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3탄 :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모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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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가 가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숨겨진 여인인 이경선와의 전격 인터뷰’는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본보 발행인(연 훈)과 자리를 함께한 이경선 씨.
ⓒ2005 Sundayjournalusa

본보가 극비리에 추진한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양의 생모인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최초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월간조선을 필두로 한국 내 각종 여성지와 주간지들 또한 본보 기사를 인용해 앞 다퉈 기사화하고 있는 상태다.

이로써 본보가 지난 92년부터 끈질기게 추적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는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보도 공방전’과 관련해 약 10여년 만에 그 진실이 밝혀질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이번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한 가오리 양의 생모 이경선 씨도 따로 ‘자서전’ 출간을 계획하고 있는 등 이번 파문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을 전망이다.

이렇듯 한국 정치권 내에 크나큰 ‘파문확산’을 몰고 온 ‘YS의 숨겨진 여인 이경선 씨와 본보와의 전격 인터뷰 기사’와 관련 본보는 지난 제493, 494호에 이어 그 시리즈 마지막으로 제3탄을 이번 호에 연재함으로써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연 훈<본보 발행인> [email protected]

















▲ 본보가 최근 입수한 YS의 숨겨진 딸 「가오리」의 사진. 90년대초 뉴욕의 루이비통 가방 판매점에서 근무할 당시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동안 유년시절 사진으로만 밝혀졌던 「가오리」 씨의 청장년기 모습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2005 Sundayjournalusa


YS 드디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김기섭 씨, YS와 친분 내세우며 접근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결국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경선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불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씨는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야 남은 여생 그나마 팔자가 필 수 있다는 생각도 솔직히 있었지만 딸 가오리 장래에 그나마 희망을 기대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 당시의 심정이었다는 설명.

이어 “학비 문제로 대학을 중도에 포기한 것이 너무나 가슴에 걸려 대학이라도 제대로 졸업 시켜주고 싶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몇 개월 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빠가 대통령이 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가오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과거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에 대한 슬픈 기억 때문인지 별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으로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사실 가오리는 출생 이후 윤 단장과 함께 생활한 소학교 시절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재정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한 적이 없었고 YS가 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한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는 가오리는 내성적인 성격에 항상 외롭고 측은해 보여 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이경선 씨는 수 차례 김덕룡 의원하고만 연락을 취하거나 만났다는 설명이다. 김 의원은 만날 적마다 이경선 씨의 금전적 지원 요청에 “기다려 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YS가 대통령에 당선 되고 나서도 YS와의 관계에서 전혀 상황이 달라지지 않자 이경선 씨는 YS의 최측근인 김덕룡 의원에게 최후 통첩을 하며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는 부연설명. 이경선 씨와 김덕룡 의원은 시청 뒤쪽에 자리잡은 국제호텔 커피숍에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최후통첩을 하던 이날도 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만났다. YS가 지난 92년 대선에서 승리한지 약 10개월 후로 기억을 더듬는 이경선 씨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제가 막 화를 냈어요. 김 의원에게 예전에는 딸 아이 아버지니까 잘 되기를 바랬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우리 모녀를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는 건가요. 그 동안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으면 소문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겠느냐고 몰아 세우며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일본으로 데리고 나가 당신 호적에 안 올렸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거 아니냐.

이제라도 기자회견을 열어 숨겨 놓은 딸에 대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고 큰 소리를 치자 김 의원이 오히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갈 것이다”라며 나를 달랬습니다>

김 의원은 정말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로 이 여인이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바로 김영삼 대통령의 숨겨진 딸의 모친이다”라고 밝히는 날이면 그 동안 쌓아 온 YS의 정치생명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는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고, 자칫 국정운영 전반에까지도 파장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임이 인지되었기에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 같은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경선 씨 기억으로는 김 의원과 그런 일이 있은 지 한 10일 정도 지난 한 남자로부터 “중요한 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이경선 씨는 직감적으로 전화를 한 사람이 분명 YS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겁이 나기도 했다는 설명. 이 씨는 순간적으로 정인숙 여인의 피살사건이 생각났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절대권력 집권자들의 숨겨진 여인들의 종말이 불현듯이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치명적인 상처가 온다면 어느 집권자가 가만 내버려 둘 리 없지 안겠는가’라는 공포감이 엄습했다고 한다.

