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연호사용 86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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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비원 지안스님의 쓴소리 단소리 철학칼럼.
 
ⓒ2005 Sundayjournalusa

우리의 대한민국이라는 연호를 언제부터 부르게 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연호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10년 후 1919년 3월 13일 상하이[중국: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연호를 [대한민국]이라 사용하기 시작하여 1919년 4월13일 한국의 임시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3·1운동이 전 민족운동으로 확산될 때 그 독립정신을 집약하여 한민족이 주권국민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또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

임시정부는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임시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할 국토와 국민이 없어 일반 정부와는 달랐으며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라서 망명정부도 아니었다.

그러나 3·1운동에 의해 수립된 임시정부였으므로 전 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 또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통할 기구로서의 구실을 담당했다.

일제의 반격과 중일전쟁(1937)으로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으로 몇 차례에 걸쳐 거처를 옮겼다. 상하이시기(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통할하는 데에 주력했고 충칭시기(1940∼45)에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미얀마전선에 참전하였다.

당초에 임시정부는 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신한민국정부·대조선공화국·노령정부·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등 7개가 있었다.

상하이의 지도자들은 베르사유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고 당 인사들이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중 한성정부 수립 추진의 소식을 듣고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때 임시의정원에서는 한성정부의 각료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의 절차를 밟았다. 노령에서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국민의회로 개편하고 국민의회에서 1919년 3월21일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노령정부는 활동을 개시하였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로 선임된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 운영하고 있어 마치 3개의 정부로 분열한 것처럼 보였다. 의회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와 노령에서 통합작업을 추진하여 1919년 9월6일 제1차 개헌 형식을 거쳐 대통령중심제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되었다. 국호는 상하이 정부의 것으로 정했고 각료구성은 한성정부의 것을 따랐다. 통합정부의 성립 이후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의 임시헌법(제1차개헌) 1925년의 임시헌법(제2차개헌) 1927년의 임시약헌(제3차개헌) 1940년의 임시약헌(제4차개헌) 1944년의 임시헌장(제5차개헌) 등 5번의 헌법개정이 있었고 권력구조를 나타내는 정부형태도 5번 바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형태의 주류는 의원내각제였는데 1919년 9월의 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한 절충형을 취했고 1927년의 헌법에서는 국무위원중심제에 의한 스위스방식의 관리정부형태를 채택하였던 것 외에는 의원내각제를 따랐다.

1919년 9월 통합정부의 각료조직은 한성정부의 것을 인수하였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의 당수였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립내각의 성격을 띠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는 여러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치권을 유효하게 미치는 곳이 없었으므로 국제법상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외교활동의 대상은 대미외교와 대중외교가 대종을 이루었는데 대미외교는 초기에, 대중외교는 종전기에 보다 두드러졌다. 그 다음에 파리통신부가 주도한 강화회의와 유럽 각 국에 대한 외교, 그리고 소련과의 외교가 있었으나 초기의 일에 불과하였다. 초기에 대미외교가 주종을 이루었던 것은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점이고 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노백린·김규식·안창호 등 미국 유학 또는 그밖에 미국과 인연이 많았던 인사가 집권하고 있었던 점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도시인 상하이에 있었으므로 구미와의 창구가 열려 있었던 점에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이념의 기조를 이룬 것은 자유주의이념이었다. 그러나 초기 독립신문(상하이판)의 논조나 정부지도자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러시아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하여 상당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1927년의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을 전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유일당촉성운동 이후부터 공산주의를 배척하였다. 그리고 1931년에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했다. 삼균이란 인균(人均)·족균(族均)·국균(國均)인데, 인류평등·민족평등·국제평등과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용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민주주의 원리였다· 이 삼균주의이념은 1944년에는 새 헌법에 반영되어 광복한국의 기초이념으로 다져졌다. 또 다른 이념적 측면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떠한 제한독립도 부정했다는 점이다.

<자비원 -지안 스님> 323-735-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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