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미국유학갈때 비행기표 3천달러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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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오리 양의 청소년기 시절의 모습.
ⓒ2005 Sundayjournalusa

본보가 극비리에 추진한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양의 생모인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가 국내외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월간조선 3월 호를 통해 최초 공개된 ‘본보 발행인(연 훈)과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 기사’는 “김영삼 씨가 前 안기부 김기섭 기조실장을 통해 이들 모녀에게 대통령 재직 및 퇴임시절을 합해 지난 93년부터 수 차례에 걸쳐 총 23억원의 거금을 건넸다”라는 이경선 씨의 충격폭로 내용으로 인해 ‘舊 안기부 비자금의 실체’에 대한 진위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한국의 한겨레 신문은 지난 2월 28일 자 ‘예산 15%가 정권창출 유지 비자금’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낸 가네코 가오리(43·한국명 주현희) 씨의 어머니 이경선(70) 씨는 <로스앤젤레스 선데이저널>과의 인터뷰에서 ‘93년 가을부터 김 전 대통령 퇴임 직후까지 김기섭 실장으로부터 모두 23억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고 전하는 등 본보 기사내용을 무게 있게 다뤘다.

또한 본국 주간지인 일요신문은 ‘[김영삼 전 대통령] 숨겨진 여인 이경선 씨 파문’이라는 제하의 최근호 기사를 통해 “지난 2000년 1월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한 가네코 가오리 씨(43·한국명 주현희)의 생모 이경선 씨(70)가 YS정부 시절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기획조정 실장이었던 김기섭씨로부터 23억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월간조선> 3월호는 ‘김영삼의 숨겨진 여인이라는 이경선씨 입 열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 한인신문인 LA 선데이저널과 이 씨의 인터뷰 내용’을 게재하고 ‘이 씨가 93년 가을부터 김 실장에게서 수차례에 걸쳐 23억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정치권에 크나큰 ‘파문확산’을 몰고 오고 있는 ‘YS의 숨겨진 여인 이경선 씨와 본보와의 전격 인터뷰 기사’를 본보는 지난 제493호에 이어 그 시리즈 2탄(총 4회 예정)을 이번 호에 공개한다.

연 훈<본보 발행인> [email protected]

재일거류민 단장 윤달용 씨와의 만남
딸 가오리가 일본으로 오기까지…

















▲ 본보가 최근 입수한 YS의 숨겨진 딸 「가오리」의 사진. 90년대초 뉴욕의 루이비통 가방 판매점에서 근무할 당시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동안 유년시절 사진으로만 밝혀졌던 「가오리」 씨의 청장년기 모습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2005 Sundayjournalusa

이경선 씨는 일본에 거주하던 시절에 대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고 벌은 돈을 모두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냈어요. 간간히 김영삼 씨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묻기도 했으나 그 회수가 갈수록 줄어들었죠”라며 “남녀라는 것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 것인지 일본에 온지 한 1년쯤이 지나자 서서히 YS가 마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이 무렵 우연히 재일 민간단체의 모임에 나갔다가 저보다 14살 연상인 당시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후일 단장이 됨)인 윤달용 씨를 만나게 되었죠”라고 설명하며 윤 씨와의 관계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 호적등본을 보면 윤달용 씨와 혼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정식 결혼을 했습니까

<당시 윤 단장은 부인과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으며 나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저는 그 동안 지나 온 제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는데 이를 듣고도 윤 단장이 ‘앞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해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결혼 신고를 하고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아 일본에 살게 되었다. 그 동안 남의 작은 부인으로만 살다가 비록 윤 씨의 두 번째 부인이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너무 행복했었다>

– YS와의 사이에서 난 딸 ‘가오리’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으며, 한국이름 주현희라는 이름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그리고 가오리 씨는 일본에 어떻게 가게 되었습니까