“사실 겁이 덜컥 났어요. 혹시 나를 납치해 죽이지나 않나 하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자기의 자식을 난 여자인데 설마 어떻게 하겠나 등 생각이 교차했지요. 그 때는 저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어요. YS가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로 막막할 정도였습니다. 여러 번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렸지요. 그리고 약속 장소인 신라호텔 커피숍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 그 때가 정확히 언제입니까

<그러니까 YS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나서 10개월 후쯤으로 기억합니다. 93년 가을쯤인 것 같아요>

– 이경선 씨를 알아보던가요

<제가 커피숍에 들어서니 약간 마른 체격의 중년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하고 자신은 YS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속으로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하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실망한 표정을 짖자 내 얼굴을 의식해서인지 금새 나를 돕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 어떻게 도와준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그 사람은 만나자마자 소위 ‘앓는 소리’부터 시작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입을 막아 보려는 심산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제게 적당히 돈 몇 푼 쥐어주고 끝내 보려고 의도적으로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하고 접근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죠.

제가 “대통령이 보내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말도 묻지 말라”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가방을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이게 무어냐”고 되묻자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실 것 같아 준비해 온 것이니 오해 말고 받아달라”고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당장 돈이 필요한 나로서는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돌아가신 윤 단장의 식구들과 재산분배 소송에서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채무자들에게 너무나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 사람은 “얼마면 되겠느냐”고 묻더군요. 내가 일본 돈 7천만 엔(한국 돈 약 7억원) 정도 된다고 하자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주고간 돈을 들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열어 보니 3억원이었습니다. 생전처음 만져보는 현금 3억원을 들고 얼굴이 상기되었고 ‘사람이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밤새 돈 다발을 껴안고 잠을 잤을 정도였습니다>

10번에 걸쳐 총 23억원 정도를 받았으며
그 중 “10억은 대통령 퇴임 후에 받았다”







지난 92년 LA 매일신문 보도 이후
안기부 요원들 연락해와












▲ 오연호 現 오마이 뉴스 대표.
지난 92년 필자는 한국의 월간지 <말> 지의 오연호 취재기자(現 오마이 뉴스 대표)와 함께 일본서 만나 동행취재를 하게 되었다. 한국의 모든 언론들이 이 사건에 있어 침묵을 하거나 오히려 음해공작이라고 몰아 부칠 때 <말> 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동행취재에 나선 것이었다.

필자와 오연호 기자는 백방으로 이경선 씨의 거취를 수소문하여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경선 씨가 살고 있는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이경선 씨가 LA 매일신문 보도 이후 기자들의 추적을 피해 3번이나 이사를 한 사실을 확인하였고, 필자와 오연호 기자가 찾아간 8월에는 ‘스기나미구 고엔지(高圓寺) 기타(北) 3-26-18 산베루 고엔지 멘션 203호’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곳으로 향했다.

필자와 취재 일행은 이경선 씨 집 앞에서 이틀간 공연히 대치(?)를 벌이기도 했었다. 이경선 씨는 취재진이 자기를 취재하러 온 것을 알고는 집에서 나오지를 않았던 것. 당시 필자와 동행 취재한 뒤 이 내용을 보도한 <말>지 10월 호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 8월 23일(1992년) 기자는 그 주소를 들고 현지의 골목을 뒤졌다. 기타 3-26-18번지엔 6채의 집이 있었다. 그 중 지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은 조그마한 연립주택의 입구에는 ‘산베루 고엔지 맨션’이라는 집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연립 주택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3가구가 살고 있었다. 203호 베란다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중년 부인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위 속옷과 수건이었다. — 우리 취재진은 3명이었다(연 훈/오연호/ 일본에 체류 중이던 작가 유재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문쪽으로 걸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도치라사마 데스까(누구십니까)”

5, 60대 아주머니가 일본어로 물어왔다.

