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이렇게‘核’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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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렇게‘核’을 손에 넣었다
개발 첫主役은 일본留學 과학도들 우라늄輸出로 한국전쟁軍費를 충당
북한의 핵개발은 1962년 북한의 이공계(理工系)대학을 졸업한 젊은 과학도들의 희생과 우랴늄 수출대금및 많은 인민을 굶주리게하며 마련한 수10억달러 자금의 낭비로 이뤄진 것이라고 미국 뉴스위크의 특별취재팀(팀장 조지 웨어프리츠 동경지국장)은 보도하였다.

특히 핵개발의 계기나 단초는, 2차대전전에 일본측이 북한북부에서 개발한 우라늄광산과 일본에 유학갔던 한인과학자들의 동원이었다는 점에서 새삼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편집자 주]

북한의 핵개발계획은 예기치않은 전개가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중국도 소련도 아니고, 2차대전전의 일본제국이었다.
한반도가 아직 일본의 식민지지배하에 있던 시대에 한반도출신의 우수한 젊은 연구자들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50년대에 북한의 핵개발이 시작되었을 때 엘리트과학자의 중핵에 있은 것은 그들이었다. 북한 핵개발의 “최초의 아버지”라고 하는 과학자겸 발명가 이승기(李升基. 고인)도 교도제국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자 80명이 북으로

인본은 전시중 북한북부 산지에서 비밀리에 핵개발을 진행하였다. 패전한 일본이 버리고 간 우랴늄광산이나 정제시설을 북한 공산세력은 당장 이용, 소련에 우라늄을 수출했다.

“ 50년에 북한이 한국측에 침공한 것은 우라늄수출로 번 돈으로 군비를 증강할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고 아시아태평양안전보장연구센터(미국 하와이)의 북한문제전문가이며 전에 러시아외교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만스로브는 지적하였다.

더욱이 미국의 부주의한 정책이 북한의 핵개발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해방후 한국에서는 탄생직후의 이승만정권이 미국방침에 따라 교육제도개혁을 강행했다. 반대파는 좌파계교수의 추방을 노린 책략이라고 주장하며 반대(소위 국대안 반대운동)했지만 정부는 개혁을 단행, 서울대에서만 38명의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직을 잃었다. 대학을 쫓겨난 과학자의 다수는 기껏, 작은 직업훈련학교의 교사정도밖에 취직자리가 없었다. 거기에 접근한 것이 북한 공작원이었다. 전주에 있는 전북대 김근배교수(과학사)에 의하면 북측은 이데올로기 얘기는 일체 하지않고 북에 가면 과학연구를 위한 자금을 대준다고 약속했다. “한국전이 끝날때까지 대학을 나온 과학자의 약 40%, 대강 80명이 북으로 망명했다”고 김교수는 말했다.

북한의 공안측이 노리고있지 않는 한 연구기회는 크게 열려있었다. 56년에는 소련의 드브나에 갓 설립된 핵연구소에 북한과학자들이 보내졌다. 이즈베스챠지(전 소련정부 기관지)의 기자였던 알렉산드르 제빈에 의하면 약 250명의 북한으로부터의 과학자가 드브나에 유학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소련과학자들도 북한에 초청됐다. 그 과학자팀의 협력아래 영변에 연구용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이 기간에 많은 북한 과학도가 희생된 비극이 벌어졌다.

1962년당시 북한의 이공계 대학생들이 대거 졸업을 앞둔 무렵 대학구내에 한가지 뉴스가 떠돌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을 위해 건설중인 새로운 연구소에서 원자력 연구자를 찾고있다_고. 졸업직전이 되며 “대학 교수들이 핵개발의 필요성을 열심히 설명하고 다녔다”고 2년전 망명에 성공한 졸업생의 한사람은 증언했다. 다행히 이 탈북자는 다른 직장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방사선장해로 야윈 전의 동기생을 몇번이나 만났었다. “ 걱정했던 대로였다. 동기생의 다수는 눈썹이 없어졌고 코피가 멈추지않는 저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당국은 인간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취급한다고 이 탈북자는 분개했다. “ (북정권은 과학자가 죽어도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냉혹한 논리의 희생이 된 것은 과학자만이 아니다. 북한당국이 핵개발을 위해 수십억달러의 자금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많은 주민이 기아에 고통받는 사태는 피할수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원자로는 완성되어 65년에 가동을 시작, 북한의 핵개발계획은 가속이 붙었다.

