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이번엔 세게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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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대통령의 추징금에 대한 여론이 전 같지 않다. ‘휘발성’이던 추징금 여론은 2003년도 들어 ‘잔류성’으로 바뀌었다. 냄새만 풍기고 날아갈 일회성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씨의 1891억원 미납추징금에 대한 여론의 전환점은 4월 28일 열린 재산명시신청 심리였다. 선서와 재산목록을 제출하는 ‘형식’적 차원에서 끝날 줄 알았던 재판은 예상을 뒤엎고 ‘제대로’ 치러졌다.

29만 1천원이 가진 현금의 전부라고 신고한 전씨를 향해 판사(서부지원 신우진)는 은닉 가능성이 높다며 보정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오는 26일 전씨는 가족과 친인척 재산목록까지 준비해 법정에 다시 서야 할 처지다.

이날 재판은 ‘29살 판사와 73살 전직 대통령의 설전’으로 일제히 언론에 보도되었고 국민들은 자신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분노했다. 무엇보다도 법의 형평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서민은 몇 만원 안되는 벌금에도 강제노역이라는 형벌에 처해지는데, 또 자식의 카드빚에 가족 전체가 채무압박에 시달리는데 전직 대통령은 1891억원이라는 엄청난 채무를 지고도 외유다, 골프회동이다 해서 할 걸 다 하고 다니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29살 판사’가 여론 돌려세웠다

이러한 분노는 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힘 있고 권력 있으면 법을 어겨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냉소적 여론이 한편에서 형성되었다. 한 네티즌은 “전씨의 부정 축재와 변칙 상속이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초법적으로 환수할 수 없다면 애당초 그들에게 빼앗긴 사람들의 법적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강하게 반문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전씨의 추징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특히 얼마전 5·18 23주년 기념일을 즈음해 여론은 218명 사망, 363명 실종, 5088명의 부상자를 낸 광주민주화 운동의 최고 가해자 전두환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부정하게 거둬들인 돈을 환수하는 데 있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대형 부정을 저지르고도 은닉한 재산으로 대대손손 잘 사는 전례를 남기자 말자는 것이다.

전두환씨 추징금 환수를 두고 네티즌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전씨의 은닉재산을 신고하는 사람에게 신고액의 20, 30%를 포상금으로 주자는 의견부터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특검제를 도입해 법의 힘으로 전씨의 추징금을 징수할 방법을 찾자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2001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전두환의 10대 손자, 손녀가 각각 보유한 10억대 부동산에 얽힌 의문점을 보도한 바 있는 <일요신문>은 최근호에서 다시 전씨 일가가 보유한 재산을 상세하게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일요신문> 송영철 정치부 차장은 “법원에서 가족 재산도 공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보도할 수 있었다”며 “그렇지 않았다면 사생활 침해일 수 있다”하고 설명한다.

전씨 가족들의 재산이 250억원이 넘는다는 최근의 언론보도에는 전씨가 고의로 그들에게 재산을 변칙 상속, 양도했다는 입증이 빠져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정한 돈의 국고 환수라는 공익적 취지가 앞서 가족들의 재산공개가 가능했다.

재판으로 촉발된 언론의 전씨 가족에 대한 재산 보도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치권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민주당은 지난 20일 논평을 통해 “손자손녀의 이름으로 수십억원대 재산이 드러난 것은 대통령으로서 지켜야 할 품격조차 포기한 처사”라며 “88년 국회 청문회에서 밝힌바 대로 은닉재산이 있으면 책임추궁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죄가 확정된 전씨의 추징금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대통령 형의 재산 의혹에만 목청을 높인다”는 비난에 몰린 한나라당도 같은 날 촌평 수준의 브리핑을 발표하면서 “강제집행이 있기 전에 스스로 추징금 환수에 최대한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전관예우 해준 정치권 책임 크다

