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마스크」‘파라오 저주’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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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집트의 ‘왕가의 골짜기’에 뜨거운 흥분이 떠돌고 있었다. 세계제일의 이집트통인 영국의 카터박사가 드디어 투탕카멘왕의 묘소를 찾아낸 것이다. 인부들이 차례로 흙을 퍼내자 지표하 12단째의 계단아래 봉인된 문이 나타나, 뉴스는 당장 온세계로 퍼졌다.

투탕카멘왕(BC1370?~1352?)은 고대 이집트 제18대왕조의 제12세왕으로 10세때 선왕의 12세난 공주와 결혼해 이듬해 즉위했는데 18세때 머리가 이상해져 측근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측근들에게 유령이 매일처럼 나타나, 겁에 질린 측근들은 더 이상 왕의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답시고 미이라를 두터운 순금으로 감쌌던 것으로 전해져있었다.

열기와 흥분속에서 문의 봉인을 풀고 막혀있던 흙모래를 제거히지, 커다란 돌벽에 기분 나쁜 사신(死神) 아누비스상(像)이 새겨져있었다. 그 아래에는 “왕의 잠을 방해하는 자에게 불길한 죽음이 닥칠것이다”라는 저주의 글도 새겨진게 아닌가….

그러나 발굴은 계속되어 무려 3천5백점이 넘는 부장품이나 황금제품, 그리고 황금마스크를 쓴 투탕카멘왕의 미이라가 묘속에서 발견되었다. 그중에서도 황금의 왕좌와 석관내에 놓였던 3개의 인형관에는 특히 대량의 황금이 쓰여져 투탕카멘왕의 대표적 유물로 유명하다. 인형관 하나가 약 1.83m길이인데 두께가 3.5mm나 되는 순금으로 만들어져 인부 8명이 겨우 들수있었다 한다. 이들 귀중한 금은재화는 현재 이집트수도 카이로박물관내에 즐비하니 진열돼있다. 투탕카멘왕묘는 ‘세기의 대발견’으로 세계를 흥분시켰지만, 그와는 딴 판으로 사신 아누비스의 저주가 발동했음인지 왕의 미이라에 손을 댄 자나 묘소를 구경한 사람등이 차례로 이상한 죽음을 맞게되었다.

발굴 秘話 세기의 대발견후 22명괴사등 이변 속출
‘독점취재권’반발 각 언론의 복수설까지

속출하는 불길한 사건들

첫 희생자는 발굴자금을 대준 출자자 카나본남작이었다. 그는 왕묘입구에서 모기에 물려 패혈증으로 고열이 나 베드위에서 굴러다니며 “투탕카멘이…”라느니 “ 파라오의 저주가..”등 헛소리를 뱉었다. 1923년5월의 어느날 오전2시쯤 남작이 “ 끝장이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절규했을 때, 카이로전시가 암흑세계가 됐다. 정전은 5분만에 끝났지만 이미 남작은 절명했고 그후 정전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카나본경의 아들에 의하면 당시 영국의 저택에서도 묘한 일이 있었다고. 한밤중에 남작의 애견이 갑자기 멀리 바라보며 짖어대더니 집안사람이 모두 깨어 달래도 슬프게 짖어대다 기진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후에 투탕카멘왕의 미이라를 렌트겐으로 조사한 의사는 왕의 뺨에서 작은 상처를 발견했는데 불가사의하게도 카나본남작이 모기에 물린 곳과 동일한 개소였다고 한다.

그후도 불길한 사건이 차례로 일어났다. 묘실에서 투탕카멘왕의 마스크를 구경한 남아프리카의 젤 이라는 대실업가가 배갑판에서 나일강에 빠져 죽고, 미국부호 굴드도 묘소구경후 고열이 나 어처구니 없게 죽었다. 발굴에 관계했던 학자에게도 차례로 사신이 덥쳤다. 카터박사와 함께 발굴작업을 한 메이스교수는 작업중 쓰러져 급사했고 영국에서 투탕카멘왕 연구차 왔던 프루르교수도 며칠후 원인불명의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미이라의 렌트겐사진을 찍은 리드교수도 역시 원인불명 열병으로 죽고 와이트박사는 왕묘안에서의 조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순간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더니 며칠후” 파라오의 저주를 알게됐다. 이젠 살아날 수 없다”라는 기묘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버렸다.

또한 데이비드교수는 투탕카멘왕의 이름이 박힌 물주전자를 발견한 직후 역시 열병에 걸려 급사하고 카터박사의 조수였던 베셀은 45세 젊은 나이로 급사했으며 역시 조수의 메이스도 폐결핵에 걸려 뒤를 따라가듯 죽고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이집트정부도 당황해져 사건조사에 나섰다. 묘지를 조사중 독사를 발견했던 이집트문화청 고관 라이는 ‘독사’설을 주장했는데 그자신도 묘에서 나온후 고열이 나서 “ 파라오의 저주가… 투탕카멘의 저주가..”라고 헛소리하며 죽어간 것이다.

왜 관계자들만 당하나

그후도 계속해서 발굴이나 조사에 협력했던 학자와 조수들이 변사했다. 투탕카멘묘소 발견에서 약1년사이 묘에서 부장품을 반출했던 가드너교수등 발굴관계자만도 22명이 변사한 셈이었다. 괴사의 원인으로 거론된게 우선 독사설과 말라리아설인데, 분명 ‘왕가의 골짜기’에 독사 코브라가 있지만, 죽은 사람 몸에 코브라에 물린 자국은 없었다. 말라리아모기에게 물려 죽었다 라는 과거 사례란 하나도 없었다.

