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파견 간호 보조사에서 유명 화가로 변신한 송현숙의 그림같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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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노동자의 고단한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 획 한 획 붓질에 담았습니다”
꿈도 펴고 돈도 벌기 위해 간호 보조사로 독일로 건너간 송현숙 씨. 고향 전남 담양 무월리에 대한 그리움을 틈틈이 그림으로 표현하며 외로움을 달래었다. 그리고 그 그림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아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이제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간호 보조사에서 유명 화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 유전을 만나보자.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화랑. 난을 치듯 굵은 몇 번의 붓질로만 이루어진 그림은 볕 좋은 날 마당에 널어놓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모시천을,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희디흰 고무신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고향집 뒤꼍 어디쯤엔가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항아리나 거름독을 떠올리게 한다.
“애기 낳으러 들어갈 때 꼭 고무신을 반듯하게 돌려놓고 들어가는 걸 봤어요. 옛날에는 애 낳다가 죽는 사람도 많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고무신을 가지런히 놓는다는 것은 다시 살아나올지 어쩔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을 잘 정리해놓는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신발이라는 게 삶의 형태와 통하는 것도 같아요. 정착하거나 이리 저리 헤매고 다니거나 하는 것 말이지요. 가지런히 놓인, 그대로 박혀 있는 듯한 것은 안정되어 있음을 뜻하는 의미도 있을 거구요. 아니면 아무렇게나 벗어서 놔둔 신발은 또 그대로 다시 어딘가 가야 할 데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할 터이고요. 어쩌면 내 고민과도 비슷해요. 정착하고 싶기도 하고 그냥 열심히만 살면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림을 보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궁금해 할라치면 얼른 다가와 열심히 설명을 하는 이는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인 화가 송현숙(51) 씨다. 작가의 본분이 마치 자신의 작품을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그 이해까지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에라도 불타듯 그는 연신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써가며 사람들 틈에 끼여든다. 작품 감상에서 그다지 친절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내 그의 구수한 사투리 속으로 빠져들면서 용기를 내어 묻기까지 한다.
“제목이 재밌어요. ‘7획’, ‘25획’, ‘1획 위에 7획’ 등 말이에요. 뭐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요?”
실제로 작품에는 바탕색을 빼고 숫자만큼 붓질이 돼 있다. 송씨는 얼른 ‘어머니가 어린 나를 손잡고 신수를 보러 갔는데 관상쟁이는 내 이름이 아닌 생년월일을 물은 기억이 난다’며 ‘인위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태어난 때를 물었듯 작품에도 분명 운명이 있을 것 같아 붓질을 작품의 생년월일로 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고향이 전라도 담양 무월리예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만 보이는 첩첩산중이지요. ‘자고로 여자는 많이 배울 필요가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도시 바람을 쐴 수 있었어요. 광주에서 자취하던 오빠 밥 해 준다는 명분으로 저도 광주 수피아여고에 진학했죠. 그런데 졸업하고가 문제였어요. 여상도 아닌 인문고를 나와, 그것도 지방에서 취업할 길이 막막했지요. 공부는 더 하고 싶었지만 형제가 여덟 명인데 시골에서 농사지어서 대학까지 가르칠 형편은 안 됐죠. 그렇다고 시골로 다시 돌아가면 시집이나 보내려고 하실 테고, 내 삶에 다른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 않았어요.”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밀려들 때마다 송씨는 글로 쓰는 일기 대신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기를 택했다. 고향집 뒤안 장독대, 절절 끓던 온돌방, 선반 어디쯤에선가 정갈하게 말라가고 있던 고무신, 불꽃 타오르던 아궁이와 그 위에 걸쳐 있던 가마솥, 쪽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로 바라보던 동네 풍경, 동네 어귀의 소나무와 대나무. 이런 고향에 대한 기억들을 그림으로 불러들여 연필과 색연필을 이용해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했다. 이 작업들은 결국 그의 포트폴리오가 되어 미술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규정된 3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1년간 독일의 시골 정신병원에서 일했어요. 그때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독일에 남아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막연히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1년 더 남아 있었던 거죠. 그러다 우연히 그림 치료라는 것을 접하게 됐어요. 기교적으로 완성된 그림이 아니어서 보기에 좀 떨어지는 그림이라도 전시도 하고 치료에도 이용되고 하는 걸 보면서 나도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기회의 땅이라고 여겼던 독일은 결코 그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녀는 틈틈이 그려둔 그림 20여 장을 그 이듬해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보냈고, 기교보다는 가능성을 더 평가했던 대학측이 입학을 허용했다. 그녀는 이제 미술대학 학생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대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화가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어떤 형식으로든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 매개가 그림이 됐을 뿐이었다.


남편 요헨 힐트만(58) 씨와는 77년 우연히 기차에 동석하면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미래의 구세불인 미륵불의 도래를 기다리던 한국 민중의 의지를 풀어낸 ‘미륵’책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 조각가 출신 예술 이론가다. 송현숙 씨는 1984년 전남대로 유학을 와 동양화, 한국미술사를 연구했다.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한들 역시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살림하는 주부였기에 그녀는 서울의 홍익대나 서울대를 가지 못하고 친정 근처인 전남에서 공부할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한국 주부들은 육아와 자기 일을 어떻게 병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따라 배웠다고 한다.

덕분에 20대 이후 30년이 넘도록 살아 반 독일인이 다 되었을 거란 짐작과는 달리 그는 무월리 고향집에서의 삶을 독일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요. 생활의 터전이 독일인데 그걸 그대로 한국으로 옮겨놓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거죠. 우리 집 텃밭에 한국과 독일의 여러 채소들이 자라고 있어요. 쑥갓은 꽃도 피고 씨도 잘 여물지만 깻잎은 잘 자라기는 하는데 씨는 안 열려요. 그래서인지 쑥갓이나 파가 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죠. 그대로 죽지 않고 잘 자라는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잘 어울려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곤 합니다.

독일에서, 한국에서 부지런히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는 송현숙 씨.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의 지향은 그것이 전통이든 문화이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되돌아봄과 성찰을 통해 어떤 형식으로든 삶을 느릿느릿 정직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게 아닐까. 이를 붓질로 화폭에 담고 사진이나 영상에 담아내어 현대인들에게 내보이고 되묻는다. ‘과연 당신의 삶은 행복한가?’ 그의 메시지는 간결하지만 깊은 울림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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