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2주 앞두고 조직위원장 자살 금전적 압박·책임문제 고민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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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싱턴 DC 거주 언론인 채영창 위원장 자살 파문

진상 추적「세계 한민족 포럼」행태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세계 한민족 포럼이 한 유능한
동포언론인을 자살로 몰았다”

국제적 ‘삥땅사건’으로 말썽을 피웠던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가 한 유능한 동포 언론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동포사회에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세계 한민족 포럼’ 제5차 대회(9월26-29일 워싱턴DC)를 준비해 오던 채 영창(63) 조직 위원장이 대회를 불과 2주 앞두고 지난 9월 14일 매릴랜드주 콜럼비아 자택에서 돌연 자살해 워싱턴DC 동포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가족과 친지들은 채 위원장이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를 준비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대회를 준비했으나 점점 (주최측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감이 커져만 가 고민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 친지들은 “채 위원장이 ‘세계 한민족 포럼’대회를 주최하는 국제한민족 재단(상임의장 이창주)측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채씨는 대회가 임박하자 금전적인 압박과 책임문제로 크게 고민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한 채 위원장은 워싱턴 DC지역에서 이름난 언론인으로, 또한 이민사 연구가로 존경과 신뢰를 받아온 인사였다. 특히 그는 워싱턴 지역 한인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금년 말에 ‘워싱턴 한인 이민사’ 출판을 예정하고 있었다. 워싱턴지역 동포사회는 “‘세계 한민족 포럼’이 워싱턴사회의 아까운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며 분노감을 표명하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독일·일본 등지서 부도수표 남발 물의 야기시킨 장본인
국제 한민족 재단 상임의장 「이창주」씨 사기행각에 고민
LA서 위싱턴 DC로 사무실 옮긴후 또다시 대회로 피해자 속출

‘이창주씨와 한통속 세간소문에 수치감’
평소 강직한 채영창씨 소문 감수못 한듯
대회 경비조달에 따른 중압감·우울증 겹쳐


문제의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는 지난 3월까지 LA에 본부를 두었던 국제 한민족재단의 상임 의장인 이창주씨가 주도한 대회이다.

이씨는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2차), 미국(3차), 독일(4차) 등지에서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를 주최하면서 현지 한인 학자들을 대회임원으로 선임하면서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겼으며, 또한 대회와 관련 현지 업체와 업소들을 상대로 부도수표를 남발해 “국제 사기꾼”으로 알려져 왔다.

이 같은 사실이 지난해 본보를 통해 집중 보도 된 후, 이씨는 지난 4월1일자로 재단본부를 LA에서 워싱턴DC로 옮겼다. 이 국제 한민족 재단은 포럼 대회를 마친 다음 지금까지 한번도 결산보고를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다. 이 재단은 외부지원이나 후원자들로부터 걷어 들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된 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이씨는 워싱턴DC지역에서 9월에 제5차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를 주최한다며 지난 7월 LA지역 언론사를 방문하며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본보(7월25일자)는 동포사회에 주의를 환기시킨바 있다.
그러나 한국일보와 일부 언론들은 이 대회를 계속 후원한다고 밝혔다. 이창주씨의 사기행각은 제2차 대회인 2001년 5월 23-24일 일본 히로시마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대회전 이창주씨는 히로시마 대학의 최길성 교수를 대회공동의장으로 선정했다. 최 교수는 대회준비를 위해 재일동포사회로부터 모금을 하여 한화 1,500만원 정도를 이창주씨에게 전달했다.

대회 행사를 위해 쓰라고 준 돈이었다. 그러나 이창주씨는 그 돈을 행사에 쓰지 않고 사라졌다. 또 이씨는 호텔에 계약금도 내지 않아 호텔측이 “국제사기”로 고발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최 교수가 이를 부담하기도 했다.

당시 최 교수는 호텔의 고소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한국민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한민족이란 이름에 누를 끼칠 수가 없어 이창주씨 대신 한화 430만원을 지불하여 무마 시켰다고 한다. 한편 이씨는 그 해 10월 17일 한국학연구소설립이라는 목적으로 히로시마 대학에 나타났다. 이씨를 믿지 못하는 최 교수는 프린스 호텔에 이씨와 직접 문서로 계약할 것을 주문했다. 이씨는 한화 약 2,000만원 중 2002년 2월말로 1차로 지불하겠다는 어음 9,900 달러를 호텔에 지불했다. 그러나 그 어음은 만기일에 맞추어 추심한 결과 부도였다.

2002년 5월 20일-22일에 LA 코리아타운 래디슨 호텔에서 제3차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가 열렸다. 일본의 최 교수는 이 대회에서도 이창주씨로부터 5,000 달러 수표를 받았으나 역시 부도였다. 최길성 교수가 피해 당한 액수는 한화 2,000만원 정도였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하자 일본의 히로시마 대학의 한인 교수들과 학생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한국 정부 관련 부처와 관계자들에게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창주씨는 LA에서 제3차 ‘세계 한민족 포럼’을 개최하면서 대회명목으로 여러 인사들에게 감투를 주고 거액의 기금을 받았으면서도 하와이에서 온 조선족출신 연예인 Y씨에게 사례비로 줄 1,000 여 달러도 부도를 내는 등 가난한 동포에게까지 사기를 쳤다.