<가오리 출생 후 친정 어머니가 다니던 한 사찰의 스님이 ‘김현희’라고 작명을 해줘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6살 무렵까지 그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친부인 김영삼 씨가 호적에 입적 시켜주지 않아 호적도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학교 입학 문제도 있고 일본으로 데려가려고 갖은 방법을 궁리했었다. 그러던 중 한 대만인의 도움으로 가오리를 그 분의 자식으로 입적할 수 있었고, 이에 가오리는 대만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주현희(周賢姬)라는 이름도 그 당시 대만인의 성인 주(周) 씨 성을 따라 주현희가 된 것이며, 가오리(香織)라는 일본 이름은 가오리를 양녀로 입양시켜준 여류 피아니스트 기하라(木原OO) 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기하라 씨는 재일 한국인인 장OO 씨와 결혼을 했는데 장 씨의 형이 윤달용 씨와 절친한 관계로 가오리를 입양하게 되었으며, 장 씨는 국적이 일본이어서 부인의 호적으로 입양시키게 된 것이다.>

– YS에게 가오리의 호적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가

<왜 안 했겠는가. 윤 단장과 결혼을 하기로 하고 한국서 수속을 밟는 동안 몇 번이고 만나 호적정리를 요구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가오리를 그런 방법으로 일본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경선 씨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처음 YS와는 서로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였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건이 허락치 않아 헤어질 운명으로 담담하게 받아 들였으며, 가오리를 호적에 올려주지 않을 것 같아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데려가 아들 영준이는 윤 단장의 양자로 입적 시켰으며 가오리는 대만인의 자식으로 입적 시켜 67년 여름 일본으로 오게 했다”고 일본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했다.

이 대목쯤에 이르자 필자는 그간 ‘YS의 사생아’로 알려진 가오리 양에 대한 소문의 궁금증과 수수께끼들이 하나 둘씩 풀려지는 것을 느꼈다. 즉 비운의 여인 ‘이경선 씨’와의 이번 만남으로 인해 지난 92년 당시 본보 자매지인 LA 매일신문에 보도된 ‘김영삼의 숨겨진 딸 가오리’ 보도 이후 베일에 가려졌던 ‘YS의 숨겨 놓은 딸 진실 공방전’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져 줄곧 ‘허위보도’라고 맞서며 사실무근으로 일관했던 김영삼 前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임에 점차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윤달용 단장은 누구인가















▲ 故 윤달용 씨.
ⓒ2005 Sundayjournalusa

여기서 잠시 윤달용 단장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윤 단장은 재일거류 민단장으로 60만 재일교포를 이끌던 거물급이었다.

윤 단장은 개성 일대에서 인삼 밭을 경영하던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선린상고를 졸업(1938년)하고 1944년 4월에 일본의 중앙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국세리사, 공인회계사 양과에 합격한 수재로 재일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71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그리고 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바도 있다.

아울러 제34대(1974.3.24~1976.3.31) 민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민단 일을 중추적으로 수행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한국 정재계 인사들과 친분관계가 돈독한 관계로 재일동포 사회와 한국 정부 간의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편 윤달용 씨, YS의 후원자 역할
딸 가오리와 함께 수 차례 회식


“일본으로 온 가오리(현희)는 윤 단장과 과거 함 사장과 사이에 난 아들 영준이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가오리는 윤 단장을 친부로 알고 있었고 윤 단장 또한 가오리를 상당히 귀여워했으며 친딸처럼 보살펴 주었죠”라고 이경선 씨는 회고하며, 뜻밖에도 YS와 남편인 윤달용 단장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 가오리가 일본 생활에 잘 적응했는가

<일본에 도착한 가오리는 윤 단장을 친부로 알고 잘 따랐으며 윤 단장도 친딸처럼 보살펴 주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니 우리 모녀는 부러울 것이 없이 행복했었다.

다만 아이가 학교에서 일본 말을 잘 못해 친구들에게 ‘조센징’ 또는 ‘아나까베(시골트기)’ 라고 놀림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당시 가오리는 큰 물통으로 물을 뿌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켜 내가 자주 학교로 불려가 선생님에게 곤혹을 치루기도 했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아이는 자기 주장이 강했고 배짱이 두둑했었다. 일본에 건너 온 이후 얼마동안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 가오리, 윤 단용 단장과 함께 YS를 만났다고 했는데 무슨 이유로 만나게 되었는가

<한 번은 일본에 온 YS가 전화가 와서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니 “함께 만나자”고 하여 만나게 되었다. 그 때가 아마 가오리가 소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는 가오리는 YS를 가르키며 “누구냐”고 물었고 윤 단장이 ‘서울에서 온 아저씨’라고 처음에 소개했었다.

