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중국입장 후 추석 북한에 개혁, 개방을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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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체제의 붕괴는 아직도 원치않고 있지만 김정일돕기에 희생불사할 생각 추호도 없어

“피로 맺은 우의(友誼)의 시대는 끝났다.” 중국의 차가운 사선에 북이 굴복하는 날은 가깝다…….일본 시사평론잡지 <제군>의 9월특집 ‘김정일원조루트를 봉쇄하라’에 도꾜신문 편집위원 시미즈 요시가즈(淸水)씨가 기고한 글의 리드타이틀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편집자 주]

북한의 핵위기해결을 위해 중국은 7월에 미국과 북한양측에 정부특사를 파견하여 부시 대통령, 김정일 총서기에게 보낸 후진타우 국가주석의 친서를 수교했다. 94년의 북한에 의한 핵개발의혹에서는 볼수없엇던 “진짜”중개에 나서고 있다.

전에 ‘철석’같던 중국과 북한의 이년적인 연대감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며 최근에는 상호의 불신감도 감출 길 없다. 지정학적인 전략에서 서로 이용하고 있지만, 중국은 북한의 벼랑끝외교에 불쾌감을 나타내고 주변국과 협조해서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상의 ‘압력’을 가하는 것도 불사하게 되었다.

<胡주석의 새 외교노선> 당.정일치로 對北정책 일원화 ‘방패’정책서 개방촉구쪽으로

배경으로는 올 3월 발족한 후진타우정권이 새로운 외교전략을 내건데 있다. 90년대후반부터 미국중심으로 너무 기운 외교를 고쳐, 일본이나 한국, 인도등 주변국과의 협력관계를 중시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전략전환을 촉구한 것이 이라크전쟁에서 보인 미국의 “일강지배”와 압도적군사력에 대한 경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중국정부특사’로서 북한과 미국을 차례로 방문한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은 지난 3월까지 공산당의 외교부장에 해당하는 당중앙대외연락부장을 지냈다. 당이 정부를 지도하는 중국에서는 실은 외교부장보다 격이 더 높았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이 “형제당”을 표방한 시대부터의 전통으로 중국의 대북한외교는 쭉 당중앙대외연락부가 창구가 됐었다. 다이는 당외교 책임자로서 2000~01년사이 장쩌민(강택민)과 김정일의 상호방문 정상회담을 마련한등 북한에도 굵은 파이푸를 갖고 있다. 그런 그를 일부러 격도 낮은 외교부부장으로 앉혀 당과 정부의 대북한외교를 일원화한 것은 후 정권의 핵위기시프트에 다름 아니다.

한국전에의 중국의용군출병(1950년)이래 “피로 뭉쳐진 우의”를 내걸어 온 중북양국이 90년대부터 상호불신이 커가고 관계에 냉냉함이 더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을 그들의 영향아래 두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거듭해왔다.
명치학원대의 아키쯔끼 노조무(秋月)교수는 이 배경에는 중국이 북한을 “동북의 전략적 방패”(당중앙선전부 ‘국제보도에 관한 지침’)라고 표현한데서 알수있는 것 처럼 전근대의 ‘화의(華의)질서’ 이래의 ‘반병(潘屛)을 확보한다는 의식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붕괴해서 대량의 난민이 국경에 밀려오고 미군기지를 안은 친미정권이 압록강까지 다가오는 사태는 공산권정권에게는 악몽이다. 이를 막기위해 중국은 대외원조의 3분의 1에 달하는 지원을 해서 북한을 지탱해주는 한편으로 개혁.개방에 나서 체제를 안정하도록 설득해 왔다. 한 중국의 연구자는 ” 만약 북한과 한국의 위치가 남북 거꾸로였다면 중국은 옛적에 북한을 버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북관계에 변화뚜렷> “중국은 修正주의”正日비판에 등소평격로하자 김일성 사과