이어 이 영변시설(북한에서는 ‘가구공장’이라 불리우고 있다)을 중핵으로 우라늄광산, 핵연료제조시설, 사용후 핵연료봉에서 무기급 풀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공장등 핵관련시설이 속속 만들어졌다.

국제기관서 노하우 수집

핵관련시설에서 사용된 기재의 다수는 소련제 기계에 북한과학자가 개량을 가한것이었던 듯 하다. “원자력에너지의 평화이용과 비 평화이용의 구분은 극히 어렵지만..”라면서 모스크바의 국제응용연구소 유리 표드로프 부소장은 “북한의 핵관련 지식은 기본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얻었다고 말해도 된다”고 단언했다. 하긴, 소련은 핵폭탄의 제조방법은 물론이고 핵개발의 열쇠가 되는 기술을 북한에 제공하기를 계속 거부해왔다.
70년대가 되자 국제정치의 역학이 양국사이를 차츰 갈라놓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공동으로 국제적인 핵확산방지체제 만들기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김일성은 권력투쟁중에 조선노동당내 친소파를 철저하게 숙청한 탓에 양국간 긴장은 더욱더 높아졌다.

그 결과 북한은 소련에 의존하지않고 ‘주체사상’아래 자력으로 핵개발을 추진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핵개발에는 북한외교관도 한몫을 했다. 촤학근도 그 한사람이다. 최는 74~78년 빈의 IAEA(국제원자력기구)본부에 파견된 동안 본부 도서괸등의 공개된 정보원을 철저히 조사해 핵개발의 노하우를 수집한 것이다. 한국당국은 80년대전반까지 최의 활동을 전혀 몰랐다. “IAEA로부터 북으로 흘러간 정보의 내용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국의 한 저명한 과학자는 뉴스위크 취재팀에 말했다. “ 하긴 그 당시 IAEA의 주된 목표는 핵기술의 통제가 아니라 보급쪽이었다”고 덧붙이면서도…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기는 요 10년정도이다. 공산권 붕괴로 소련이나 공산각국부터의 경제원조가 없어진데다 안보상의 불안을 느끼게쯤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은 자국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에 나섰다. 특히 중점이 두어진게 국방용과 수출용의 탄도미사일 개발. 그리고 생물.화학무기제조의 확대였다. 이때쯤에는 북한의 핵에 대한 관심도 원자력발전에서 핵무기로 옮겨지고 있었다. 핵무기개발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전의 우호국이던 러시아도 중국도 북한과 더욱 거리를 두게쯤 된 것이다.

파키스탄이라는 협력자

그래도 북한은 새 파트너를 찾았다. 파키스탄이다. 인도 정보당국의 소식통에 의하면 양국의 접촉은 88년에 베나지르 부토가 파키스탄총리가 되면서 시작된 것 같다.
이스라마바드주재 서방외교 관계자에 따르면, 93년에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의 아버지’라고 하는 과학자 압둘 카딜 칸이 북한관계자와 접촉하고 있다. 핵무기의 운반시스템을 필요로 하던 칸은 북한의 미사일기술에 주목한 것이다.

94년에 사망한 아버지 김일성을 이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일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탄도탄미사일 ‘대포동’의 파키스탄판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설계도와 부픔제공에 동의하고 대신에 우라늄농축에 필요한 원심분리장치의 공여를 요구했다고 서방외교통은 밝혔다.
칸은 파키스탄의 핵개발계획에 관하여 발언하기를 거부하고 잇지만 이때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무사라프 대통령은 이러한 거래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했다. “ 400% 단언해도 된다. 우리나라와 북한사이에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무시라프는 올1월 말했다. “ 핵시설의 이전은 전에도 없었고 장래에도 있을수 없다”고.

93~94년에 북한의 핵의혹을 둘러싸고 긴장이 높았지만, 94년10월에 미.북한간에 <핵 틀합의>에 조인해 위기는 회피되었다. 이 합의로 북한은 핵무기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경수로거설을 지원키로 하여 경수로가 완성예정이던 2003년까지 해마다 중유 50만t을 공여키로 했었다. 그러나 <핵 틀합의>는 작년 북한의 우라늄농축계획이 밝혀짐으로써 붕괴했다. 의혹을 들이대자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으로 나가 IAEA사찰관을 추방하고 NPT(핵확산방지조약)로부터 탈퇴했다.

