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우리땅 떠날때까지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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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라덴 투쟁강화 호언

아프간, 이라크를 중심한 이슬람과격파 테러활동이 갈수록 격렬해지며 그 파문 또한 위협적이다. 원래 테러, 테러리즘이란, 18세기말 프랑스대혁명때 자코빙당의 공포정치서 비롯된 것이나 20세기 후반들어 크게 나눠 3가지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첫째는, 두 번의 세계대전후 팽배해진 민족주의, 국가이즘을 탄 독립국 양산풍조에서 소외당한 민족주의과격파들의 테러. 터키의 쿠르드족, 아일랜드의 가톨릭과격파등이 대표적 사례다.

두 번째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대립에 의한 테러. 베트남반전운동이나 서독 적군, 특히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꼽게된다.

그리고 세 번째가 격렬하고 위험한, 종교에 뿌리를 둔 폭력을 들게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단체, 알카에다가 일으킨 21세기최초의 9.11테러는 전세게를 진감시켰던 것. 그 핵심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極烈 테러단 「알카에다」의 두 主役

“타워서 죽는 자의 수는 사전에 계산했다. (여객기가)격돌하는 것은 3개나 4개의 층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사건이 그날 일어날 것은 알고있었다…. 라디오를 켜자 곧 첫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에 돌입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잠시후 또 한 대가 격돌했다. 동지들은 크게 기뻐했지”–

새하얀 터반을 머리에 두룬 키 2m에 가까운 갈색의 야윈 남자가 흰벽의 살풍경한 방에 앉아 자랑스럽게 9.11테러의 “성공”을 지지자들에 설명하는 모습이 비디오테이프에 나타났다. 사우디아라비아 대부호의 아들로 희대의 국제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이다.

뉴욕 맨하탄섬에 서있던 세계무역센터에 2001년9월11일 오전8시46분 하이잭당한 여격기가 격돌하는 모습을 담은 이 비디오테이프는 사건후 3개월이 지난 동년12월13일 미국방부가 공개한 것으로 빈라덴이 9.11테러에 관여했음을 나타내는 ‘결정적 중거’가 됐었다.

빈라덴은 1957년 사우디수도 리야드에서 이나라최대의 건설회사 총수집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50여자녀중 17반째 아들이며 생모는 시리아여성. 소년때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고.

79년말경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하자 대학을 갓졸업한 그는 의용군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20대전반이던 그로하여금 과격한 종교사상에 흠뻑 빠지게 만든 두사람을 만난다.

한사람은 팔레스타인인의 압둘라 앗자므. 사우디의 지다에서 국왕대학을 나왔으며 역시 아프간지원변으로 간 그는 빈라덴의 학생시절부터의 은사라는 설도 있다. 이집트의 ‘무슬림동포단’에도 가입한 앗자므는 반이스라엘투쟁과 마찬가지로 아프간에 침공한 소련과의 싸움도 “이교도.불신앙자의 침략으로부터 이슬람교도의 땅을 지키기위한 성전”이라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성전에 참가하는 것은 “교도 한사람한사람의 의무”라는 동포단특유의 이론도 불어넣은 것이다. 또 한사람은 이집트의 과격조직 ‘지하드단’의 지도자 아이만 자와히리.

빈라덴은 1988년 아프간에서 의용병의 조직 ‘알카에다(基地)’를 설립한다.
여기에 가담한 이집트등의 과격파는 소련군과의 전쟁을 자기나라(이집트)의 체제타도를 향한 “군사훈련”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앗자므는 ‘아프간해방’이라는 본래의 취지와 다른 속셈을 가진 자와히리등에 가까이 가지말라고 빈라덴에게 충고하다 89년11월 베사와르에서 누군가에게 폭살당하고 말았다.

빈라덴을 반미테러로 몰아간 결정적동기는 1990년8월 이라크군에 의한 쿠웨이트침공으로 야기된 걸프만전쟁때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한데 크게 반발했다. 91년2월말 전쟁이 끝났어도 국왕이 미군주둔을 계속 허용하며 반대파를 탄합해 빈라덴은 쫓기듯 동년4월 수단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는 수단서 돈을 벌자 자기돈으로 반미성전을 할 결의를 굳혔다는 것이다.
알카에다에 의한 최초의 테러는 92년12월 UN평화유지활동을 위해 소말리아로 가는 미군들이 숙박한 예멘호텔폭파사건이다. 관여를 의심받은 빈라덴은 94년2월 가문에서 축출당하고 이어 사우디국적도 박탈되었다. 수단정부는 미국의 압력으로 96년5월 그를 추방했지만 빈라덴은 아프간으로 가서 활동을 계속했다.