고대이집트인은 독약에 정통했으며 실제로도 피라밋이나 왕묘의 여기 저기서 독약용 단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 독이 3천년후의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간 조사에서는 투탕카멘 묘실내서 아무런 독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부이던 이집트인가운데서 한사람도 희생자가 안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다.

미생물곰팡이설도 나왔다. 묘속에서 생식했던 3천년이상전의 미생물에 저항력이 없는 유럽인이 감염돼버렸다는 것. 면역성이 없는 체내에 강력한 병원균이 침입하면 치료법도 없어 죽음을 기다리게된다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왕가의 골짜기’에 한발짝도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까지 원인불명의 죽음에 걸리다니 무슨 까닭이겠는가?…

예를 들어 카나본남작의 사후 그 집안에 차례차례 재난이 닥친 것이다. 먼저 남작의 처남이 발광해서 죽고, 다음으로 남작부인이 원인불명의 고열로 급사했다. 부인의 모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충에 찔려 죽고 카나본가의 간호부 로렐도 이상한 병에 걸려 죽었다.

나아가 카터박사의 비서 웨스트발리경은 고층빌딩옥상서 투신자살하였고 비서 아들도 심장마비를 일으켜 젊은 나이에 갔다.

게다가 비서와 그 아들의 관을 운반하던 자동차가 지나가는 청년을 치어 죽게만들었다. 저주는 더 계속되어 미국의 작가 신킹스가 1934년 투탕카멘왕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 투탕카멘의 망령이…. 왁! 나를 쫓아온다…”며 미친 듯 외쳐대 드라마는 중지되고 그자신도 그후 원인불명의 죽음을 맞았다.

파라오저주는 끝이 없나

이리하여 파라오의 저주희생자는 30명이상에 이르는데 더욱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다름아니라 투탕카멘왕의 묘소를 발굴한 당자인 카터박사만은 1939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무사히 생애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발굴관계자들중에서 왜 그만이 재난에 휩싸이지 않았단 말인가. 실은 카터박사에게도 일은 있었다고 한다.

투탕카멘묘소발견후 박사가 기르던 카나리아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박사는 자식처럼 귀여워해 언제나 새장을 들고다녔다는데 하필이면 그날은 잠간 돌담위에 새장을 놔둔 사이 독사에 먹히고 만것이라 한다. 박사는 깊이 슬퍼하며 입을 열면 “ 카나리아가 내 대신이 돼주었다.”고 술회했다.

헌데 카터박사에게도 더 비참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딸이자 아버지와 함께 ‘왕가의 골짜기’를 찾았던 이브린 와이트의 죽음이다.

왕묘발굴후 왜인지 이브린은 중증 노이로제에 걸려 차츰 방에만 틀어박히게 되었다. 입을 열면 “ 죽고싶다. 죽고싶다.”고 중얼거리며 야위어 갔다. 결국 이브린은 박사 사망후 얼마 안되어 “ 이젠 참을 수 없다”는 수수께끼 같은 유서를 남기고 목매어 자살하게 된다…..

그러나 파라오의 저주는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1966년 이집트정부의 고대문화국장 이브라함은 위로부터 발리에서의 투탕카멘왕의 유품전시회 개최계획을 타진받았다. 그는 처음에 맹반대했다. 투탕카멘왕 유품을 움직이거나 하면 꼭 무슨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람회얘기는 정식으로 채택돼 이브라함은 카이로에서 직원들과 최종마무리를 짓고 거리로 나선 순간, 달려온 차에 치어 붕 떠서 가로에 떨어지는 바람에 즉사하고 만것이다.

1972년 이번에는 투탕카멘왕의 황금마스크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일시 대여케되었다. 기획 책임자는 죽은 이브라함의 후임자인 메레츠박사가 됐는데 박사는 평소 자신은 52세가 되는 오늘날 까지 파라오의 묘연구에 종사했지만 지금도 원기왕성하다고 저주설을 일소하고 있었다. 출하시키는 당일 엄중히 포장된 황금마스크를 실으려 트럭이 와서 출하작업 일체를 박사는 무사히 마쳤다. 헌데 그날밤 박사는 갑자기 몸불편을 호소하더니 맥 없이 죽었다. 사인은 폐허탈이었다 한디.

매스컴의 날조설까지 등장

이들 일련의 사건은 그야말로 현대판 괴담으로서 너무나 유명했는데 실은 이같은 ‘파라오의 저주’란 단순한 미신이라는 설도 많았다. 한마디로 매스컴의 날조라는 셈이다.

고대이집트왕의 묘실이 즐비한 ‘왕가의 골짜기’에서 왕묘를 찾고 파기시작한지 6년된 시점에서 출자자인 카나본남작과 발굴자 카터박사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후원해온 남작은 뚜렷한 성과가 없자, “ 더 이상 파보았자 가망이 없으니 중지하자”고 말했던 것. 그러자 박사는 “ 1년만 더 해봅시다. 그러면 대개의 것은 거의 다 해보는 셈이 되니깐요” 라고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남작은 박사에겐 알리지도 않고 ‘런던 타임즈’로부터 자금원조를 받고 있었다. 왕묘가 발견되면, ‘독점발표권’을 준다는 조건부였다.

만약 왕묘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 끝났겠지만, 대박이 터지고 나니 모든 보도권리가 런던타임즈에 독점케 돼버렸고 세계의 매스컴들이 노발대발하였다.

이때부터 카터박사등 두사람은 세계중의 악인치급을 받게되고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던 차 카나본남작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급사하자 세계의 매스컴에 다시 없는 좋은 재료가 돼버렸다.

이렇게 해서 튀어나온게 ‘왕실’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파라오>에 <저주>설이 덧붙여져 금기를 깨고 파라오의 묘소를 파버렸기 때문에 파라오의 노여움을 산 것이란 그럴듯한 기사가 세계를 뒤덥다 시피 퍼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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