– 실례지만 스즈하라 레이고 상이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 언제 이사 왔습니까
“1년 전에 왔습니다”

– 1년 전에 한국사람이 살았습니까
“모르겠습니다”

– 뭘 좀 여쭙고 싶으니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까
“그런 사람 모른 다고 했는데 문을 열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는 다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 초인종을 눌렀으나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공중전화 박스에 가서 가지고 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중략)

– 어느 분이 이경선 선생님 댁이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줘서 거는 겁니다. 서울서 온 기자입니다.
“닌니모 간케이모 아리마셍(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 우리 말 잘 하시잖아요. 우리 말로 말씀하시지요.
“왜들 이러는 거예요”

그는 이번에는 한국말로 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애써 일본 말로 했으나 군데군데 단어를 간혹 한국 말로 하기도 했다.

– 우리는 “김영삼 씨의 숨겨논 딸 보도”를 확인취재 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 그런 보도가 난 것을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요 근래 한국에 가 본적이 없어요”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취재진 중 한 명이 담 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통화를 하였다.
“여기는 더 이상 오지 말아주세요”

– 김영삼 씨 사생활 보도와 관련이 없다면 왜 올해 3번 씩이나 거처를 옮겼습니까
“그것은 내 개인 사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고는 더 이상 전화를 받지않았고 녹음수신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와 관련 이경선 씨는 92년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에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 말하며 “이미 보도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설마 집에까지 찾아올지는 예상치 못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 당시 왜 우리들을 피했습니까

LA와 한국에서 가오리 기사가 보도된 이후 안기부 요원들이 찾아와서 이 사실을 알려 주었고 나 역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 불쑥 기자들이 찾아 왔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 안기부 요원들이 찾아와 무슨 말을 했습니까

<특별한 말은 없었고 무조건 당분간 피해 있으라고 했던 것만 기억합니다>

– YS로부터 직접적인 연락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관련한 보도가 불거져 나와 한국에 나가 김덕룡 의원을 만나 의논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 김 의원과는 무슨 말을 나눴습니까

<윤 단장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은신하고 있어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당시 내 마음도 이왕이면 딸 아이의 친 아버지인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는데야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오래 살다 보니 별 볼 일없이 생각하던 YS가 한국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 시켰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경선 씨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한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건네 받은 3억원을 고스란히 일본에서 지고 있던 부채에 대한 이자 조로 모두 나가고 말았다는 설명. 당시 이경선 씨에게 돈을 차용해준 사람들은 YS가 가오리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의 경우에는 YS에게 돈을 받으려고 집단 행동을 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 윤 단장 가족과의 재산분배 소송에서 수 년간에 걸친 지리한 법정 공방전 끝에 승소하기는 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고 공연히 재판을 하느라 엄청난 빚만 지게 되고 말았다”고 말하는 이경선 씨는 이 대목에서 YS 재임시절 받은 돈에 대해 소상히 털어 놓으며 당시 받은 돈을 모두 탕진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김기섭 씨인가요

<네. 저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신라호텔에서 만났는데 나중에 그 분이 신라호텔의 고위 간부급 직원 출신이며 안기부의 기조실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왜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 같습니까

<제가 속은 거지요. 처음 만날 때부터 그는 앓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대통령의 친인척들에 대한 특별 감시를 하고 있다’느니 ‘비리가 있을 시는 엄단으로 다스리라’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도 있고 국민들 여론이 좋지 않아 돈을 만들 수가 없다느니 하는 등 묻지도 않는 소리를 만날 때마다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면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을 우려해서인지 자신을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둘러댄 것을 나중에 알은 거지요>