민주노동당은 전씨의 추징금 문제에 일찍부터 결합했다. 지난 5월 12일 중앙당사에 ‘전두환 은닉재산 신고센터’를 본격 가동하면서 포상금 1천만원을 내걸어 제보를 받기 시작했고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매일 전두환씨 연희동 집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재 여론의 관심은 검찰로 집중되고 있다. 추징금 환수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껏 검찰은 무기명 장기채권을 몇 번씩 돌려, 세탁에 세탁을 거듭한다고 알려진 전씨의 ‘재테크 실력’에 무력했다. 95, 96년 당시 전씨 비자금 추적반에서는 전씨가 조성한 비자금 중 쓰고 남은 돈과 그에 대한 이자를 감안하면 아직까지 전씨 수중에 1천6백억원대의 돈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현재 전씨 추징금 집행을 담당하는 서울지검 총무부는 “26일 재판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날 전씨가 제출하게 될 본인 및 가족, 친인척에 대한 재산 목록을 바탕으로 추징금을 집행할 단서를 찾아내겠다는 얘기다. 실무책임자인 최찬묵 부장검사는 “시효가 만료돼서 추징금이 무효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거둬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법조계, 검찰 그동안 뭐했나

하지만 이러한 검찰의 의지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민변의 최병모 회장은 “전씨의 가족들이 보유한 재산이 왜 언론을 통해 지금에서야 불거지냐”고 반문하며 검찰을 강하게 질책했다.

“어렵게 맞벌이를 해서 취득한 재산이라도 서민들은 그 재산의 투명성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강제받는다. 그런데 하물며 원천소득이 없는 전씨의 10대 손자들이 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검찰은 얼마나 꼼꼼히 취득 경로를 따져 보았는가. 지금이라도 친인척 재산을 추적해서 가압류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88년 백담사로 떠나기 전 대국민사과성명에서 전두환 씨는 자신이 보유한 재산으로 서초동 땅 200평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91년 재국, 재남 두 아들에게 증여되었다. 최병모 회장이 검찰의 무능을 탓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19일 기관지 <대한변협신문> 사설을 통해 “전씨의 재산 조사를 다시 하라”고 주장했다. 강제집행면탈죄의 혐의를 부여해서라도 전씨와 그 일가친척들의 자산을 압수수색으로 찾아내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김주원 사무총장은 “나같은 법쟁이도 전씨 재산문제를 보면서는 무기력감을 느낀다”며 “법정신이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모든 걸 법이 해결할 수는 없다. 전씨의 추징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어쩌면 민사집행법 전부를 뜯어고쳐야 할지 모른다. 그건 눈꼽 빼려다가 눈알이 다치는 꼴이다. 정치권의 태도도 큰 문제다. 역대 대통령들은 전두환씨를 청와대 만찬에 초대하고 취임식에 초대하며 전관예우를 다 해주고 있다. 그걸 보고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법으로 안되면 사회에서라도 응징해야 하는데 정치권이 한 일이 없다.”

‘거지왕’ 끝까지 쫓는 파파라치들

민주노동당은 26일 재산명시 재판을 주시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전두환씨가 법원에 제출한 재산내역에 허위사실이 있다면 이를 검찰에 고발해 관련법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5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는 계획이다. 민주노동당은 “신고센터를 통해 신뢰할 만한 제보들이 접수되고 있다”며 거짓목록의 검증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여기에 더해 추징금 환수를 원할하게 하기 위해 환수된 금액의 3분의 1 가량을 신고자에게 포상금으로 주는 미국의 ‘파인더스 피(Finder’s Fee)’제 도입을 추진할 예정이어서 그 실효성이 주목된다.

최근 추징금 환수에 대한 이색 제안도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8일 전두환씨가 부인 이순자씨의 홀인원을 기념해 ‘부르는 게 값’인 금송을 골프장측에 기념식수로 전달해 여론의 눈총을 받은 바 있다. 추징금 낼 돈이 없다는 전직 대통령의 이같은 뻔뻔한 행태에 “검찰이 돈을 찾지 못한다면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환수의 한 방법”이라는 제안이 그것이다. 전씨의 행보에 감시자가 많아진다면 맘놓고 돈을 쓸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전국민이 ‘거지왕’(29만 1천원이 전재산이라는 전두환씨를 가리켜 네티즌들이 붙인 별명)의 파파라치가 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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