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과 오욕으로 얼룩진 두번째 결혼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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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오욕으로 얼룩진 두번째 결혼생활…
조용기 목사 日 전진기지 구축위한 정략 결혼

조희준 사업·해외선교사업 핑계삼아
연예인들과 방탕한 ‘엽색행각’

증권투자로 수십억엔 날리고 위자료 1억엔 아끼기 위해
가정재판 「조정」까지 불사…

조용기 목사 일가 치부 드러나


조희준 씨의 아버지인 조용기 목사는 지난 80년대 초반부터 ‘세계 선교화’라는 깊은(?) 뜻을 품고 해외선교 활동에 나섰다. 일례로 지난 81년 1월부터 ‘일본지구 1,000만 구령운동’의 조용기 목사는 매월 정기적으로 일본 동경 등지를 방문해 목회 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배경 탓인지 조희준 씨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 지역에 방문하는 일이 잦았고, 이유야 어쨌든 간에 조희준 씨 또한 한국에서 첫번째 결혼 실패 이후 90년대 초반 일본 정착을 목표로 도일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도출된다. 왜 정착지로 삼은 곳이 일본이었느냐는 점이다. 여러가지 정황을 유추하건대 현재까지 법원기록 등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조희준 씨의 아버지인 조용기 목사가 이혼소송 등으로 방황하는 아들의 심리적 안정 등을 이유로 장남의 재혼을 서둘러 추진했던 것 같다. 이러한 아들의 재혼추진 과정에서 교회 신자 중 한명인 일본인 여성 ‘나카무라 유리꼬’ 양을 며느리 감으로 낙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조희준 씨와 나까무라 유리꼬 양의 결혼과정 및 이혼에 이르는 전모를 살펴보면 철저한 교계간 정략적 결혼이 실패로 이어지는 모습이 엿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아니 교단의 최고위층으로서 일종의 ‘명령’과도 같은 무언의 압력조차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꼬 양 양친을 포함 친인척들이 ‘순복음교회’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까무라 양의 고종사촌(고모의 자녀)인 오쿠보 미도리 씨는 문제의 결혼 당시 일본 오사카 지역 주 예수 그리수도 교회 주임목사였다. 오쿠보 미도리 목사가 주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앞서 언급한 순복음교회의 ‘일본지구 1,000만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교회였다.

또한 유리꼬 양 양친을 비롯 본인 또한 이 교회의 신자로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는 어려서부터 사제지간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들리는 바로는 조용기 목사의 장남인 조희준 씨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10대 후반부터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순복음교회의 전세계적 신앙전파’를 위해 사업 전선에 뛰어드는 등 꽤나 비상한 두뇌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용기 목사는 이러한 조희준 씨를 ‘일본지역 선교’의 최선봉으로 내세우기 위해 ‘국민일보 JAPAN 지사’를 설립하는 등 아들을 위해 전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여성과의 결혼으로 아들이 일본명 ‘오바야시 다이찌’로 개명하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니 그 속내가 참으로 궁금할 정도다.

조희준 씨는 서울예고-서울 음대- 맨하튼 음대를 차례로 졸업하며 ‘음악학도’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 엘리트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전공인 ‘음악학도’로서의 꿈을 접은 채, 10대 후반의 나이부터 ‘사업가’로서의 길에 본격 뛰어들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미국 유학시절 새로운(?) 문화를 접한 조희준 씨는 다소 사치와 방탕한 생활 등 나쁜 습관에 젖어 들었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연예인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전처인 탤런트 출신 나종미 씨를 만나게 되어 전격적으로 결혼했으나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조희준 씨는 이 문제의 이혼과정에서 조폭 ‘서방파 두목’ 김태촌 씨를 동원했다는 의혹에 휩싸이는 등 법정소송으로까지 치달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 조용기 목사가 장남의 재혼과정에 적극 개입했고, 조용기 목사의 ‘일본인 며느리 고르기(?)’ 과정에는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많이 노출되었다.

왜 굳이 일본여성을 택해 아들 조희준 씨로 하여금 일본명으로 개명하게 만들었는지, 과연 ‘삼성가 황태자’ 이재용 씨의 비자금을 비롯 유수한 유명인사들의 자금을 끌어들여 일본 증권시장에 투자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 이어 끝내 파경으로 치달아 이혼소송 등으로 점철된 조희준 씨의 소송기록을 토대로 그의 ‘가식과 오욕으로 얼룩진 초상화’를 계속 연재한다.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
장남 조희준의 방탕한 사생활

두 번째 결혼
또한 순탄치 않고…


조희준 씨와 그의 두번째 부인 나카무라 유리꼬 씨의 신혼살림은 우선 처가집이 있던 오사카에 자리잡게 된다. 즉 조희준 씨의 장인인 ‘의사’ 나카무라 씨가 경영하는 오사카부 도요나카 시의 접골원 별원 5층에서 신혼 첫 살림을 장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처가살이(?)’는 세 달도 채 못 지나 문제를 일으켰고, ‘더부살이’에 이골이 난 조희준 씨는 부인과 독립하기에 이른다.

