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9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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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비원 지안스님의 쓴소리 단소리 철학칼럼.

필자가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왜놈 왜놈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일본이라고 자연스럽게 되었다.

역사로 보면 임진왜란. 을사조약. 36년 식민지 하나같이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를 괴롭혔다. 오늘까지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생떼거지를 쓰고 있다.

독도문제로 전 국민이 분노하는 지금 안중근 의사가 생각난다. 3월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95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국을 건지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연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야말로 안중근 의사다.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요 문성공 안유의 이십대손으로 1879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읍에서 탄생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개가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이름을 안응칠이라 불렀다.

그 뒤 집을 신천군 두라면으로 옮겨 산수 풍경이 아름다운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살게 되니 의사의 여섯살적 일이었고 어려서 글을 배워 문사의 앞날도 기약되더니 일곱살부터 말라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질을 엿볼 수 가 있었다.

16세때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 무리들이 일어나자 부친이 모집한 장병들을 이끌고 나가 그들을 진압했다. 김아려와 결혼 뒤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도마)를 받고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 말과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27세 때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다가 돌아와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하다가 가슴에 끓는 피를 누를 길이 없어 29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이름을 띠고서 무력에 의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었다.

30세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고 회령에서는 일본수비군과도 격전하였다 31세에 노령 카리에서 결사동지 11명과 함께 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했었다. 그러자 이등박문이 러시아 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북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때라 하고 원흉을 없애려 하얼빈에 이르렀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반 군대의 호위 속에 하차하는 이등박문을 단신으로 달려들어 네발의 총탄으로 사살하였다.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외친 다음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 헌병의 손에 태연히 포박되었다가 다시 일본군으로 이송되었다.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다섯 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특히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하는 한편 매양 법정에서 한국의 국토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 등 이등박문의 열 다섯 가지 큰 죄목을 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태도야말로 당당했다.

1910년 2월14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게도 각각 징역이 언도되었다. 거사 후 안중근 의사는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라. 이토오를 죽인 것은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다. 나는 독립군 중장 자격으로 이토오를 살해했다. 나는 대한의 군인이다.고 하고 변호사들에게 독립군 참모 중장으로 결행한 일이니 만국 공법(국제법)에 부쳐달라고 말했다. 검찰관에게 당당하게 이토오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말하여 검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거사 당시 의사의 총탄에 발을 맞고 부상당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는 훗날 다름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당시 사건 현장에서 10여분간 안중근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나서 의연히 서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신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했고 늠름했다. 그같이 훌륭한 인물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안 의사의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일본헌병상사)의 후손들이 지금도 안 의사를 가신(家臣)으로 모시고 매일 기도를 드리는데 이는 지바 상사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한다.

글을 써주겠노라 약속한 안 의사가 사형 집행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태연히 앉아 글을 써주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안 의사 순국 후 관을 만들어 매장해 드리고 그 후 대째 가신으로 제사를 지내온 것이다.

또한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안의사 거사 후 경찰들이 찾아와 괴롭힐 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라고 의연히 항변했으며 그리고 여순 감옥에 수감된 아들 안 의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 최고 지도자 이등박문을 죽인 너를 일본정부가 살려줄리 있겠느냐? 기왕에 죽을 거면 항소하고 상고해서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길 필요 없다. 혹시 늙은 애미를 남겨놓고 맏아들인 네가 먼저 죽는 것이 동양 유교 사상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망설일까봐 일러둔다.

어머니의 절절한 편지를 받고 안 의사는 실제로 항소를 포기했다. 그리고 항소하라는 변호사의 말에 의사는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라 말했다.

의사는 2천만 동포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긴 뒤 새 옷을 갈아입고 여순 감옥 현장에서 조용히 순국하시니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요 나이는 32세라 비록 육신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난 것이다.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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