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윤정환의 칼패스에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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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여름, 나는 당시 부천 축구단의 홈 경기장으로 쓰이고 있던 목동 스타디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은 여느 해보다 습하고 무더웠지만, 모처럼의 야간 축구 경기를 관전하러 간다는 기쁨에 젖어 나는 그저 희희낙락해하고 있었다.

당시의 부천 축구단 사령탑은 러시아 출신의 니폼니시 감독. 3-5-2의 수비축구가 대세를 이루던 한국축구계에 공격적인 4-4-2 포메이션을 획기적으로 도입했던 니폼니시 감독은 불행하게도 저조한 성적 탓에 1998년에 아쉽게 해임되고 말았지만 축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니포축구’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킬 만큼 인기를 끌었었다.

알려진 바대로 니폼니시 감독은 현재 전북 소속으로 있는 조윤환 감독(당시 부천 코치)을 능력 있는 지도자로 키워내는 한편, 윤정환, 이을용, 윤정춘, 김기동 등의 훌륭한 미드필더들을 조련해 내기도 했다.

당시 부천의 경기를 봤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수비진부터 섬세한 패스에 의해 올라간 축구공이 미드필더들의 짜임새 있는 패싱으로 상대편 진영을 유린해 나갈 때의 그 짜릿함을. 그것은 단지 경기의 승패를 따지는 축구가 아닌, 진정으로 관전의 재미를 만끽하게 하는 축구다운 축구였다.

그 해 여름, 내가 목동경기장을 찾은 것도 바로 그런 축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가끔씩 TV를 통해서만 보던 윤정환의 플레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부천의 환상적인 미드필드 조직력을 그라운드의 열기 속에서 맛보고 싶었다. 지하철 목동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우한 목동 경기장은 아파트에 둘러싸인 성 같은 이미지로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쨌든 경기장에 입장한 후 얼마 안 있어 그 날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평일 저녁 7시(당시에는 수요일 저녁 7시에 주중 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라 관중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부천의 ‘니포축구’를 만끽하려고 자리를 메운 축구 매니아들로 인해 딱딱한 관람석은 진지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열기로 넘치고 있었다.

소문대로 미드필드 중심에 선 윤정환의 플레이는 돋보이는 것이었다. 짧은 터치에 의한 패스를 주고받다가 전방으로 한 번에 찔러주는 그의 ‘킬 패스(kill Pass)’는 그야말로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경기에는 비록 졌지만(상대팀이 정확히 어떤 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 부천 팀의 플레이에 불만을 표하는 관중들은 없는 듯했다. 한마디로 오랜만에 축구다운 축구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윤정환, 그는 어떤 매력을 가진 선수인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윤정환은 한국 축구대표팀이 4강 신화를 이루는 동안 단 한 게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사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이 개막하기 몇 달 전부터 대표팀 엔트리 구성을 서두르면서 윤정환과 안정환 같은 테크니션은 배제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한국팀은 기술은 뛰어나지만 체력이 약하다’라고 한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에 이 말은 한국 선수들의 체력은 유럽에 결코 못지 않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어쨌든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듯 체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윤정환과 안정환은 엔트리 탈락의 위기까지 겪었지만 갖은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 히딩크 호에 승선하게 된다. 이 중 안정환은 16강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전에서 골든 골까지 뽑아내는 등의 대활약을 펼쳤지만 윤정환은 앞서 말한 대로 단 한 게임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는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데다가 포지션도 겹치고 세리에A에서 활약하던 안정환에게 밀려 윤정환이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윤정환은 축구선수로서 그리 뛰어난 체격조건이 아닐 지도 모른다. 173cm에 61kg의 체중은 어떻게 보면 왜소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축구 선수가 갖춰야할 재능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선수다. 그 몇 가지를 사항을 열거해 보자면 아래와 같이 써볼 수 있겠다.

1. 들어가야 할 곳에 정확히 패스를 찔러주는 능력이 있다.
2. 패스의 강약 조절이 뛰어나다.
3. 뛰어난 스트라이커가 있을 때 그의 능력은 더욱 빛난다.

요즘에는 TV에서 세계적인 리그 소속의 클럽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영표, 박지성, 김남일, 송종국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에레디비지 리그나 설기현 선수가 활약하는 벨기에 리그, 꼭 한국 선수가 속해있지 않더라고 프리메라 리그, 프리미어 리그, 클럽간 대항 경기인 UEFA, 챔피언스 리그 등이 공중파를 타고 있어 축구팬들의 눈높이는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