당시 재일거류민단장인 윤 단장은 젊은 정치인 YS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이내 오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한 사람은 딸을 낳은 아버지고 또 한 사람은 키우는 아버지인데도 둘이 아무런 감정 없이 자연스럽게 친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윤달용 단장과 인연을 맺게 된 YS는 이후 일본에 올 때마다 윤 단장을 따로 만났었다는 것이 이경선 씨의 설명.

이경선 씨는 “그 때마다 거액의 정치자금을 YS에게 주었다”는 소리를 윤 단장으로부터 자주 들었으며 “어떤 때는 윤 단장이 YS가 왔으니 저녁을 먹으러 나오라고 해 딸 아이와 같이 가서 저녁을 같이한 적도 몇 번 있었죠”라고 덧붙였다. 이어 “제가 알기로는 한번 만날 때마다 윤 단장이 2-3백만원 씩 용돈을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윤 단장은 저에게 얼마를 정치자금으로 주었다고 말하면서 YS를 대단한 인물로 추켜세우며 앞으로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경선 씨는 YS와 윤 씨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모르긴 해도 윤 단장이 YS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네준 이유는 YS가 유망이 전도한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부인이자 가오리의 생부인 YS에 대한 연민에서 도움을 주었을 개연성 또한 큰 것으로 생각되었죠”

이어 이경선 씨는 “가오리는 친부로 알고 있던 윤 단장의 사랑을 받으면서 소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쯤에 이르러 윤 단장이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말았죠. 참으로 우리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행복한 가정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이에 어린 가오리가 충격을 받을 것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미국 워싱턴에서 잘 알고 지내던 스님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어 가오리 장래문제를 놓고 의논을 하니 ‘자신이 돌봐줄 테니 미국으로 보내 교육을 시켜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여 딸 아이(가오리)에게 물었더니 가오리도 ‘미국에 가고 싶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죠”라며 가오리 양이 미국 행에 오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가오리, 생부 YS와 상봉
그리고“비행기표와 여비 3,000 달러를 받다”

















▲ 도쿄의 양 부모 집을 방문 그녀를 딸로 입양시킨 일본인 어미니 가네꼬 씨와 친척 여동생과 함께 공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가오리(左측)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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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가오리를 미국에 보내려고 결심을 하였으나 재정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이경선 씨의 설명이다. “부도가 난 윤 단장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당시 일본에 와 계신 저의 어머님과 의논을 하는 과정에서 ‘차라리 생부인 YS에게 부탁을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며 이에 이경선 씨의 모친인 가오리의 외할머니가 가오리를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 때가 74년 봄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경선 씨는 ‘당시 YS의 정치적인 입지가 대단했지요. 40대 기수론인가 뭔가 해서 일본 언론에서도 연일 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윤 단장이 사업에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YS가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그는 윤 단장이 부도가 난 이후 단 한번도 일본에 와서 윤 단장을 만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만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YS지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이경선 씨의 두 눈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미국 유학을 보내는데 비행기표와 경비 등 당시로선 거액인 약 5,000 달러 정도의 큰 경비가 필요해 하는 수 없이 YS에게 생전 처음으로 부탁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에 가오리를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 보내게 되었습니다”며 당시의 절박한 심정을 회고했다.

– YS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내가 일본으로 떠난 후 YS의 여자 관계에 대한 소문을 수없이 많이 들었지요. 특히 영화배우 이 모 씨와의 염문설과 여러 여자들과의 스캔들 등 무수히 많았지만 그래도 저는 부인 이외에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설마 딸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데 어떤 방법으로라도 도와줄 것을 기대한 것은 사실이었죠>

– YS가 도와주었습니까?

<한국으로 건너가 할머니는 YS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 갔습니다. 과거 YS는 우리 집을 드나들면서 제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내가 일본으로 온 이후에도 친정 어머니는 외손자 영준이를 데리고 ‘가끔 상도동 집으로 놀러 가 커피도 얻어 먹고 왔다’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어요.