중북관계가 냉각화한 것은 92년 중국과 한국의 국교수립이 직접적 계기이다. 그러나 80년대부터 본격화한 중국의 개혁.개방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연대감이 사라지고 공식.비공식을 포함 39회나 방중했던 김일성과 모택동, 등소평과의 동지적신뢰관계가 세대교체에 의해 끊긴 영향도 크다. 아버지뒤를 이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김정일은 83년에 최초의 비공식 방중으로 경제특구의 광동성 심천에 갔었다. 그러나 직후에 “중국은 수정주의로 타락했다”고 비판해 등소평을 격로시켰다고 한다. 당시 등은 김일성에게 경제의 정체를 벗어나려면 외자를 도입해 시장경제적수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김일성은 충고를 받아들여 정일에게 심천을 시찰시켰는데 중국의 기대는 결실되지 못했다. 김일성은 등소평에게 자식의 잘못을 사죄했지만, 양국관계는 금이 간채 중국은 서울올림픽(88년)에 참가하고 끝내는 한국과의 국교정상화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도 오랜동안 김정일의 생각은 바뀌지 않은것 같다. 93년3월 조선노동당중앙위에서의 담화서도 ” 사회주의배반자들은 ‘행정명령식체제’가 국가소유제의 절대적지배에 의존하는 것이다 라며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공유제를 사유제로 바꾸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련이 해체(91년12월)한 후의 시점서 그가 비판한 ‘사회주의의 배반자’란 92년 공산당14회대회에서 계획경제체제를 포기하고 “사회주의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결정한 중국이었던 것이다.

북한이 중국의 개혁지지를 표명하는데는 김정일자신이 대중관계 수복을 위해 2000년5월과 01년1월의 2회, 방중하여 상하이등을 찾은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위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최근에는 중국외교관의 김정일평가도 “우리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바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국지도자간의 신뢰관계는 이전처럽 회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장쩌민방북을 마지막으로 정상급교류가 2년가까이 중단되고,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장에서 후로 교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교류가 재개되지않은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작년10월에는 북한이 독자의 개방정책으로서 설립한 신의주특별행정구의 장관으로 선발한 내델랜드국적 중국인 양빈을 중국당국이 경제범죄로 체포해 올 7월 징역18년형에 처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은 북한에게 개방정책을 권고하면서도 중국국경에 “완전히 자유로운 자본주의사회”(양빈)를 출현시킨다는 구상에는 반대해 38선에 가까운 개성에 경제특구를 설립토록 작용했던 것이라 한다. 김정일이 듣지않고 양빈을 발탁한 것은 양의 거액헌금이 원인이라 했다. 양의 사기. 증회를 내사헤온 중국측의 양 단죄는 김정일의 독단전횡에 대한 강렬한 경고였던 셈이다.

<북핵강행에 중국 발끈> ‘비핵화’만 강조등 북에 배려하다 작년10월발각땐 불쾌감 노골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북한의 핵개발임은 물론이다. 양국은 어느 한나라가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나라가 “전력을 다해 군사상 기타의 지원을 한다”(제2조)고 정한 ‘상호원조조항’을 포함한 중조우호협력상호조약(61년 조인)을 체결했다.
그러나 92년 한국과의 국교때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에 관하여 내외에 “평화공존5원칙에 기초한 (일반적인)국가관계이다”(외교부 대변인)이라고 선언, 상호원조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그후도 북한측은 되풀이해서 이 조항의 재확인을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측은 명확한 회답을 피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군사적방패를 잃은 북한은 그후 급속히 핵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하면 중국은 동북아에서 유일한 핵보유국이라는 전략적우위를 잃고만다. 일본이나 한국의 핵무장에 구실을 주고 동아시아의 군비확장경쟁을 초래해 중국이 지상과제로 삼은 국내경제 건설을 위협할지도 모른다. 김일성생존중 발생한 94년핵개발의혹때는 중국은 북한의 핵에 관해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 얽어 “한반도의 비핵화”를 희망한다는 것으로 미국이나 일본과는 줄을 긋고 북한에 대한 배려를 나타냈었다.