이렇듯 수준 높은 리그의 경기를 보노라면 경기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선수들간의 패스와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K리그는 아직 아쉬운 부분이 많다. 축구팬들의 눈높이는 자꾸만 올라가는데 정작 한국프로축구의 전체적인 질적 향상이 도모되지 않는다면 K리그는 앞으로 팬들의 외면을 받는 위기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경기 운용의 묘와 재미를 살려주는 패싱력을 지닌 윤정환 선수의 가치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강철같은 체력과 조직력을 밑바탕으로 상대팀을 시종일관 몰아붙인 끝에 완승하는 경기도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정말로 축구경기다우면서 흥미있고 재미있는 경기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끔 만드는 기가 막힌 패스에 의해 골이 터져 나오는 경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한 세 가지 예는 그런 점을 설명해 준다. 특히 3번에서 말했듯 윤정환 선수의 가치는 뛰어난 스트라이커가 있을 때 더욱 빛난다.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96애틀란타 올림픽 지역예선에서 우승할 때까지 각각 스트라이커와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최용수-윤정환 콤비는 그래서 많은 점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의 최용수 선수처럼 현재의 윤정환 선수의 패스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스트라이커가 나타난다면 윤정환 선수 개인으로서나 축구를 보는 팬들에게나 행복한 2003년이 되리라 생각된다.

성남으로 돌아온 윤정환, 그의 플레이가 주목되는 이유

윤정환이 돌아왔다. 지난 2000년 일본 J리그 소속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던 윤정환은 2002년에 슈퍼컵, 아디다스컵, 정규리그 우승 트로피를 싹쓸이한 성남 일화가 K리그 3연패와 7월에 있을 월드피스킹컵을 앞두고 전력 보강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성남 일화의 주전 미드필더로서 현재 K리그 개막 이후 3주 째 경기를 소화해내고 있는 윤정환은 아직까지는 전성기 때의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그가 J리그의 경기 스타일에 익숙해져 K리그에 미처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 보다 큰 이유로는 현재의 성남 일화의 팀 성격이 그에게는 생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남일화의 주전 미드필더는 윤정환을 포함해 신태용, 박남열, 홍도표, 이성운 등이 있다. 작년에 성남이 K리그에서 우승하기까지의 플레이 스타일은 미드필드에서의 순간적인 볼 침투를 통해 김대의의 빠른 발을 이용하거나 샤샤의 감각적인 득점력에 의존한 바가 컸다.

사실 성남은 K리그에서 5번이나 우승한 명문팀임에도 연고지를 옮기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일반 축구팬들의 관심을 덜 끌기는 했지만, 어느 팀보다도 짜임새 있는 미드필드 진을 갖춘 팀이다. 주장 신태용의 노련한 게임 리딩을 필두로 박남열, 홍도표 등의 플레이는 군더더기 없이 전방의 스트라이커에게 효과적인 득점 기회를 안겨다줬다. 아마도 이런 짜임새 있는 팀 성격 속에 윤정환이 합류하게 됐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약간 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 성남이 수십 억대의 비용을 들여 김도훈, 데니스, 이기형, 싸빅 등의 스타들로 판을 새로 짜면서 팀 조직력이 불안정해진 것이 윤정환에게는 아직까지 그리 좋지 않은 환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원래의 플레이메이커인 신태용과 포지션이 겹침으로써 함께 게임에 출장하면 수비형 미드필더가 자리해야 할 위치에 공백이 생겨 전체적인 팀 전술에 문제가 생기는 점도 윤정환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의 성남 팀은 ‘한국판 레알 마드리드’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K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인 샤샤, 김도훈을 보유하고 있고, 부상중인 김대의까지 조만간 합류하게 된다면 한국 복귀 이후 성공적인 적응을 꾀하고자 하는 윤정환에게는 상당히 괜찮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윤정환이 특유의 ‘Kill Pass’ 능력을 하루빨리 회복하고 스트라이커 진이 그 패스를 제대로 받아낼 수만 있다면 올해의 K리그는 여느 해보다 흥미진진한 경기를 연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윤정환의 플레이가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사실 윤정환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누구보다 많이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중요한 경기에서는 소외되는 아픔을 겪어왔다. 98년 월드컵 때도 그랬고 4강 신화를 이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도 그랬다.

지난 해 월드컵이 끝난 후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윤정환은 “이번 월드컵처럼 벤치에 앉아본 적은 없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긴 시간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이처럼 경기장에서 뛸 수 없었던 것은 결국 그동안 수없이 지적돼 왔던 ‘체력’의 문제였겠지만, 한때 그를 지도한 니폼니시 감독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장점을 살려야지 단점을 고치려 드는 건 어리석다. 윤정환은 장점이 많은 선수다”며 그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체력적인 문제를 뛰어넘을 만큼 가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어쨌든 올해 K리그 경기에서 윤정환의 플레이를 보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윤정환은 축구의 묘미를 느끼게 만들 줄 아는 훌륭한 선수다. 어서 빨리 윤정환이 전성기 때에 버금가는 패싱 능력을 경기장에서 선보이게 되기를 나는 기원한다. 나는 아직도 그의 ‘Kill Pass’에 배고프다.
ⓒ 200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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