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석학에게 듣는 이라크 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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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이후 세계의 시선은 중동에서 극동으로 급속히 이동 중이다. 이라크 전후 처리 문제가 아직 산적해 있지만, 미국이 지목한 또 하나의 ‘악의 축’인 북한과의 핵문제 협상은 순조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 과정은 이라크전 이후 세계질서를 가늠하는 한 축이 될 전망이다.

일본의 대표적 국제정치학자로 꼽히는 이노구치 다카시(猪口孝·59) 교수를 도쿄대학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봤다.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유일강대국 체제는 더욱 강화되는 느낌이다. 향후 세계 질서가 어떻게 재편되리라고 보나?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1극(極)체제가 강화될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라크전에 반대했다고는 하지만, 영국·스페인·이탈리아를 비롯해 기타 EU 가입 국가들은 역시 미국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1극체제라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날 문득, 미국·아시아·유럽의 ‘3극체제’ 정도가 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독주를 막을 새로운 변수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군사력 면에서의 1극체제는 앞으로도 수십년간 유효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영향력 면에선 다르다. 1극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도 결국은 전후복구에 비용이 필요하고, 향후 정권 유지에도 비용이 필요하다. 지금도 미국은 이런 비용을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 내에서는 예산의 우선순위가 교육이나 사회복지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1극체제의 유지 여부는) 외교·군사정책에 얼마만큼 돈을 쓰는가에 달려있지만, 현재 미국 경제상황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결국 ‘세계 운영 자금’이 모자라게 될 것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이번 이라크전쟁처럼 미국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은 앞으로는 없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가?

“미국은 주로 미국과 비슷한 체제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런 정권을 원조해왔는데, 이런 활동을 하기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설령 미국이 고립주의 정책을 취할 경우에도, 군사적 1극체제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이번 이라크전처럼 (양국간의 엄청난 국력차로) 큰 부담이 없는 전쟁은 계속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세계 이곳저곳에 불안정한 곳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런 ‘불안정한 곳’의 하나로 최근 북한이 거론된다. 얼마 전 미국·중국·북한 3자회담도 열렸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상태인데, 미국의 공격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가능성이 아주 낮다. 5~10% 정도나 될까. 그러나 없지는 않다. 일단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은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주 높아졌다. 최근 주한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배치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결국 지상군 철수나 마찬가지다. 일단 공군이 북한에 대해 외과 수술(정밀 폭격)을 해도, 지상군은 북한의 반격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최근 미국 내 강경파의 움직임은 상식적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될 경우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일본도 핵무장을 할 것으로 보는가?

“핵무장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인도도, 파키스탄도 하지 않았는가. 일본도 핵무장을 검토했고, 지금도 그 내용은 정부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장이 곧 일본 핵무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렇지만 지금도 일본에서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지 않는가?
“일본이 핵무장을 할 경우, 일본의 가상적국은 북한이나 한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가 가상적국이 된다. 핵을 보유한다고 하면 미국과는 경쟁이 되지 않고, 그중 비교적 핵무기 보유량이 적은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감안한다고 해도 일본은 최소한 미국의 10% 정도는 핵을 보유해야 한다. 그 비용부담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이번 이라크전에 일본 국민의 90%가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중 절반 정도는 친미(親美)이면서도 반전을 선호한다고 한다. 일본 일반 시민들의 반전의식은 상상보다 아주 높다. 핵보유를 선언한다면 맹렬한 국내 여론의 반대에 부딪힐 것이다. 미국이 반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언젠가는 일본도 핵보유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당분간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계속 있을 것이다.”

그럼 일본은 북한의 핵위협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대처할 것이라고 보는가?

“일본의 이해관계는 중국의 이해관계와 비슷하다. 두 나라 모두 내심으로는 한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완충지역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고, 일본 역시 한반도가 통일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사태를 바라지 않는다. 통일 한국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기 보다는, 한국에서 미군이 떠날 경우 그 부담이 일본으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주일미군의 증가뿐 아니라 자위대의 대폭 증강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북한 정권을 유지하되 지금처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상황이 바람직하다. 일본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중국과 미국이 북한의 양팔을 하나씩 틀어쥐고 핵개발을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이번 북한 핵문제에 대한 대처를 놓고 한국과 미국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면서 관계가 악화됐다는 시각이 있다.

“최근 윤영관 외교장관이 ‘미국이 닉슨 행정부 때 중국에 대한 관계개선을 이끌어낸 것처럼 북한에도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미국측 강경파의 반응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소련이라는 강적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북한과의 관계개선은 한국이라는 재수없는 녀석이 있기 때문이냐’는, 다소 비아냥대는 것이었다. (한·미관계는) 말이 오가는 과정에서 감정이 증폭된 감이 있다. 5월 중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중요하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점점 한국은 포기해도 좋은 나라가 돼 가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 미국과의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3자회담 성사 과정에서도 중국이 역량을 발휘했듯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주도권이 자꾸 강화되는 반면, 일본의 역할은 다소 줄어드는 상황이다. 향후에도 중국의 영향력이 계속 증대될 것으로 보는가?

“물론 중국의 역할은 계속 커지고 있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중국은 일본에 있어 제1의 수입 대상국이 됐고, 한국과의 교역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아직 변수가 많다. 이번 사스(SARS) 파동 정도에 경제가 크게 흔들린다는 점에서도 보듯이, 중국 경제가 고속성장을 했다지만 아직 취약한 점이 많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는 여러 가지 부양책이 나오면서 성장하겠지만, 그 이후로는 소·중규모의 버블(bubble·거품) 붕괴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붕괴는 10년 정도 천천히 이뤄질 것이며, 이 경우 정치적으로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1당독재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지금의 싱가포르처럼, 공산당 내에 파벌이 생기면서 여당과 야당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발(發) 세계 불황이 올 수도 있나?

“그렇게까지 염려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중국 경제규모가 커졌다고 하지만, 현재는 일본 경제규모의 3분의1 정도다. 일본에서 버블이 붕괴됐을 때도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세계 경제는 미국 경제만 탄탄하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현재 미국 경제가 그렇게 좋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문제다.”

이번 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미국은 유엔에서 좌절을 맛봤다. 앞으로 유엔이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어떻게 보는가?

“확실히 미국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엔의 기능이란 것이 꼭 국제적인 안전보장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유엔의 기능은 크게 셋이다.
하나가 안전보장 기능이고, 두 번째는 경제사회이사회를 중심으로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 원조 기능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약소국들의 발언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190개국 정도 되는 유엔 가입국 중에서 150개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한 외교 능력이 없다. 이런 나라들에 유엔은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場)이다. 오히려 유엔은 앞으로도 중요해질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 후 프랑스에 보복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그중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상임이사국에서 프랑스를 제외시키고 일본이나 인도를 넣자는 의견이다. 앞으로도 유엔이 유지될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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