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중위 美 의회서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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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창호 중위가 한 연설회에서 국군포로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제공>
 


 한국전쟁 이후 아직도 귀향하지 못하고 있는 국군 포로들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기 위해, 오는 4월 22일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귀환한 국군 포로들이 사상 처음으로 미국 연방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된다.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인권단체 ´디펜스 포럼 재단´(회장 수잔 솔티)과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국군포로 송환대책위원회´(위원장 토마스 정) 주최로 한달 뒤 미 의회에서 열리는 증언에서는 지난 1994년 북한을 탈출해 극적으로 남한에 귀환한 국군포로 조창호 예비역 중위와 지난 2000년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국군포로 김창석(가명) 씨가 참석해 북한의 국군포로 실상에 대해 폭로할 예정이다.

한편 워싱턴DC의 자유아시아 방송은 이번 증언을 추진한 디펜스포럼재단과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 등의 대표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다음은 자유아시아방송의 인터뷰 내용이다.

제임스 최<취재부 기자> [email protected]

  ‘디펜스 포럼 재단´의 수잔 솔티(Suzanne Scholte) 대표는 국군포로가 미 의회에서 증언하는 것은 이번이 첫번째로, 이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정권이 국군포로를 얼마나 잔혹하게 대했는지, 그리고 국군포로의 인권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의회 관계자들과 대중들에게 알릴 계획이라고 자유아시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증언에 참석할 초청대상자로는 헨리 하이드(Henry Hyde)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과 한국전 참전 20개국 대사, 그리고 한국전 혹은 주한미군 출신 미 의원들이 될 것이라고 솔티 대표가 말했다.
또 ´국군포로송환대책위원회´의 토마스 정 위원장은 22일 자유아시아 방송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전혀 진전이 없는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 미 의회에서의 국군포로 증언을 추진하게 됐다며, 국군포로 문제는 북한의 인권문제 가운데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사실 북한인권문제 중에서도 가장 급한 것이 국군 포로 문제라고, 전쟁 때 잡혀서 지금 70, 80이 됐는데 다 죽어갑니다. 시간이 급하다. 물론 탈북자도 불쌍하지만 그 사람들은 시간이 있지만 지금 포로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 순간도 죽어가고 있는데, 이 사람들 인권문제는 더 심각하다. 나라를 지키다 끌려가서 평생을 감옥 보다 더한 생활을 하는데 남쪽을 바라보면서 죽을 때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누구를 위해서 싸웠는데”라고 말했다.

또 정 위원장은 특히 북한은 현재 북한 내에 남아있는 국군포로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귀환한 국군 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아직도 북한에는 남한에 오고 싶어 하는 국군 포로들이 생존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북한 내 국군포로 실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북한에 대해 이들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에서 포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북한에서 인간을 어떻게 대우했냐는 문제도 만천하에 알게 하고 따라서 북한이 인권을 무시하고 세계 조약에 위반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지요”라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당시 소위로 참전했다 박격포 공격에 오른쪽 무릎을 다친 예비역 장교이기도 한 토마스 정 위원장은 이번 국군 포로들의 증언을 성사시키기 위해 지난해 11월 직접 한국을 방문, 6명의 귀환 국군 포로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조창호 중위 등 2명은 증언대 앞에서 실상을 전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지만, 대부분의 국군 포로들은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오는 등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고 덧붙였다.