– 김기섭 씨로부터 얼마를 받았습니까? 들리는 바로는 ‘30억이 넘는다’는 말이 있던데요. 사실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예요. 모두 합쳐서 총 23억 원을 받았어요. 맨 처음에 3억. 다음에 2억. 그리고 1억, 3억, 2억, 2억 이런 식으로 대통령 재임시 총 13억을 받았고, 대통령 퇴임 후 김기섭 씨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10억원을 주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이니 더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군요>

– 10억을 전액 현찰로 받았습니까

<아니오. 5억원은 현찰로 받았고 나머지 5억원은 2천-3천만원짜리 자기 앞 수표로 받았습니다>

– 받은 돈이 23억원이면 엄청난 액수인데 모두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그 중 7억원은 일본에서 진 빚을 갚는데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4년 동안 생활비로 썼습니다>

– 4년 동안에 16억원의 생활비를 썼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볼 때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어떤 생활을 했길래 4년 만에 16억원의 생활비를 사용했습니까

<제가 낭비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돈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가오리가 다시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하는 동안 학비, 생활비 등이 들어갔으며 한국-일본-미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생활하느라 돈이 많이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퇴임 후 받은 10억원 중 아들 아이가 친구와 같이 사업을 한다고 해서 5억원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받은 돈 모두 없어지고 말았어요>

동부 이촌동에 80만원 짜리 월세방 전전
YS 차남 김현철 씨에게‘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 요청


필자를 만나 인터뷰하는 도중에 이경선 씨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한지 약간 눈시울을 적셨다. 언제까지 YS가 자신을 도와줄 것으로 착각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감이 들었던지 얼굴 표정이 상기되었다.

결국은 YS가 도와준 23억원을 모두 탕진하고 이제 ‘또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한심했던 탓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에 와서 기댈 사람이 YS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마지막으로 도와주면 자식이고 뭐고 상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해 그간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해왔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아들(함영준)이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게 되자 돈 문제 등으로 딸 가오리와도 1년 6개월 동안 연락이 끊겨 지내는 참담한 현실이 슬펐던지 한참 동안을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 생활이 그토록 어려운데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해 보셨나요.

<물론이지요. YS가 워싱턴을 방문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워싱턴으로 가서 강연을 끝내고 YS가 동포들과 악수를 하는 자리에 참석해 정면으로 만나 “안녕하세요 이경선입니다”라고 말하자 YS가 놀란 표정을 지기도 했어요. 이때 미리 준비해 둔 워싱턴 전화번호를 손에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 연락이 왔나요.

<이틀 간을 기다렸는데 끝내 전화가 없더군요.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전화가 없었습니다. 그 때마침 워싱턴에서 손충무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손 사장이 제게 ‘편지를 쓰면 YS에게 전달해 준다’고 해 ‘가까운 사람에게 대필을 시켜 주었습니다’만 그 뒤 함흥차사였어요. 그 편지가 바로 선데이저널에서 입수 보도한 그 내용이지요.

그러나 이 편지가 YS에게 전해졌는지 확인이 되지 않았고 이 편지 이외에도 가오리가 직접 쓴 장문의 편지도 전해준다고 해서 손 사장에게 드렸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YS와 친분이 두터운 C 대학의 총장을 지낸 Y모 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면서 주었으나 결국 이 편지가 전해지지 않은 것을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 김기섭 씨나 김덕룡 의원에게 한번 더 연락을 해보지 그러셨어요.

<김기섭 씨는 그 뒤로 메시지를 남겨도 연락을 해주지 않았어요. 역시 김 의원도 마찬가지구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을 느껴요. 당시 상도동 사람들은 나를 “또 왔네…또 왔어”라고 부를 정도로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등 저를 외면했지요.