지난 91년 5월 결혼한 지 세 달만에 ‘처가살이’에서 벗어나 조희준 씨 부부는 인근 시내 다른 곳으로 독채집을 얻어 잠시 세 들어 살다가 다시 맨션으로 옮기는 등 도요나카 시에서의 생활면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결국 이듬해인 92년 11월 도쿄로 이주하기까지 무성한 뒷소문이 수반된 다툼만이 들끓었다.

우선 신랑인 조희준 씨의 전처인 나종미 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의 부양문제가 둘 사이에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조희준 씨는 전처 소생인 첫 딸을 끔찍이도 아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새로운 아내가 된 유리꼬 씨에게 전처 소생의 딸을 “함께 데리고 살자”고 설득했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 조희준 씨는 재판과정에서 “부인은 동의했었는데 장인 등 처가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푸념한 기록이 남아있다. 처가 측의 이 같은 반대로 전처 소생의 딸은 처가와 친척이 되는 오쿠보 미도리(전 교토대 심리학교수) 씨가 주재하는 오사카 주 예수 그리스도교회에 맡겨지게 된다.

이 같은 과정에는 조용기 목사가 개입해 오쿠보 여사에게 손녀 딸의 생활비 조로 ‘미화 100만 달러를 예치시켰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훗날 이는 재판과정에서 유리꼬 씨 측의 진술과정에서 말썽의 소지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밝히기로 한다.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한 처가살이에서의 마찰은 심했다.
조희준 씨 처가 측은 “어떻게 키운 귀여운 막내 딸인데 가정부도 두지 않는다… 집세도 내지 않는다” 등 강한 불만을 토로했고, 이에 맞서 조희준 씨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사위의 흉을 보느냐… 재일 한인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등 양측의 대립이 엄청났다.

차라리 이때쯤인 결혼 초기 대립은 속된 말로 ‘양반 축에 낀다’라는 말에 가까웠다.

조희준 씨가 어린 나이인 17세부터 추진했던 사업(무역업)을 위해 오사카에 직원 5명을 둔 회사를 설립(훗날 문제의 투자회사인 I.C.E로 개명), 나름대로 기반을 닦으려 애쓰던 시절이 이때쯤이었다. 이는 나름대로 조희준 씨가 참아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는 첫 결혼실패 이후 일본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꾀하기 위해 일본인 여성과 재혼을 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참았다’는 해석이 억측은 아닐 듯 싶다.

아무튼 이때의 경제상황을 잠시 살펴보자면 도요나까 시의 평균 집세가 단독주택은 월 약 50만엔, 맨션은 월 약 30만엔 수준이었다. 조희준 씨는 지난 92년 11월 도쿄로 이주하면서 아버지인 조용기 목사가 설립한 국민일보 도쿄 지사의 핵심적 일을 맡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준비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인도 이혼 소장(7/22/94)에서 “결혼 초기에는 무역관계의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지만 도쿄로 이주한 후로는 부친의 종교단체의 포교활동을 지원하는 신문사(국민일보)의 해외사업 활동을 수행하느라 해외출장이 잦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특히 지난 92년 8월부터 9월에 이르기 까지는 해외선교 사업 등 일관계로 해외출장이 잦아짐에 따라 집을 비우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어찌 보면 바로 이 무렵부터가 조희준 씨의 방탕한 생활이 다시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로 이주한 뒤
둘의 불화는 점점 커지고…


조희준 씨에게는 딸이 셋이 있다. 첫 부인이었던 나종미 씨 사이에 보미를 두었고, 두번째 부인 유리꼬 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 보란, 보영을 보았다.

도쿄로 이주한 지난 92년 11월은 조희준 씨가 막내 보영의 출생을 앞둔 시점이었다. 즉 도쿄 생활은 92년 11월13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정착할 집을 찾기 전 호텔 오타니에 2~3주일 체류한 후 시부야구 지역 맨션을 구했다. 당시 집세는 월 약 74만엔. 도쿄 거주당시 유리꼬 씨는 식비 등으로 매월 30~40만 엔을 받았고 조희준 씨는 별도로 집세나 가정부의 급료를 지불했다고 했다.