어머니가 전화를 거니 YS가 반갑게 집으로 오라고해 어머니가 그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몇일 후 YS가 직접 남산동 집으로 찾아와 비행기표와 경비 3,000 달러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때가 YS를 만나고 정말로 처음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 가오리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만났죠. 일본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가오리가 인사를 하자 YS는 “미국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며 가오리를 꼭 껴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등 부정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또 연락하라’는 말만을 하고 10여분 만에 돌아갔지요.

그런데 혈육은 물보다 진하다고 YS가 돌아간 뒤 가오리가 할머니에게 참으로 이상하다는 듯이 “저 아저씨가 무슨 이유로 나를 도와주느냐”고 묻더랍니다. 어린 나이에도 느끼는 게 있는지 YS의 얼굴을 쳐다보며 자기와 모습이 너무나 흡사한 YS에게 본능적으로 혈육에 대해 끌리는 감정이 생겨났는지 떠나가는 YS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몇 번이나 할머니에게 물어보더랍니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가오리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는 판단 아래 가오리에게 “사실은 네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 네 친 아버지다”라고 말하자 의외로 침착한 가오리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너무나 반가워 하며 할머니에게 “미국에 가기 전에 한번만 더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하지만 가오리 씨는 YS가 친 아버지라는 사실에 혼돈이 오기 시작했고, 그 뒤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내내 생부인 YS가 자기를 다시 한번 찾아올 것을 기대했으나 끝내 YS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큰 실망을 했다고 한다.

가오리 씨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까지 할머니에게 “아버지를 다시 만날 볼 수 없겠느냐”고 밤새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친 아버지와의 첫만남 이후 가오리 씨는 당시 어린 마음에도 자신에게 홀연히 나타난 친 아버지의 존재가 너무나 크게 나타난 것이었다.

YS와 워싱턴에서의 전화통화
목소리 듣고 밤새 대성통곡


미국에 건너온 가오리 씨는 할머니와 이복 오빠인 함영준 셋이 함께 살았다. 가오리 씨는 아무 탈 없이 학교를 잘 다녔으나 넉넉치 못한 생활비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도 윤 단장의 부도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아 늘 경제적인 고통이 뒤따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패물 등을 팔아 미국으로 송금을 해주었지만 학비 때마다 항상 한바탕 전쟁을 치루곤 했죠”라는 것이 이경선 씨의 설명. 하지만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칠 리 없는 인생 사이고 보면 그런대로 넉넉치는 못했지만 살림은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YS가 워싱턴을 방문, 한 모임 석상에서 아들 영준이가 다가가 인사를 하자 YS는 영준이를 알아보고 “어른이 되었네”라고 대견해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날 오빠 영준이는 동생 가오리의 전화번호를 YS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가오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놀란 가오리는 한참 동안을 목이 메어 말을 못했다고 한다.

‘아빠’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자 YS는 특유의 퉁명한 목소리로 “공부 열심히 해라”는 외마디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날 가오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수화기를 들은 채 서 있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울었다고 할머니가 어머니 이경선 씨에게 전했다. 당시 학비 문제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던 가오리는 “친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불쑥 전화를 해 아무런 말도 없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매정하고 비정한 말 한마디에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던 것 같아 통곡을 한 것 같다”고 이경선 씨는 말했다.

이어 “소위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무리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자식이라지만 ‘어려운 시기이고 하니 생활비나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은 것이 너무나 가슴이 사무쳤던지 그 뒤로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가끔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오히려 애써 외면하려 했다.

생부 YS와는 그것이 마지막 전화 통화였으며 지금까지 30년 세월 동안 단 한번의 만남이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아무튼 이렇게 무관심 속에 세월이 흘러 가오리는 LA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중도에 포기한 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 와중에 윤 단장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쯤에 가오리 씨는 한 일본 항공사(ANA)에 지상요원으로 근무하며 모녀가 함께 동경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전화통화 이후 가오리와 YS는 단 한번의 전화통화도 한 적이 없으며, 가오리도 친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고 살았다. 워싱턴에서의 아픈 기억때문인지 이경선 씨의 말을 빌리자면 “친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한 사람인지 알고 난 이후부터는 YS의 이름만 나와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YS 숨겨진 딸’ 보도로 옥살이 한 언론인, 손충무 씨
“나는 YS 로부터 1달러도 안 받았다”

















