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경 이어 경원하 박사 망명설 또 “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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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이 지난 4월 대서특필했던 북한 경원하(75) 박사의 ‘미국 망명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 박사의 망명설이 ‘오보’로 드러난다면 최근 길재경(69) 조선노동당 서기실 부부장의 망명설에 이어 또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고영구 국정원장은 3일 오전 8시 국회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 조찬간담회에 참석, 경 박사의 망명설에 대해 “미국과 호주에 확인해 본 결과 망명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구 국정원장은 이날 오전 정보위 비공개 간담회에서 북한 핵과학자 경원하 박사의 망명설에 대해 “미국 정보기관과 호주 등에 확인해 본 결과 경원하 박사가 망명했다는 호주 언론의 보도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경 박사의 망명은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국회 정보위 소속 한 의원은 “경 박사의 망명설이 몇몇 언론의 보도처럼 ‘사실무근’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면서 “다만 ‘망명했다’는 주장의 사실 여부를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보고였다”고 전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고영구 국정원장은 또 경원하 박사가 ‘핵과학자’라는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영구 원장은 “경원하 박사가 북한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인 키를 가진 과학자는 아닌듯 하다”며 “이는 경 박사의 논문을 분석해 본 결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고영구 국정원장은 “경 박사가 캐나다에서 유학한 뒤 72년 월북, 74년 다시 브라질로 나왔다가 2년 뒤인 76년 입북했다”며 “현재까지 북한에 있는지, 또 그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 일간지 <오스트레일리언> 보도 확인 안돼, 76년 입북 뒤 행방 묘연
경 박사의 망명설은 지난 4월 19일 호주의 일간지 <오스트레일리언>이 최초 보도하면서 국내외에 알려졌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언>의 주말판 신문 <위크엔드 오스트레일리언>지는 “북한 핵과학자인 경원하 박사와 고위 장성 등 20여명이 지난해 10월부터 치밀한 준비 하에 서방으로 망명했다”며 “경 박사 일행은 현재 서방 국가의 안가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라고 보도했다.

<오스트레일리언>지는 또 일명 ‘족제비 작전’으로 불린 경 박사의 망명 작전이 미국의 주도하에 치밀하게 준비됐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인 나우루 등 11개국의 도움을 얻어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경 박사의 가족들을 지난해 말 나우루 대사관을 이용해 망명시켰다”고 보도했다.

경 박사의 망명설이 다시 국내에 알려진 것은 이틀 후인 4월 21일 <경향신문>이 1면 머릿기사로 호주 일간지 기사를 인용하는 등 국내 주요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부터다. 그 뒤 국내 일간지들은 연일 경 박사의 망명설과 관계된 기사를 내보냈고, 이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경 박사의 망명설과 관련 4월 23일 베이징회담을 앞둔 미국 정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NCND) 입장을 취했다.

토마스 허버드 주한미대사는 2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 경 박사 망명설에 대한 “호주 언론의 보도가 명확한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언>의 보도 내용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망명설의 진위 여부는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이 허버드 대사의 입장이었다.

리처드 바우만 미 국무부 대변인도 21일(현지시간) 기자들을 만나 “(경 박사의 망명은)언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다”는 모호한 대답만을 남겼다. 망명설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현재 확인중”이라는 것뿐이었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입장이 모호해지자 망명설의 진위는 더욱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 정부 역시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한승주 주미대사는 22일 K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확인해서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 양국 정부는 “호주 일간지의 보도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밝혀 <오스트레일리언>이 오보를 했을 가능성도 부인하지 않았다.

반면 지난 5월 6일에는 오랫동안 탈북자들을 도와온 독일 출신의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45)씨는 “경원하 박사의 망명설은 사실”이라고 주장해 한 동안 파문이 일기도 했다.

따라서 3일 알려진 국정원장의 보고 내용은 ‘경원하 박사 망명설’을 둘러싼 그 동안의 논란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국정원장, “경 박사, 핵폭탄 제조에 결정적 역할하는 과학자 아닌 듯”
한편 ‘경원하 박사 망명설’의 진위 여부와 함께 당시 논란이 됐던 것은 ‘과연 경 박사가 핵과학자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 고영구 국정원장의 정보위 보고 내용을 보면 경 박사는 핵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과학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은 이에 대한 근거로 경 박사가 쓴 논문을 분석했다고 밝혔다(<관련기사> 참조).

애초 경 박사와 함께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공부한 한국원자력연구소 석호천(59. 핵물리학 전공) 박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 박사는 캐나다에서 핵과 관계된 일에 종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석 박사의 주장은 이미 국내에 퍼져 있던 주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이미 지난 90년 4월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가 경 박사를 ‘원폭전문가’로 묘사하면서 일찍부터 ‘경원하=핵과학자’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그러나 확인 결과 당시 <월간조선>의 취재도 확실치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 핵과학자들도 대부분 “경 박사에 대한 정보가 없어 확답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윤여길 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은 “경 박사는 플루토늄 추출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핵폭탄의 기폭장치를 개발한 인물”이라고 주장해 경 박사가 핵개발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레일리언> 기사를 최초 보도한 마틴 추로브 기자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경 박사가 핵과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추로브 기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경 박사가 핵과학자라는 근거가 미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얘기일 뿐이며, 여타 객관적인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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