특히 92년 11월 23일 두 번째 아이출산을 앞두고 가정부를 월급 15만 엔에 고용하게 되었는데 이를 놓고 양측의 주장이 법정에서 팽팽히 이어졌었다.

조희준 씨는 한국으로부터 50대 여성을 가정부로 모셔(?) 왔기에 월 2회 한국을 왕복시키는 비행기 왕복비용까지 합치면 월 30만 엔이 들었다는 주장이다. 결국 법정소송으로까지 비화되자 이러한 지출문제를 입증하기 위해 조희준 씨는 치사하리만큼 인색함을 보였다.

우선 오사카 거주 때부터 조희준 씨가 주거했던 주택들 즉 독채, 맨션 등의 월세에 대해서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의 거주지는 회사 고객의 접대나 숙박에도 사용키로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주식회사 I.C.E가 빌렸던 것이며, 나 개인이 부담할 액수는 각 집세의 약 20%에 지나지않는다”며 어처구니 없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또 초호화급 호텔 오타니의 숙박요금에 관해서도 “직장 이전을 위한 전거 비용으로서 전액 주식회사 I.C.E.가 부담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실제 자기 소유회사의 돈으로 지불한 것이기에 누가 보기에도 이혼소송이 진행되자 ‘위자료 및 양육비 일시불이라는 거액(?)의 창끝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만큼 조희준 씨는 이혼소송 진행과정에서 철저히 ‘짠돌이(?)’ 행세를 했다.

더욱이 가정부 고용문제는 어찌 보면 처가 쪽에서 결혼할 때부터 강력하게 요청해 왔던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조희준 씨는 신혼 초부터 “ 유리꼬가 대학을 갓 졸업해 결혼한 탓인지 가사(家事)가 서툴렀고 식사 또한 늦잠을 자기 때문에 만들어 주지 않고 저녁도 회사에 전화를 걸어와 ‘외식으로 때워요’ 하는 일이 많았다”고 불평조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둘 사이의) 첫딸이 태어난 후 유리꼬 씨는 ‘육아와 가사가 큰일이며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나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와 유리꼬는 나의 가족(조목사 부부) 등과 해외여행에 나가는 일이 오히려 많았고, 그 사이 아이는 한국의 베이비 시터에게 맡겼었다”며 “아이 하나를 키우며 가사를 하는 것은 보통 모친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로 법정에 호소했다.(94년 3월 10일자 진술서) 이어 “그러나 유리꼬가 너무 시끄러울 정도로 나에게 호소하고 유리꼬의 부친도 딸에 동조해 나에게 강하게 요청함에 따라 지난 92년 12월 두 번째 딸의 출생을 유리꼬를 위해 가정부를 고용키로 했다”고 진술했다.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50대 가정부가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는 데 결정적 일조를 하기에 이른다.

“한국의 부실 금융기관 적대적 M&A하려 했다”

본보는 지난 호에 냉혹한 국제 펀드 매니져들의 이면적 계약에 놀아난 ‘삼성가 황태자 이재용 상무와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장남인 조희준 씨의 20대 시절을 재조명한 바 있다. 본보 취재팀은 조희준, 마쯔오카 씨가 공동으로 설립한 ‘FIC(Future Investment Company)’가 해외 ‘헷지펀드’를 동원, 이면적 계약을 통해 엄청난 자금을 해외로 도피시킨 것으로 보고 이를 철저히 추적 중에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러한 해외 ‘헷지펀드’를 통해 천문학적 금액의 파생이익을 창출한 마쯔오카 씨의 지능적 계략에 대해 동업자였던 조희준 씨는 철저히 농락당한 채 이 같은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으로만 추정되고 있다.

‘PHT 신탁’ 마쯔오카 전 회장은 과거 화려했던 ‘아시아 증권가의 풍운아’로서 재기를 꿈꾸며 비슷한 꿈을 꿈꾸던 조희준 씨와 투자사인 ‘FIC’를 공동 설립한 후 95년부터 96년 말까지 승승장구를 거두자 유명 연예인들과 어울리며 호화 사치생활을 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조희준 씨를 통해 고객이던 이재용 상무 등과 교분을 쌓았고, 이재용, 조희준 씨 등이 소위 말하는 ‘증권 초짜’ 들임을 재빨리 간파, 이들의 자금을 이용해 이면적으로 파생상품 등 즉 Option 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음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마쯔오카 씨는 당시 한국의 S증권사의 일본 현지법인과도 부도덕한 이면계약을 했음이 드러났다. 본보는 이러한 이면적 계약을 내용으로 한 ‘계약서’를 전격 입수, 일부 공개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정황 및 사태파악이 되는대로 이를 정리해 기사화할 예정임을 밝혀둔다.