▲ 손충무 씨.
ⓒ2005 Sundayjournalusa

‘인사이더월드’의 손충무 발행인은 지난 1992년 본보 자매지 ‘매일신문’이 보도한 “부패 씨앗 품은 김영삼의 두 얼굴 – 버려진 딸 현재 뉴욕서 살고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당시 ‘인사이더월드’ 5월 호에 보도해 국내외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당시 YS는 대권에 나서는 입장이었고 국내는 아직도 군사정권의 독소가 여기저기에 스며든 상황에서 ‘인사이더월드’의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손 씨는 그 때 YS의 고발로 잠시 옥고를 치룬바 있다.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표였던 YS는 불법적인 권력을 이용해 손 씨를 구속하게 했지만 결국 26일만에 고소를 스스로 취하하여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손 씨의 모친 김 수산나 말수 여사는 아들이 무고하게도 구속 당하는 모습을 TV로 보고 충격을 받아 기절해 혼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구속 중이라 손 씨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킬 수가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고 국제 언론단체와 인권단체들, 그리고 미 국무부를 포함해 미국의 의회 정치인들이 한국정부에 항의하여 손 씨를 석방하라는 국제적인 여론에 할 수 없이 YS는 고소를 취하할 수 밖에 없었다. 손 씨의 승리였다.

최근 손충무 발행인은 본보에서 보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가오리’ 기사와 관련해 그의 입장을 보내왔다. 그는 “본보가 ‘YS 숨겨진 딸’을 추적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면서 자신도 당시 뉴욕, LA, 도쿄에 특파원들을 파견해 종합적인 취재를 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YS와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동지라는 약속관계 때문에 기사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본보가 1992년 초부터 한국의 월간 ‘말’ 지와 합동취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도쿄의 정보 소식통을 통해 입수했다고 그 과정을 밝히기도 했다. 또 그는 당시 “YS 측근들이 20만 달러를 준비해 LA로 가서 연 훈 발행인을 만났으나 연 훈 발행인이 돈을 거절하고 기사화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한편 그는 본보 기사 중에서 자신에 대한 부분에 대해 일부가 정확하지 못하다는 점이 있다면서 항의했다. 손 씨는 “본인은 오늘 날까지 YS나 그의 측근들 어느 누구로부터도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YS를 처음 만난 시기는 1970년 중반이었으며 당시 기자와 정치인의 관계로 만났다.

그 후 손 씨는 박정희 유신정권을 반대하다가 1977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워싱턴 D.C.에서 ‘한미 타임스’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그는 이듬해 1978년 워싱턴을 방문한 YS와 단독으로 만나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동지가 되기로 결의한 후 서로 교류하여 왔으나 YS로부터는 단 1달러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손 발행인은 “YS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하거나 일식 집에서 만난 적은 있으나 1달러의 돈이라도 받은 적은 현재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그와 같은 사실은 직접 YS나 측근들에게 확인해 보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는 1992년 5월 ‘YS 숨겨 놓은 딸…’ 관련 보도사건 이후 2000년 8월까지 8년 동안 YS를 만난 사실이 없었다며 “따라서 YS로부터 돈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YS 정권시절의 안기부장인 권영해 씨는 1993년 말까지 알지도 못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보도사건 당시 권영해 씨는 국방부에 있는 군 장성일 뿐 안기부장도 아니고 YS 근처에도 없었던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YS 관련보도에 대해 손 발행인은 “본보의 기사 중에서 자신에 관한 부분을 ‘미주 신문인협회’가 정확한 내용을 검토치 않고 소속 20여 개 언론사에 제공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과 불명예를 안겨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본보에 대해 ‘미주 신문인협회’에 항의를 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들 언론사들이 정정보도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별도의 법적 대응도 강구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한편 손 발행인은 “지난 92년 ‘인사이더월드’ 5월호 “YS 숨겨진 딸” 보도 당시 자신을 불법 구속케 한 김영삼 前 대통령과 이인제 前 의원 등을 비롯해 담당 검사와 영장을 불법으로 발부한 판사, 그리고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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