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기준 · 시스템인가요? “짜증” 아닌, “여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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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5·18’과 ‘NEIS’ 발언, 진심인가요?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했을 때 대통령으로서 고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방문 중에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는 발언은 들었을 때도 그런 말을 하는 본인조차 마음 속으로 약소국의 비애를 느꼈을 것이라고 자연인이 아닌 대통령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5·18 기념식 이후, 시위에 나섰던 한총련의 행위를 ‘난동’으로 규정하며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어제(20일)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와 관련해 “일개 교원단체가 정부의 굴복을 요구하면 들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그제야 대통령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해한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철학’이 아닌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철학이 없으면 판단을 유보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나, 여유가 없으면 섣불리 판단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인수위 시절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한 위원이 그랬다지요. “심심한 대통령이 되시라”고. 취재기자로서 전 그저 ‘낭만적인 덕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적인 고언’이라고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이 기준이고 시스템이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방미 전 대통령께서는 “국민들의 기대가 부담스럽다”며 “너무 (큰 성과를) 기대하지 말라.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정작 큰 성과를 기대한 것은 대통령이셨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얻은 성과에 무덤덤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통령 스스로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런 부담과 피로 속에서도, 귀국 다음날 곧장 5·18 기념식에 참석하셨지요. ‘갈 길은 구만리인데, 어느 것 하나 녹록한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시위대에 가로막혀 행사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기념식장에 들어가게 됐으니, 그것도 후문으로 말입니다, 얼마나 불쾌하셨습니까.

당시 기념식장 안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던 저는 20분이나 늦게 도착한 대통령께서 본의 아니게 지각한 이유를 짧게 이야기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노무현답게’ 사실 기분이 나빴다, 이런 일은 심한 것 아니냐고 털어버리고 기념사를 낭독하리라고 예상한 거지요. 그러나 아무 일 없는 듯이 기념사를 읽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시위대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막중한 일이어서 그런지 대통령께서는 그 ‘난동’에 대해 청와대에 와서야 불쾌감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행위자(한총련)를 처벌해야지, (경호·경비) 책임자를 추궁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지엄하신 대통령의 한 마디에 즉시 ‘난동자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떨어졌습니다. 비록 법원에서 한총련 의장에 대한 영장이 기각되긴 했지만, 대통령의 말이 기준이고 시스템이란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5·18 기념식 당시 한총련이 대통령의 행차를 ‘결과적으로’ 막아선 행동이 옳다는 게 아닙니다. 사법부에서도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행위자의 의도’를 고려해 가중 처벌 내지 정상참작을 한다지요. 그건 단순히 결과만 놓고 판단하지 않고, 과정까지 살핌으로써 ‘기계적인 오류’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호와 경비는 정상참작을 해야 하고, 시위대는 결과로만 따지겠다는 것은 현명한 판단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당시 한총련의 시위 내용은 대통령의 방미 활동을 ‘굴욕적인 대미외교’라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혹여 대통령의 심기를 더 자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왜?’라는 게 생략되고 있다는 겁니다.

솔직히 제 귀와 눈을 의심했던 건 어제(20일) 대통령의 NEIS에 관한 발언을 접하고서 나서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께서는 NEIS 도입 논란과 관련해 “일개 교원단체가 대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굴복을 요구하면 들어줄 수 없다”며 “자신의 주장으로 국가의 의사결정 절차 등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시도엔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NEIS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인권위의 이라크전 파병 결정에 대한 권고 사항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아무런 시비를 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NEIS에 대해 인권위가 인권침해 가능성을 지적할 수는 있으나 시스템을 폐기해야 한다는 단정적인 권고는 과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께서는 ‘싸움을 붙이고 흥정을 말리려는 듯’ 전교조의 연가투쟁 참가자들을 중징계하게 되면 교사 숫자가 어느 정도 부족하냐고 윤덕홍 교육부총리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윤 부총리가 여러 차례 밝혀왔던 “NEIS와 관련한 인권위의 권고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것이 식언(食言)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말씀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사안 또한 대통령의 말이 판단의 기준이고 시스템이 돼버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왜?’라는 게 생략되고, 사실 관계조차 잘못됐다는 겁니다.

NEIS에 대한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견해가 어떤지, 그들은 왜 반대 논리를 펴는지, 인권위가 왜 그와 같은 권고안을 낼 수밖에 없었는지…. 당선자 시절, ‘토론공화국’을 만들겠다고 한 게 과연 이같은 결론 도출을 의미한 것인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사실 NEIS에 대한 정부의 판단과 교원단체의 판단이 틀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인권위도 독자적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극을 좁히는 과정이 지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채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 불쾌감을 넘어 강경 대응 방침까지 시사한 것을 보고 그저 ‘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굴복 요구’와 ‘국가 시스템 폐기라는 단정적 권고’는 대통령의 심증일 수는 있으나, 밖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인권위의 권고는 ‘시스템 폐기’도 아니었고 ‘단정적 권고’도 아니었습니다.

NEIS와 관련해 조중동 등 보수 언론들의 보도 태도를 보면, 한결같이 ‘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검증하지 않고, 정책을 수정·보완했을 경우 국가 예산 낭비와 입시에 미치는 혼란이 크다는 ‘불안감 조장’이었습니다.