그래서 한번은 YS의 아들 현철이가 국회의원에 출마한다고 해서 만날 요량으로 지역구인 경남 마산으로 찾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현철이에게 다가가 다짜고짜로 ‘내가 네 여동생 가오리의 엄마다’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당황한 현철이가 정색을 하며 창피했던지 나를 옆으로 데리고 가서는 “자기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돌아가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 일도 있었지만 끝내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지 않더군요>

– YS로서는 도와줄 만큼 도와 주었는데 자꾸 귀찮게 군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 때 차라리 한번에 목돈을 주어 건물이라도 살 수 있게 해주었으면 몰라도 찔끔찔끔 푼 돈으로 주어 모두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그 분 밖에 없지 않나요. 남들이 나를 철면피라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어요>

이경선 씨의 각오는 비장했다. 지금 상황에서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절박하기는 매 한가지고 사면초가 상태인 이 씨로서는 사실 이 길 외에는 달리 살 방도가 없어 보였다.

체면이고 위신이고 차릴 정신적인 여유는 이미 떠나간 지 오래고, 게다가 아들은 몇 천만원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 며느리마저 아들 때문에 회사공금 유용으로 낭패에 처해 있는 상황인지라 필자가 보기에도 절박하기 그지 없었다.

강금실 / 양인석 변호사 등에 친자확인 소송 의뢰
‘DNA 검사 통해서라도 YS호적에 입적 시키겠다’
















▲ 본보가 긴급 입수한 소송위임장(左) 일본어 위임장(右). 원안 사진은 소송위임을 맡았던 강금실 前 법무부 장관.
ⓒ2005 Sundayjournalusa

YS와의 교류채널이 끊긴 이경선 씨는 급기야 YS를 상대로 ‘가오리에 대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지난 2000년 경 이경선 씨는 강금실 / 양인석 변호사가 개업하고 있던 서초동 사무실로 찾아가 수임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가오리의 위임장을 받아 강금실 변호사 등에게 소송을 의뢰하게 되었던 것.
이와 관련 지난 2003년 주간동아 제388호(2003년 6월12일자)에서는 이 소송문제와 관련한 기사가 2페이지에 걸쳐 보도되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YS 前 대통령 친자확인 소송에 휘말리나’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41년 전 아버지 없이 살아온 한 미혼 여성이 김영삼 前 대통령을 상대로 친생자 확인 소송을 통해 자신이 YS가 숨겨놓은 딸임을 확인 받고자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YS의 딸임을 주장해 소송을 의뢰한 주인공이 미국 LA에 살고 있는 J여인’이라고 밝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친자확인 소송은 5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어 이 문제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 소송은 ‘법정으로 비화되기 전 양측의 합의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지금까지 이경선 씨는 합의는 둘째 치고 이렇다 할 답변조차 들은 적이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해 이경선 씨는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강금실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송 문제에 대해 묻자 “자신은 이 소송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 싫으니 다른 변호사를 찾아 보라”고만 했다고 한다.

현재 이 씨는 K모 변호사에게 다시 친자확인 소송을 의뢰했으나 ‘가오리가 친필로 쓴 진술서가 필요하다’고 하여 이번 미국 방문 때 진술서를 받아 영사관에서 확인서를 받아가려고 했으나 가오리가 타주로 여행 중인 관계 등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씨에게 “계획하고 있는 자서전을 발간하려고 해도 가오리 씨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말하며 이 씨가 LA 체류하는 동안 함께 만나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를 했으나 두 모녀의 1년 6개월간 누적되어 온 불편한(?) 관계 탓으로 만남 자체가 무산되었다.
















▲ 가오리 생모 이경선 씨는 조만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출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2005 Sundayjournalusa

– 왜 가오리 씨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습니까

<제가 딸보다는 오빠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돈을 준다는 것이 불만이었지요. 결정적으로는 YS가 준 돈을 자기에게 의논도 없이 오빠를 주어 사기를 당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요. 벌써 연락이 안 된 지 1년 6개월이 넘었어요.