이러한 이씨는 제4차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를 2003년 4월 8일부터 11일까지 독일 베르린 홈볼트 대학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일본대회의 피해자 들은 한국과 독일 등 관계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독일 현지의 한인 학자들과 한인회 등은 이 같은 충고에 대해 “설마 교수 박사라는 분이 사기를 치겠느냐”라며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회가 마치자 그들에게 악몽이 닥쳐왔다. 대회를 책임진 이씨가 독일의 호텔비를 비롯해 한인식당의 식사비와 심지어 가난한 유학생들까지 사기를 치고 해명도 없이 미국으로 사라져버렸다. 급기야 베르린 한인회(회장 채수응)까지 진상조사에 나섰다. 주독 한국대사관(당시 황원탁 대사)도 LA총영사관의 협력과 조사를 의뢰했고 본국 정부에도 보고했다.
피해내역은 대회장 홈볼트대학 임대료(5,000유로달러), 크라운 플라자 호텔비(8,000유로달러), 김스여행사 용역비(4,900유로달러), 김치식당 식비(1,500유로달러), 유학생2명 피해(3,070유로달러) 등이었다. 이외에도 연예인들이 피해를 당했다. 특히 현지 대학의 K모 박사는 이씨가 대회 임원으로 선임하고 강연까지 하도록 하는 바람에 졸지에 회의장 임대책임을 맡았는데 이씨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 워싱턴DC에서 ‘세계 한민족 포럼’ 5차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채영창 위원장도 K 박사의 “죽고 싶은 심정”과 비슷한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아마도 채 위원장은 K 박사 보다 더 많은 책임을 졌기에 더욱 부담감이 컸을 것으로 보여진다. 채씨는 대회 전체를 준비하는 조직위원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독일 대회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정부 관련 부처들과 큰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았으나 말썽이 일어나면서 스폰서를 구하기가 힘들게 됐다. 가족 측은 “대회 준비를 하면서 여기저기서 이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 들을 듣게 됐고 주위에서 ‘위원장을 맡지 말라’는 권유도 받게 되면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스폰서가 많이 없는 상황에서 채 위원장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스폰서를 구했으나 주최측이 이에 부응하는 조치를 하지 않아 대회를 앞두고 채 위원장은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일할 수 있을까’라며 책임을 혼자 도맡아 쓰게 된 것에 심한 중압감을 받아왔다는 것이 가족과 주위 친지들의 이야기이다.

채 위원장은 대회준비 비용 염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한국에 나가 친척들로부터 수만 달러를 얻어 대회준비에 보탰으나 계속 재정문제에 압박을 받아 왔다고 한다.

평소 강직하고 꼿꼿한 성격의 채 위원장은 대회 경비조달 문제로 압박감을 받고 한편으로 ‘세계 한민족 포럼’ 대회를 주도하는 이창주씨의 비행이 여러 곳으로부터 전해오면서 자신도 ‘한통속’이라는 수치감도 들었을 것이라는 추리를 주위 사람들은 전하고 있다.

워싱턴DC에서 이민 100 주년기념 사업회에 관계했던 한 인사는 “채 위원장이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포럼대회를 준비했으나 자신이 알지 못했던 포럼대회의 과거 행적들이 알려지면서 자신이 관련을 맺은 것에 스스로 부끄러워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인사는 “선비타입의 채 위원장이 자살로까지 이르게 된 것은 포럼대회 이미지와도 관련이 있다”면서 “결국 포럼대회가 유능한 인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분노감을 표시했다.

한편 일부에서 채 위원장의 자살을 ‘우울증’의 결과로 풀이하고 있다. 워싱턴DC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국일보는 “평소 숙환과 관련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보도했다. 또 한 친지는 “고인이 자신의 우울증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하다가 폭발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한 친지는 그 ‘폭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 하지 못했다.

유명을 달리한 채영창 위원장의 장례는 지난달 16일 실버 스프링의 워싱턴 지구촌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엄수됐으며 유해는 17일 노벡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됐다.

채영창 위원장은 누구인가

위싱턴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
미주한인 이민사 대표 집필자


워싱턴DC지역에서 채영창 워원장은 언론인인 동시에 “이민사 전문가”로 잘 알려져 왔다. 워싱턴지역 뿐만 아니라 LA나 뉴욕 등지의 이민사 관련 인사들에게는 그의 이름이 생소하지 않다.

채 위원장은 1941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거쳐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마쳤다. 그는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82년에 도미, 워싱턴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맡아 미주한인 언론창달에 힘썼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포들의 미국정착 안내에 노력했으며 미주한인 이민사에 관심을 두고 취재와 집필활동에 의욕적으로 투신했다. 지난 2002년 12월에 간행된 ‘미주한인이민100년 사’에서도 채영창 위원장은 워싱턴지역 이민사를 대표 집필했다.

채 위원장은 1993년부터 ‘워싱턴 한인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워싱턴지역 초기이민사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인사회의 이민역사를 최초로 펴내 미주이민사 체계정리에 이정표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2002년 평소 운영하던 세탁업에서 은퇴한 후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워싱턴 기념 사업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출판담당을 맡아 이민사 정리에 몰두해 왔다. 그는 이민사연구가인 방선주 교수와 함께 초기 이민사 발굴에 심혈을 기울여 이승만 박사의 구미 위원부 사옥 발굴, 초기 이민 최초 미대학 졸업생 변수의 묘비발견과 재단장 등 여러 작업에 기여 했다.

또 그는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워싱턴-볼티모어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최근에는 워싱턴 지역 한인사 편찬위원장을 맡아 오는 연말에 ‘한인사’ 출판을 예정해 왔다. 그의 저서로는 ‘미국 속의 한국인’이 있으며 ‘교양 미국사’(번역서) 등 수 편의 저서를 남겼다. 주위 친지들은 “고인은 강직하고 꼿꼿한 성격의 선비였다”면서 “자신이 맡은 일은 120%를 이룩하는 철저한 분”이라고 기억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채근희씨와 장녀 시원, 차녀 시내, 장남 대우씨등 3남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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