만약 인권위의 권고대로 인권 침해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국가 예산이 투여돼 진행중인 사안이라면 ‘돈’이 ‘인권’의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인권 침해 요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권위나 전교조가 국가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계신 것인가요.

“자네의 정수리에 놓을 침은 이미 아이들의 손에 쥐어 있으니…”

최근 대통령의 연속된 발언을 보고 갈수록 허탈해지는 건 비단 기자뿐만은 아닐 겁니다. 친한 기자와 대통령의 발언을 화제 삼아 얘기하던 자리에서 ‘대통령의 짜증’이라는 분석도 해봤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조만간 다가올 참여정부의 100일 평가 기사 제목이 최영미의 시를 패러디한 ‘참여정부 100일, 잔치는 끝났다’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씁쓸한 얘기도 오갔습니다.

대통령의 20년 지기이자, 상호 신뢰가 두터운 문재인 민정수석이 청와대에 가기 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의 스타일이 즉흥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그는 (먼저 일에 대해) 계획과 구상을 하고, 그러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등 대화를 나누며 가다듬어 나간다. 꽤 긴 시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문 수석이 얘기했듯이 대통령께서 5·18 시위 건이나 NEIS 건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그렇게 발언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청와대나 내각 등에게 설명을 하고 대화를 나눠 그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께서 ‘어버이’라고 했던 국민들과 얼마나 이야기를 했고 설득했는지에 대한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지난해 7월 18일 대통령께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서울 배명중학교에서 일일 교사를 하셨습니다. 당시 대통령께서 타신 차량이 교통위반 ‘딱지’를 떼어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셨지요. 계면쩍었던 탓인지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가 오늘 11시30분에 교장선생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여의도에서 10시30분에 출발했는데 차가 엄청 밀려 약속 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이나 여러분과 약속을 지키려면 갓길로 달리거나 새치기, 앞지르기를 해서 1초라도 시간을 당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거지요. 만약 교통법규를 제대로 지키면 여러분과 약속한 시간을 지키기 어렵게 됩니다.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어 대통령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법규를 지켰을까요, 살짝살짝 어겼을까요?”라며 되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 이 곳에 오려다 중간에 교통위반을 해서 6만원짜리 ‘딱지’를 떼였다고 털어놓고 “빨리 오지도 못하고 딱지도 떼이고, 유명한 사람이 곤경에 처하니까 재미있지요”라며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진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0분만 빨리 출발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지요. 많은 경우 이처럼 충돌이 생깁니다.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걸 배워 나가는 게 여러분이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던 결론, 즉 늦더라도 규칙을 지키는 것이 옳지요. 교장 선생님과의 약속은 개인적인 것이라서 좀 늦더라도 양해가 되고 사후에 이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의 약속도 나중에 설명하면 용서가 됩니다. 하지만, 길거리 규칙은 누구도 예외가 있으면 안됩니다. 용납하면 회복할 수 없는 무질서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되지요.”

그렇습니다. 길거리 규칙에서 예외를 인정하면 안 되고, 대통령 후보라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요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들과의 약속은 어떨까요. 다시금 중학생 아이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의 대다수는 길거리 규칙보다 훨씬 중요한 게 대통령이 한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할 겁니다.

지난해 국민경선에서 나서기 전 대통령께서는 ‘친구 같은 대통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대선 기간 내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친구 같은 대통령’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하셨지요.

“친구 같은 대통령이란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함께 바꿔나가는) 문화적 대전환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다. 그 동안 대통령이라고 하면 권력의 핵심이고,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는 존재로 비쳐져 왔다. 우리 국민들은 그런 정치 속에서 불행했다.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 통제가 가능한 합리적인 권력이 필요하다. 특권과 위력이 판치지 않는 합리적인 권력, 그 시대의 국민들에게 편리한 정치와 제도를 만들어주고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는 권력이 필요하다.”

최근 대통령의 모습과 발언을 보며, 대선 당시 당신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 아니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한 전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불안해하지 않는 권력’ ‘합리적인 권력’으로 안심하고 있을까요. 지금 국민들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노무현답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노무현스럽다’고 느끼고 있을까요.

제가 아는 두 분의 국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두 분은 사제지간이면서, 현재 같은 교직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제자였던 한 선생님이, 스승이자 동료인 선생님께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당신께 배울 때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선생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저도 현재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저는 교사로서 적잖은 회의를 느낍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낭송하는데도 2/3 이상의 아이들의 졸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회의를 넘어 절망을 느낍니다. 선생님, 부디 제 정수리에 침을 놓아주십시오.”

그러나 스승인 선생님이 제자이자 동료인 선생님께 이런 내용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자네의 정수리에 놓을 침은 이미 아이들의 손에 쥐어 있으니….”

노 대통령이 대선 막바지에 정몽준 후보와의 원칙 없는 단일화를 반대하며 “설령 실패한 후보가 될지언정 실패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라고 한 말씀이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진심이 감동으로 전달된 결과겠지요. 그렇습니다. 대통령께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국민이 세상을 바꾸게 하는 ‘노무현다운’ 행보를 많은 이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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