알카에다의 4가지 특징

미연방수사국(FBI)의 분석관을 지낸 중동정책워싱턴연구소의 마슈 레비트 선임연구원은 알카에다형의 국제적인 이슬람과격파에 관하여 종래의 테러리스트와는 확연하게 다른 특징을 몇가지 열거하기도 했다. 그 첫째는, “특정문제의 해결을 겨냥하지않는 협상불가능한 상대”라는 점이라 한다. 알카에다에게는 유럽문명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있지 타협점은 없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 특징은 사람목숨을 뺏는데 대한 자제심이 없다는 것. 9.11테러말고도 알카에다의 관여가 의심되는 사건에서는 사상자수가 이상하리만큼 많은게 주목된다. 전에는 민족주의나 극좌의 과격파가 테러를 특정문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테러리스트는 많은 사람이 보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싶었기 때문은 아니라는게 정설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해당되지 않는다. 알카에다는 될 수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싶어 하는것이다”라고 레비드연구원은 논하였다.

세 번째는 자금력이 풍부해 종래의 테러리스트 처럼 지원국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세계도처에서 테러활동을 계속할수 있다. UN이 2002년8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빈라덴과 알카에다가 보유하는 유가증권의 총액은 각국의 자산동결조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화로 400억원에 달하고 있다. 이밖에 부유한 지원자부터의 개인헌금도 연간 200억에 달한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세포’라 불리우는 하부조직이 유럽, 중동, 아시아등 수십국으로 퍼져있다. 그 활동자는 모스크(회교사원)나 자선단체란 이름아래 소수가 일하고있기에 좀처럼 노출되지 않는다. 이처럼 흉포, 협상불능, 신출귀몰, 게다가 유복하다는 어쩌지못할 과격집단의 대두를 가능케한 것이 막대한 자금력과 카리스마성을 함께 지닌 빈라덴의 출현이었다.

알카에다가 관여한 의혹이 짙은 중요한 테러사건은 92년 예멘 아덴의 미군숙소폭파사건이래 작년11월 터키 이스탄블의 영국계은행 및 영국영사관을 표적삼은 연쇄자폭테러사건에 이르기까지 25건에 달하고 있다.

일련의 사태를 정밀분석한 일본의 빈라덴연구가 호사카 슈지(와세다대 이슬람과학연구소 객원조교수)씨는 “ 빈라덴의 사상 혹은 전술에는 9.11테러의 얼마전부터 커다란 전환이 있었다. 세계를 이슬람교도와 ‘십자군’으로 양분해 문명간의 전쟁, 종교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빈라덴이 요 몇 년사이 미군의 사우디계속주둔에 대한 반발에서, 반미로의 증오로 결정화시켜 제어불능지경에까지 행동을 과격화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접경지역에 숨어버린 빈라덴 수색작업이 파키스탄군지원아래 미특수부대에 의해 철저하고 치밀하게 진행중이라고 하지만 언제 결말이 날지… 매우 궁금하다.

‘가까운 적’보다 ‘먼 적’을 치라

=아이만 자와히리 빈라덴師父役=

인구1천만의 대도시 카이로는 나일강에 연한 이집트의 수도이자 피라밑등 찬란한 고대유적을 자랑하는 세계유수의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그러한 도시의 요소마다 아직도 총을 든 군인이 24시간 경계하고 있다. 1981년10월6일 당시의 사다트대통령이 군사퍼레이드중 수류탄과 총격으로 암살당해 비상사태가 선포된지 20년이 넘도록 해제되지않고 있는 것이다.

암살범인 포병여단의 이스란프리 중위등 4명은 이슬람과격파 ‘지하드단’멤버였다. 실행범등 5명은 이듬해4월 처형되고 동년말부터 302명이 국가전복죄혐의로 제2의 재판이 열렸는데 그 피고들가운데 아이만 자와히리가 있었다.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빈라덴과 손을 잡고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최고이론가이며 외과의사이기도 한 자와히리를 두고 미CNN TV의 태러문제전문가 피터 바겐씨는 “ 빈라덴을 한층 첨예화, 반미화, 폭력화시킨 인물”이라고 규정지은 바 있다.

초엘리트가문 출신

자와히리는 빈라덴 같은 재력도 카리스마성도 없지만, 6세아래의 최고지도자 보다 훨씬 오래 지하활동을 계속해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1시간 걸려 겨우 아는 것을 5분에 이해했다. 천재였다.”라고 어릴적 친구가 감탄하리만큼 두뇌가 명석하다.

그의 가문은 이집트의 학계나 종교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약학대교수. 큰아버지는 최고봉 아즈하르대 총장. 외조부가 외교관을 지낸후 카이로대학장. 아랍연맹 초대사무총장을 지낸 친척도 있다. 1951년6월19일생. 문학애호가의 모친을 닮아 소년시절 시작을 즐겨했다고. 그런 그가 고교생이던 15세때 정부전복을 위한 ‘세포’를 만들기도. 카이로의대를 74년 졸업후 3년간 외과의로서 군복무. 78년 결혼하고 개업을 하고서도 지하활동을 계속했다.

사다트암살사건에 연루, 체포됐으나 직접관여가 입증못돼 총의 불법소지죄로 3년복역후 나왔다. 1년후인 85년 그는 페샤와르로 갔다. 아프간’성전’에 모여드는 지원병들을 훈련, 재조직하려한 것. 거기서 군인을 포함한 비밀결사조직의 ‘지하드團’최고지도자가 되고 빈라덴과 만나게되었다.