특히 조 중위 등은 의회 증언을 마치고 4월 28일 열리게 될 전 세계 중국 대사관이나 영사관 앞에서 진행될 탈북자 북한 송환 반대 및 북한 자유화 촉구 시위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한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42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귀환했다. 한국의 국방부는 한국 전쟁이 끝나고 아직 송환되지 않는 국군포로를 지난 2004년 기준으로 모두 약 1,5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생존자는 540여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국군 포로 조창호(75) 前 중위는 최근 ‘6·25 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의 명예대표가 됐다. 이 모임은 지난 2월 18일 서울 재향군인회관에서 발족식을 가졌으며, 지금까지 한국에 입국한 국군 포로 자녀 100여명 가운데 30여명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조 씨는 “정부에서 국군 포로 탈북 자녀들을 다른 탈북자들과 똑같이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느꼈다”면서 “나는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만 변변한 직업도 없이 월 35만원의 생계비로 근근이 지내고 있는 이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군 포로 탈북 자녀들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듣고 명예대표직을 흔쾌히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조 씨는 작년 말 서울대 암 센터에서 PET(양전자단층촬영) 검사를 받아본 결과 암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집에서 요양하면서 추가 검진을 앞두고 있다. 조 씨는 “내가 비록 몸은 아프지만 여생을 국군 포로 자녀들을 돕는데 바치겠다”고 말했다.







한쪽 발로 탈북한 국군포로


지난 24일 오후 중국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한 탈북자가 들어갔다. 81세 노인인 그는 한쪽 발을 잘 쓰지 못했다. 그는 “국군 하사 양한섭”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의 인생은 기구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한섭 씨는 광복 이후 전남 방직공장의 롤러 주임이었다. 1949년 결혼해 딸 정심 씨를 뒀다.
6·25 전쟁은 그가 26세 때 터졌다. 처음에는 방위군으로 소집된 그는 1953년 7월 수도사단 소속 하사로 김화 전투에 투입됐다. 전투 중 소대장과 선임하사가 전사하자, 한섭 씨가 소대를 지휘하게 됐다. 그러다 7월 24일 북한군의 총공격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사흘 전의 일이었다.

한섭 씨는 54년 함북 은덕군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다. 국군 지휘관 출신은 처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섭 씨는 일병 출신이라고 속였다. 그로부터 50년, 한섭 씨는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채탄차에 발이 깔려 오른쪽 발가락에서 복숭아뼈 밑부분까지 발의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갔다. 오른쪽 집게손가락도 잘렸다. 목발이 없어 절뚝거리며 탄을 캤다. 그래도 결혼해 4남매를 뒀고, 손주도 5명이나 됐다.

한섭 씨는 1998년 국경 부근 중국 땅에 사는 동포를 통해 자신의 생존 사실을 남한의 동생 양성추(梁成秋·75) 씨에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성추 씨는 곧바로 이를 국방부에 알렸다. 정부는 2001년 4차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에 보낼 200명의 생사 확인자 명단에 한섭 씨 이름을 넣어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측으로부터 “생사확인 불가능”이라는 답변만 들었다. 북의 한섭 씨는 이런 일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섭 씨처럼 북한이 생사확인 불가능이라고 통보했던 국군포로가 귀환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 씨는 1953년 포로로 잡힌 뒤 줄곧 주소지를 옮기지 않고 은덕군에만 살았기 때문에 북한이 성의를 보이기만 했으면 생사확인은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남쪽으로부터 자신에게 아무 연락이 없자 한섭 씨는 탈출을 결심했다. 98년부터 몇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죽더라도 여기서는 아니다”라고 결심한 그는 올해 1월 중순 또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고 나서 옌지(延吉)까지 60㎞를 걸었다. 오른쪽 발이 거의 없는 몸이었다. 혹한이기도 했다. 한섭 씨를 처음 본 조선족 동포는 “송장이 걸어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한다. 한섭 씨는 그 후 납북자 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의 도움으로 지난 24일 옌지에서 동생 성추 씨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54년 만이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한섭 씨는 그날로 베이징 대사관에 들어갔다. 마침 이날은 그의 81회 생일이었다.

불과 3시간 여에 걸친 두 형제의 상봉. 동생 성추 씨는 54년 만에 만난 형을 위해 식사와 맥주를 대접했다. 조촐한 저녁상을 받아 든 한섭 씨는 “내가 태어나서 80평생 이런 성찬은 처음이다. 북한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며 깨끗이 비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중국으로 넘어 올 때 눈에 선한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현재 양 씨는 안정을 취하며 우리 공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한·중 양국 정부의 국내 송환 협의 절차가 마무리되는 4월 중에는 서울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정부 당국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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