 없었다. 여기에 장중호 상무의 지분이 월등히 많기에 이 같은 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 작전에서 장재구 회장 측은 조카의 힘을 빌어 넷째 동생 장재국 회장을 해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장재국 회장 해임과 함께 주총은 수권자본금을 20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늘렸다. 이날 해임사태로 평소 장재국 회장과 가까운 장재근 부회장도 사퇴했으며 다른 장재국 회장 측근인 기존 이사들인 문현석 부사장, 배기철 편집인 들도 사퇴했다. 해임사태 이후 2월 1일 열린 이사회에서는 장재구 서울경제회장을 애초 각본대로 한국일보 신임회장으로 선출했다. 장재구 회장 측근인 배봉휘 서울경제 이사는 한국일보 부사장으로 임명됐다. 또 나진원 서울경제 총무국장을 한국일보의 살림을 맡는 관리본부장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또 문제의 주총에서 한국일보사가 보유한 일간스포츠 주식 51%에 대한 의결권을 포기해 사실상 계열분리가 이뤄졌다. 한국일보 관계자는 “신임 이사진에서 장중호 상무가 제외됨으로써 장 상무는 한국일보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조만간 증자 등을 통해 장재구 회장이 자본투자를 하게 되면 최대주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며 “그 동안 물밑에서 논의됐던 일간스포츠와 서울경제의 합병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관계자는 “장 상무는 해임결정 결과에 대해 ‘회사 회생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간스포츠 경영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장중호 상무는 한국일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그의 실권주를 장재구 회장이 사들이는 방식으로 자연히 증자가 이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주총에서 200억원이던 수권자본금을 600억원으로 늘린 것도 미국에 있던 장재구 회장이 한국일보에 단계적으로 투자해 최대주주가 교체되는 것을 전제로 이뤄졌다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이를 위해 장중호 상무 측은 사전에 특사로 한국일보 경영전략실 간부 2명을 파견, 미국에 있는 장재구 서울경제 회장에게 한국일보의 경영권을 맡아주는 대신 한국일보 회생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장 회장은 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장 상무 측은 “주주들 입장에서 장재국 전 회장은 한국일보가 수천억원의 부채와 경영부실을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이 크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대안으로 장재구 회장이 한국일보를 맡아 투자 등을 통해 회생시킬 수 있기 위해 장재국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던 것”이라며 “결국 장 상무는 한국일보의 회생을 위해 상무 자격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한편 당시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는 성명을 내고 “주총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증자계획과 부채청산을 위한 자구경영의 기틀을 마련함과 함께 그동안 불거졌던 주주들간의 갈등을 조속히 봉합하고 경영권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인적 쇄신 또한 시급하다”고 밝힌 바 있다.

노조지부는 또 “장재국 전 회장은 코리아타임스, 소년한국일보, 그리고 한국인쇄기술 등 한국일보 계열 모든 직책에서 완전 퇴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문제의 주총이 끝났는데도 해프닝이 발생해 한동안 ‘한국일보 회장 해임건’의 후유증이 언론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일보가 신임회장으로 장재구 회장을 선임한 가운데 장재국 전 회장이 해임된 뒤에도 계속 한국일보 회장실로 출근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그가 주총 결의사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한국일보에 2명의 회장이 있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 관계자는 당시 “장재국 전 회장이 주총에서 해임된 뒤 아직 7층 회장실을 비우지 않고 있어 주총 결의사항을 받아 들이지 않으려는 것 같다”며 “계속 한국일보 회장 자리에 연연해도 주총 결의사항은 되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장 전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권오슬 관리본부장(이사)도 사표를 제출하고서도 한동안 계속 출근했었다. 이를 두고 한 관계자는 “나진원 서울경제 총무국장이 새로 본부장으로 발령이 났는데도 아직 전 관리본부장이 출근해 사내 두 명의 관리본부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했었다.

한편 장재구 회장은 지난해 2월 13일부터 정식 출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조, 기자협의회와 만나 회사의 구조조정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언론계의 관심을 모았다. 장 회장은 노조와의 만남에서 “인적쇄신과 구조조정 등 회사 살리기에 함께 할 계획” 이라며 “한국일보를 살리기 위해 온정주의를 버리겠다”고 밝혔었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 내부에서는 일단 반기는 분위기였다. 한 기자는 “그 동안 전사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며 “신임회장이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것은 회사의 회생과 운영을 위한 측면에서 긍정적인 결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재구 회장은 취임 후 바로 2월 중순에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으나 기자협의회 측은 “부장단 인사가 전형적으로 자리 바꾸기, 나눠먹기 식의 인사라서 실망스럽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장단 인사는 신문을 잘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과 파벌을 갖지 않은 사람을 간부에 임용해야 한다는 기자들의 의사가 일부 수용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장재구 회장은 지난해 9월 한국일보 채권단과 기업재무구조개선약정(MOU)체결의 전제조건으로 2002년까지 300억 증자를 약속했으나 불발되어 당시 기자들은 “장 회장이 약속을 어겼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편집국의 한 기자는 지난 1월 “회사 측은 미국 경기를 핑계로 뭐는 팔면 손해고, 뭐는 내놓았는데도 안 팔린다는데, 그렇다면 과연 증자를 할 수 있는 때가 언제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LA에 있는 한국일보 계열의 방송사를 매각한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장재구 회장은 본사 회장이 되면서 무지개 빛 청사진을 내 놓았으나, 벌써부터 색깔이 바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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