사우디출신의 대부호아들에게 자와히리는 적극적으로 접근, 곧 친밀해졌다. 빈라덴은 아프간서 활동중 저혈압으로 가끔 드러누웠는데 그 주치의노릇도 했다. 자신의 투쟁경험과 지식을 빈라덴에게 주입하고 그 돈을 흡수하면 야망을 달성할수 있다_. “자와히리는 이슬람운동의 미래가 ‘이 하늘로부터 보내진 사나이’에게 걸려있다고 간파했음에 틀림 없다”고 자와히리의 반생을 면밀하게 취재한 기사(빈라덴의 배후에 있는 사나이)의 필자 미국의로렌스 라이트씨는 쓴 바 있다.

자와히리의 영향력은 알카에다의 조직형태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미국의 테러대책당국은 9.11테러후의 수사에서 ‘2개의 알카에다’가 존재하고있음을 알게됐다고 지난해 US뉴스앤드 월드리포트가 보도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알카에다’로서 빈라덴에 감화되지만 직접부하는 아닌 과격파의 광범위한 네트워크이다. 그러나 또하나의 조직으로 ‘조직의 알카에다’가 있다. 이것은 고정되고 통제가 잘된 마피아 처럼 결속이 강한 중핵조직으로서 빈라덴앞에서 바이아(충성 맹서)를 한 약180명정도의 정예분자로 구성돼있다. 미중앙정보국(CIA)이 생각했던 것 보다 피라밑형 구조가 두드러져 그 정점에 선 빈라덴이 절대적권한을 쥐고있다는 거이다. 실은 알카에다의 이중구조는 세포조직을 중핵으로 삼고 그 바깥쪽에 멤버쉽이 애매한, 커다란 지지자층을 안고있는 비밀결사 지하드단을 모델로 삼은 셈이다.

국내투쟁에서는 발을 빼다

다만, 빈라덴과 자와히리의 과격사상에는 당초,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빈라덴은 조국 사우디의 왕제보다는 이슬람교도의 땅을 공격한 소련, 이스라엘과 미국을 미워하고 이에 대한 반격을 도전해왔다. 한편 자외히리는 소년시절부터 자기나라 이집트의 정권전복을 목표로 삼아왔다. 사다트암살사건후 처형된 지하드단의 이론지도자 무하마드 파라그도, 이스라엘이나 유럽미국의 침략적인 이교도를 ‘먼 적’, 이슬람세계의 배교적인 지도자를 ‘가까운 적’으로 도전하는 성전(聖戰)을 우선시켜야 한다고 주창해 왔다.

1989년 아프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후 이집트에 돌아온 보다 과격한 학생중심의 ‘이슬람집단’은 92년부터 무바라크정권을 몰아세우려고 관광지에서 외국인을 상대한 테러사건을 몇번 일으켰다. ‘가까운 적’을 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지하드단은 94년이후 이집트국내선 테러를 하지않았다. 이는 최고지도자 자와히리가 미국을 최대의 표적으로 삼는다는 빈라덴의 ‘먼 적’공격전략에 접근한 결과로 풀이된다.

자외히리는 아프간에서 이집트엔 귀국않고 보스니아등 이슬람교도의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동시에 92년에 수단, 96년 다시 아프간으로 빈라덴과 행동을 함께 했다. 그리고 98년2월 알카에다산하의 ‘유태인과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위한 세계이슬람전선’에 가입한다.

이로써 빈라덴의 재력, 자와히리의 조직력, 무력이 정식으로 합체해 무서운 국제테러조직이 생겨났다. 사망자200명이상이라던 동년8월의 케냐, 탄자니아 미대사관연속폭파사건은 지하드단이 주도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긴 하나 그토록 고국정권타도에 집념을 태우던 그가 왜 노선을 전환했는가.

“빈라덴과 합류하는 것이 지하드단이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자외히리의 한 측근이 털어놓았었다. 이집트의 과격파는 90년대의 무차별테러로 국민의 맹렬한 반발 반감에 봉착하였다. 정권측의 단속도 강화돼 활동자금도 고갈되었다고. 곤경에 몰렸던 ‘이슬람집단’은 무장투쟁중지를 선언해 남은 주요과격집단으론 지하드단이 유일하다.

헌데 ‘세계이슬람전선’에 가입한후 지하드단은 구미각국서도 철저한 마크를 받게됐다. 자와히리는 조직내서 노선전환의 책임을 추궁당해 최고지도자자리서 물러났다. 사생활에도 불행이 겹쳐 청년시절의 조강지처와 6인자녀중 아들과 딸 하나씩이 2001년 미군의 아프간공습때 모두 죽었다. “ 유서”라고 할만한 100폐이지의 회상기에다 “이젠 집필할수없을지도 모른다”고 비관을 하기도. 근래의 아랍지 정보에 의하면 자외히리는 그후 미군폭격으로 사망한 측근의 미망인등 2명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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