그런데 작년10월 발각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장쩌민등 중국요인은 “북한의 핵개발을 전혀 몰랐으며 관여하지도 않았다.”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직후에 방미한 장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유지를 위해 미중협력을”이라고 까지 호소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변화를 내다보고 대량의 원조로 북한을 지탱해준 중국이야말로 사태를 해결할 책임이 있다며 압력을 더해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압력에도 밀려 올 2월에는 북한에 원유를 공급하는 파이푸를 3일간, “사고”를 이유로 정지했으며 3월에 북한을 방문한 전기심 부총리(당시)는 김정일의 벼랑끝외교에 강한 경고를 발하고 “이것이 마지막 조정이다”고 마했다한다.

북한은 중국의 설득에 응하는 형식으로 미국, 중국과으 3자협의에 응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미국의 켈리차관보에게 핵무기보유를 밝히는 등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이 통고도 협의도중 중국대표가 없는 타이밍을 틈타 하는등 중국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북한의 프라이드를 존중하는데 우선하던 중국외교는 최근 커다란 변모를 이루고 있다. 표면상 ‘전통적인 우호’를 강조하고있지만, 핵문제에서는 한.미.일에의 접근자세를 감추지않고,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압력”도 불사하고 있다.

<참전공과등 이반현상> “미공격 묵인””정일정권 타도” 北혐오감이 대중레벨로 확산

변화의 배경에 있는것은 개혁.개방의 20여년을 거친 중국인의 의식의 변화이다. ‘혈맹우의”의 원점이라고 할 한국전참전의 공과를 에워싸고도 중국에서는 최근 공공연한 논쟁이 벌어졌다. 참전50주년(2000년)을 앞두고 광동성광주시의 월간잡지 <수필>(99년12월호)에 실린 ”원희’명의의 “진상”이라는 글은 의용군파병이 국익을 그릇쳤다고 비판하였다. “중국은 UN으로부터 20년에 걸쳐 배제당해 세계와의 교류에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경제나 사회진보는 현저하게 저해되었다.” “한국전 발발이후 미국은 전략방침을 바꿔 (대만해협에)제7함대를 출동시켰기 때문에 대만통일의 목표는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이에 대해 보수계잡지의 <중류>나 <진리의 탐구>(현재는 폐간)등은 참전은 미국이 중국동북을 위협한데에 반격한 “정의의 행동”이라고 세차게 반격하였다.

원래 중국에는 한국전에서 중국이 다대한 희생을 치루었는데도 북한이 자국내에서는 중국의 공헌에 대해 선전도 하고있지않는다 라는데 강한 불만이 있었다. 한국전에의 참전을 칭송하는 공산당의 공식견해에도 불구하고 그후도 참전이 중국을 고립시키고 대만통일을 물건너가게 했다는 견해가 인터넷등에서 수없이 발표되고 있다.

또 북한의 핵개발에 관해서도 최근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세차게 반발해 “미국의 군사공격을 중국은 묵인해야 한다””중국이 출병해서 김정일정권을 타도하라”등의 과격한 주장이 공공연히 전개되고 있다. 이들의 의견에서는 김정일에게 경멸의 칭호인 소(小)자를 붙여 “소김”(小金)이라 부르는등 매도하는 것도 많다. 중국의 인터넷은 현재도 당국의 감시하에 있으며 공산당이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은 당장 삭제당하고 당자는 체포되는 일이 많다. 북한과 김정일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삭제되지도 않고 인터넷상에 넘치고 았는것자체가 정부의 태도가 크게 변한 증거이다.
문화대혁명등 극좌노선에 의한 가혹한 체험을 겪은 중국에서는 북한체제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국경에서는 중국조선족의 북한친척 방문이나 북한부터의 국경을 넘어온 벌이가 성행해 북한의 비참한 실정은 중국에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를 강조하는 겉치레 선전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엄격한 견해가 대중레벨에서도 널리 퍼져가고 있다. 현재로서는 북한의 체제붕괴를 피하려고 “방패”를 지키는 기본방침을 바꾸지않고 있지만, 김정일을 돕기위해 국익을 해치며 다대한 희생을 치룬다든가, 하물며 미국과 전쟁도 불사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추호도 갖고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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