‘중점연구소‘로부터의 증언

북한의 합의파기는 <핵 틀합의>가 맺어진 즈음부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90년대에 영변의 시설에서 일하고있었다고 주장하는 북한여성연구자 에 의하면 거기서는 무기개발을 은닉하기 위한 공작이 행해졌다고 한다.(본보 406호. 지난 5월4일자 참조. 편주)

이 연구자가 작년 중국에 탈출한 후에 한 발언의 기록이라는 문서를 입수했는데 그녀가 소속 했던 304호연구소는 핵무기와 함께 화학무기의 개발도 하는 ‘중점연구소‘였다고 한다. “ IAEA사찰관의 눈을 속이기 위해 “ 관련기재는 모두 지하로 옮겼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90년대의 핵사찰후에 ‘ 8월기업소‘라 이름지은 새로운 시설이 건설되었다, 다른 연구소와 떨어진 산림안에 건설된 이 연구소는 철도로 다른 핵시설과 연결되어 “ 보내온 우라늄을 가공해 각 연구소로 공급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지난10월중순 부시 미대통령이 방콕 ASPAC정상회담 참석차 아시아순방길에 오르기 직전, 기분 나쁜 경고를 발했었다. “ 요즘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핵억제력 유무에 관하여 의논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때가 오면 핵억제력을 보여줄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위협의 의미는 미국이나 이웃나라에 대한 무례한 원조나 양보의 요구보다 훨씬 심각하다.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다고 하면 절망적인 빈곤에 허덕이는 고립한 개발도상국이라도 지배자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핵무장이 가능함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 인구2000만~2300만의 나라가 자국 경제를 희생시키면 (핵개발에 필요한) 인재를 모을수는 있다”고 몬테레국제대의 핵확산문제잔문가 다니엘 핑크스턴은 말한다.

미정보기관의 전문가에 의하면 북한당국의 경고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북한이 무기용 풀루토늄 추출에 착수한건 틀림없다.
지난번 추출프로세스의 부산물로 생성된 크립턴85라는 방사성동위소가 북한부근 상공에서 검출되었으니까. 남은 문제는 어디서 추출작업을 하느냐 이다. 한국정부의 안보전문가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이나 이웃나라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크립턴85의 방출을 억제하는 특수한 탄소필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그후는 부품을 조립하는 것 뿐이다. 완성된 핵무기의 운반수단은 탄도미사일 외에 화물선의 컨테이나 던가 잠수함에 싣는 케이스도 생각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와의 가격협상이 타결되면 핵무기를 팔 가능성도 있다. “ 북한은 현시점에서 초보수준의 핵폭탄을 5~6개 제조할 능력이 있다”고 한국외교안보연구원의 김태효교수는 지적한다. “ 핵폭탄을 호놀룰루나 알래스카로 운반할 수단도 이미 갖고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은 자국의 핵제조능력을 실제보다 낮게 보여주는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90년대후반 원자탄개발에 불가결한 고강도의 폭발실험을 실시했다고도 한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핵무기를 폭발시키기위한) 시스템이 정상으로 가동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위해 행해진다”고 서울의 서방측외교관은 말한다.
북한은 핵연료봉재처리를 시작하기전에 적어도 핵탄 1개분의 원료를 입수했다고 보여진다.

“1~2개분, 때에 따라서는 3~4개분의 원료를 추출한 것 같다”고 이 외교관은 말한다. “핵개발 프로세스의 시간적흐름을 생각하면 현재까지는 신뢰도가 높은 초보수준의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북한과 핵기술을 교환하였다고 소문난 파키스탄등 다른 개도국의 개발페이스로 보아도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제조능력을 갖고있음을 시사해주는 재료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구미각국은 지금도 북한이 방침전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외교전문가사이에서는 북한이 11월에라도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한국과의 다자협의에 응하리라고 보고 있다.

확실히 북한의 협박도 이제는 한계일 것이다. 만약 김정일이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우거(愚擧)로 나온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게 된다. 이때까지 마음대로 구사해온 권력이나 특권도, 나라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물론 김정일도 저 ‘62년조’와 같은 운명은 더듬고싶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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