미국에 와서 전화를 하면 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요. 그 동안 수 없이 전화를 걸었으나 제 목소리만 나오면 받지를 않아요. 이번에도 전화를 걸었는데 모두 자동응답 장치로 넘어 가더군요>

– LA에 직접 오셨는데도 아무런 소식을 받지 못했습니까

<가오리 친구를 통해 연락을 받았어요. 워싱턴 집을 팔아 10여만 달러를 다운하고 조그마한 집을 샀는데 최근 직장을 그만두고 생활이 어려워 집을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현재 여행 중이라고 전하며 만약 제가 자서전을 쓸 경우 필요한 것을 준비해 보내준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번에 딸 아이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왔는데 틀렸네요>

이경선 씨는 가오리와 만나지 못한 것을 대해 크게 아쉬워했다. 지금은 그나마 가오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가 모친과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으니 난감한 입장이었다.

한편 이경선 씨는 뉴욕으로 떠나는 날 오전(1월 18일) 선데이저널을 방문해 몇 가지 불만을 털어 놓기도 했다. 지난 92년 필자가 쓴 기사 중 ‘YS와 만날 당시 서울 S 요정에서 만났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며 ‘영준(독립산업 함창희 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 아버지를 만날 때는 잠깐 일한적은 있지만 YS 때는 아니다’ 라고 정정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YS의 버려진 딸 “보도 공방전의 종지부를 찍는다”

필자가 ‘YS의 버려진 딸’에 대한 끈질긴 추적은 인간 김영삼 씨의 명예를 훼손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직성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정직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국가의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의 모든 사생활까지도 검증 받아야 하고 판단 여부는 국민들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참다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믿는다.

인간이기에 모든 것에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까지 부정하는 도덕성이 상실된 부정직한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자기 자신의 과거부터 속이려 드는 사람이 무엇을 속이지 못하겠는가?

대통령도 정치인도 인간이고 그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방 이후 얼룩진 현대사에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은 말 바꿈과 위선적인 정치에 식상한 국민들은 이제 정직한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지난 92년 당시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YS는 지난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나 미국의 제시 헴즈 상원의원 등이 자신들의 혼외 정사에 대해 솔직한 고백으로 반성을 한 것을 거울 삼아야 한다. 더 이상 ‘숨겨논 딸’인 가오리 양에 대해 호적정리를 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일반 국민들에게 “김영삼 前 대통령은 후안무치한 위선적 지도자로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감춘 인물이다”는 인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이 꿈이었다는 YS. 나이 80에 꿈에 그리던 대통령도 지내 보았고 더 이상 정치적 목적도 없을 테니 이제는 이들 두 모녀에 대한 진실 고백을 국민들 앞에 고백하고 남은 여생을 마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경제난에 허덕이던 IMF 시절,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약 23억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이 안기부를 통해 흘러갔다는 것에 대한 해명 또한 뒤따라야 할 것이다.

현재 나이 40 중반의 나이에도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린 뒤 결혼을 하겠다’며 몇 번의 결혼기회를 미루어 온 딸 가오리에게 YS는 정정당당히 나타나 호적을 정리해 주는 길이 두 모녀에게 백배 사죄하는 길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YS가 약 23억이라는 거금을 건네 주었음이 밝혀지긴 했으나, 오히려 가오리 모녀는 누가 보더라도 구차하고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에 필자는 오히려 이경선 씨와의 인터뷰 내내 “23억이라는 거금이 이들 가족에게 독이 되지나 않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43년 넘게 숨어 지낸 YS의 사생아 가오리 양에게는 그 어떤 재물보다도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 결혼하겠다’는 순수한 마음만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필자는 이제 지난 13년 동안 진행되어온 ‘김영삼 前 대통령의 버려진 딸 가오리’에 대한 보도 공방전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이제 그 판단의 공은 김영삼 前 대통령에게 넘어 갔다. 아울러 필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인해 가오리 양, 그리고 이경선 씨 등을 비롯 이 기사에 단서를 제공한 모든 취재원들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지면을 빌어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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