본보는 삼성의 이재용 상무, 전 국민일보 회장 조희준 씨, PHT 신탁의 마쯔오카 히데오(한국명 박준홍) 전 회장 등이 연루된 대형 금융 커넥션이 비단 일본 증권시장 뿐만 아니라 본국에 있던 일부 종금사 등 부실 금융기관을 적대적 합병인수(M&A)하려 했다는 정황까지 포착했다.

이에 본보는 치밀한 계획아래 추진되었던 ‘한국의 부실 종금사 합병계획’에 대해 집중적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마쯔오카 씨는 지난 20여년 간 증권업을 비롯 각종 제조업 등을 경영하면서 자본시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증권시장’의 생리를 그 누구보다 잘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얄팍한(?) 재능을 십분 활용, 한국의 금융계에까지 진출하려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비밀계획’ 과정에서 삼성 이재용 상무 등 유명인들의 자금을 동업자였던 조희준 씨를 통해 조달, 자신이 운영했던 펀드에 편입시킴으로써 비밀자금들의 실소유주와 소유권이 누구인지를 철저히 은폐시키는 지능적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마쯔오카 씨는 조희준 씨와 함께 한국의 부실 종금사를 비롯 ‘이들 부실 금융기관들이 퇴출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 이를 역이용해 지난 96년 경부터 적대적 합병인수(M&A)하려는 계획까지 완벽히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바로 이 과정에 조희준 씨가 본인의 자금은 물론 본보가 의혹을 계속 제기하고 있는 유명 정치인들의 자금들을 불법으로 동원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금융 기관들인 시중은행 및 부실 종금사 등의 적대적 합병인수(M&A)에 있어 정부와 정치권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 막강한 로비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이를 놓고 한차례 파문이 예상된다.

조희준 씨와 마쯔오카 씨의 일부 측근들은 지난 96년 일본 증권가를 주름잡던 이들 두 사람이 이때부터 여야를 막론한 유력 정치인들을 자체 조사, 선정하는 등 이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넨 것으로 전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한국의 금융계로까지 진출하려던 조희준, 마쯔오카 씨의 ‘부실 종금사 합병게획’에 있어 한국의 S증권사와의 결탁설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어 본보는 이에 초점을 맞춰 다음 호에 이를 전격 공개할 예정이다.

“아내가 不貞했다”
한바탕 소동

지난 92년 처가 측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조희준 씨가 한국에서 데려온 50대 여성을 가정부로 고용하게 된다. 결국 재판과정에서 문제의 ‘가정부’는 경기도 안산시 반월동에 거주했던 여 모 씨로 조희준 씨의 아버지인 조용기 목사가 ‘감시역’으로 보냈던 것으로 밝혀져 망신살이 뻗친다.

가정부 고용 등 우여곡절 끝에 조희준 씨는 지난 92년12월 24일 둘째 딸 보영의 출생을 보게 되었다. 앞에 열거한 진술서에서 조희준 씨는 한국에서 데려온 가정부가 있어 “유리꼬도 편해졌는데 결과적으로 유리꼬가 빈번하게 놀러 나가는 시간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으며, 이는 실제로 그 같은 불상사(?)로 이어졌다.

지난 93년 9월경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조희준 씨에게 문제의 가정부는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다”며 감시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조희준 씨의 증언을 다시 살펴보자. “유리꼬가 나의 출장 중 거의 매일 아이들은 팽개치고 외출해서는 새벽 3시 경까지 놀다가 귀가하는데, 비틀비틀 혼자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만취한 상태로 들어와 대낮까지 늦잠을 잤다고 한다.

