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안문 사건 14주년 그리고 SARS…

이 뉴스를 공유하기

– 14년 전, 그러니까 1989년 6월 4일 이곳에서 있었던 ‘6·4 천안문사건’을 아십니까?
“잘 모른다.”
“들어본 적은 있다.”
“알고는 있다.”

– 6·4에 대한 어떤 의견이나 생각이 있으시면 좀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할 수는 없다.”
“매우 민감한 문제이고 국가에서 하는 큰 일이라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음 속에 간직한 말들을 다 할 수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알 것이다.”

– 14년 전 오늘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거나 다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다.”
“불쌍하지만 방법이 없다.”
“국가의 일이라 말할 수 없다.”

6·4 천안문사건 14주년을 맞이하는 천안문광장엔 뿌연 안개만 드넓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 그곳을 찾은 사람의 수는 아주 적었다. 광장의 곳곳에는 공안들과 사복 경찰 요원들이 경계를 강화하며 광장을 찾은 사람들을 사방에서 주시하고 있었다.

6·4 천안문사건에 대한 광장의 물음에 그 어떤 중국인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에 놀란 사람들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 어떤 대답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침묵하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천안문 사건 당시 학생시위에 참가한 시인 베이다오(北島)는 그의 시 회답(回答)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비겁은 비겁한 자의 통행증,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
보라! 저 도금된 허공 가득 흩날리는 쓰러진 사자(死者)들의 그림자들을. 얼음의 냇가는 이미 지나왔건만 어찌하여 사방엔 아직 얼음 덩어리들뿐인가?”

차가운 얼음의 시대는 중국인들을 어쩔 수 없는 비겁으로 내몰고 장갑차에 깔리고 인민의 군대에 희생된 사자(死者)들은 아무런 추모의 빛도 받지 못하고 지금도 허공을 덧없이 떠돌고 있다.

1989년 시위 당시, 700여 기관, 100만 이상의 시민과 대학생들이 계엄철폐와 군대철수 그리고 민주와 자유를 외치며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그리고 14년 전 6월 4일 새벽, 장갑차를 앞세운 무자비한 강제 진압에 200여명은 목숨을 잃고 3000여명은 부상을 입고 이 도시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당시 광장에는 중앙민족대 학생들이 손수 ‘정의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앞 중앙에 세웠으며 천안문에 내걸린 모택동 초상화는 시위대에 의해 먹칠을 당하였다고 한다.

장갑차에 의해 제일 먼저 짓밟힌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던 자리엔 공안의 순찰 오토바이만 맴돌고 천안문 주변에는 사스 예방을 위한 방역이 한창이었다. 사스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여기저기 한가롭게 관광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모택동의 초상화가 그윽한 미소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만 지나가던 새가 그것이 얄미웠던지 모택동의 초상화에 똥을 싸놓은 것이 보인다.

그렇게 사스와 중국인의 철저한 침묵 속에 묻힌 6·4 천안문사건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수당이 존재하고 정권이 교체되어야만 그 차별성을 위해서라도 앞선 정권의 과오들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노력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의 체제하에서 6·4 천안문 사건에 대한 평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정부는 6·4 천안문 사건에 대하여 발전 단계에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고 정당한 선택이었다는 기본 입장에서 더 이상 논의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중국인 스스로도 1989년 너무나 큰 아픔을 겪은 이후, 체제에 대한 모든 저항의지를 상실하고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무관심을 견지하며 자신들의 에너지를 경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여진다.

혹자는 사스의 초기 대응 실패 이후, 공산당의 투명성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고 중국인이 관료주의 시스템의 문제점 등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사스로 인해 중국의 민주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오히려 사스로 인해 더 많은 통제와 간섭이 생겨나고 있으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다니던 길이 막혀 돌아가야 하는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 불편을 감내하고 학교 기숙사에 있는 자식이 학교에서 나오지 못해도 부모는 그러려니 하며 매일 학교 교문의 창살에 매달려 자식을 면회한다. 그 안의 학생들 또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자신의 발전과 미래의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정부의 사스 방역활동에 자신의 할 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형국이다.

사스가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을 보다 위생적이게 하고 기초사회 시설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는 있겠지만 정치개혁이나 사회의 민주화를 가져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오히려 전체주의적 통제나 사회주의적인 관리시스템에 대한 비판 없는 수용을 보편화하여 민주화의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사스의 초기 대응 실패 이후 베이징의 시장과 위생부장관이 경질되고 신임 원지아바오(溫家寶) 부총리와 새 당총서기이자 국가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가 투명한 보고 체계를 요구하면서 매일 ‘사스와의 전쟁’ 최일선에 나서 싸우는 모습이 연일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사스로 유발된 공산당 내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경제적인 불이익을 조속히 모면하기 위한 가식적이고 연출된 모습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는 견해도 많다.

아래로부터의 자각이나 희생이 없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중국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6·4 천안문 사건 만큼이나 정치적, 역사적으로 메가톤급 파괴력과 영향력을 가져올 사스가 과연 ‘경제발전’이라는 당근을 적당히 나누어주면서 민주화의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히 재갈을 물리겠다는 중국정부의 기존 행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볼 대목이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