아이 시중은 전혀 하지않았으며 이내 일어나서는 또 외출하고 새벽에 돌아오는 일만 되풀이했다고 한다”라고 가정부의 ‘고자질’을 인용하게 된다. 이어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가정부에게 부인 유리꼬가 아직 젊어 학생티를 벗지 못했다”며 “내가 해외출장으로 부재하는 일이 많아 유리꼬가 외로운 점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관용으로 봐주면 된다라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가정부는 유리꼬가 단순히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놀고 있는 것만으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꼬가 아이를 팽개치고서 딴 남자와 바람 피우고 있으니까 말을 전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진술한 것이다.[재판문서 1]

조 씨는 증언을 이어 갔다. “그래도 내가 믿지 않으려 하니까 가정부는 부인이 딴 남자와 가라오케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중 한 장에는 딴 남자와 유리꼬 가 차 안에서 키스하려고 하는 사진이었다”고 진술했다. “가정부는 또한 유리꼬가 매일 딴 남자와 2, 3시간이나 전화로 얘기한다”고 “너무나 현실감이 있는 얘기를 전했다”고 조 씨는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아내에게 따졌더니 “사진의 남자는 함께 찍혀있는 친구 사또 유리의 친척으로 사또 집에 놀러 갔다가 알게 되어 세번쯤 만난 일은 있지만 신체적 접촉은 없었다고 변명했었다.

나는 유리꼬가 자신의 과오를 일단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이 남자와 신체관계는 없었다고 말함에 따라 그 일에 대해서는 깨끗이 용서해주기로 했다” [상동] 허나 문제는 증언대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훗날 동행했던 사또 유리에게 확인했더니 문제의 남성은 유명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만나게 되어 사귀게 되었음을 눈치챘고, 또 사진을 갖고 사방팔방을 수소문한 결과 문제의 남성이 하라주꾸에 있는 뷰틱 점원임을 확인하는 등 뒷조사를 했던 것이다.

조희준 씨는 진술과정에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문제의 남성인 요시자와를 만나 이를 확인한 결과 부인인 유리꼬 씨가 ‘독신’이라고 속였다는 점을 알아냈다.

또한 ‘동창회에 간다며 나의 회사차를 타고 요시자와와 하꼬네로 놀러 갔다가 차 사고를 일으켜 상대방이 회사에 손해배상을 요구해온 적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계속된 진술에서 “문제의 남성인 요시자와 씨가 부인인 유리꼬 씨와 키스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했고, 부인 친구 사또 등과 함께 7회쯤 만났으며, 단 둘이 20회 이상 데이트하며 매일처럼 전화를 주고 받은 것, 심지어 자신이 감기가 들었을 때에는 치료약을 사들고 와가지고 집까지 왔던 일들을 소상히 얘기했다”고 진술하기에 이른다.

이혼소송 과정에 나타난 법정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의심으로 가득 찬 조희준 씨는 더 치밀한 뒷조사를 하게 된다.
조희준 씨는 부인의 전화요금 지불명세서를 입수해 처가가 있던 고오베 지역에 자주 전화를 걸었던 상대가 의심이 가 알아보니 “부인이 학생시절 교제했던 남자로 이름이 가미마에 가즈오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나를 속이고 나 이외의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어린 두 딸을 생각해서 유리꼬가 개심(改心)한다고 맹세하면 모두 용서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고 생각해 해결방법을 놓고 아버지 조용기 목사와 심각하게 의논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쌍방 부모끼리 93년 9월말경 협의한 결과 “유리꼬는 모친으로서의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데다가 인간적으로도 미숙하니” 쌍방이 함께 잘 아는 오쿠보 미도리 여사에게 “당분간 맡겨 오쿠보 씨의 지도아래 충분한 수업(修業)을 마친 뒤 도쿄에 거주했던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데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조용기 목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전화번호 일체를 바꾸고 ‘이사를 하라’는 조언도 받아들여 새로운 맨션을 찾아 이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리꼬 씨는 양가가 합의한 ‘신부(?)수업’을 마다한 채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기에 이른다. 몇 번이나 타이르고 달랬지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으니 이혼해 달라”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친정아버지도 그렇게 요구함에 따라 끝내 헤어지기로 했다는 게 조희준 씨의 진술이다. 유리꼬 씨가 친정으로 간 날짜는 지난 93년 10월 17일이다.

결국 조희준 씨도 이혼을 ‘결심’하고 “며칠 후 오쿠보 씨를 도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기에 오쿠보 씨에게 유리꼬의 서명 날인한 이혼계를 갖고 오도록 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유리꼬 씨는 “법률적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해 변호사에 의뢰, 조희준 씨에게 위자료 등 금전적 요구를 해옴에 따라 양측 변호사가 타협했는데 “1억엔(10억원)을 현찰로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다며 도저히 타협점을 찾을 수 없어 조정(調停)에 회부되기에 이른다.

결국 따지고 보면 수십 억엔을 ‘증권투자’로 날린 조희준 씨가 1억 엔을 아끼기 위해 가정재판소에 조정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에서 ‘조용기 목사 일가’의 치부만 드러내는 꼴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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