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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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년 5월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 극 우파 회
교도 메메트 알리 아그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는 교황 

  2일 오전 11시 37분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5월18일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50㎞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바도비체에서 예비역 육군장교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교황의 본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틸라. `롤렉’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는 크라코 프 신학교 시절을 거쳐 26세때인 46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 으로 있던 78년 10월16일 58세의 나이로 제264대 교황에 선출됐다.

그는 로마 가톨릭 역사상 456년만에 선출된 비이탈리아인인데다 최초의 슬라브 인 교황이어서 일찍이 가톨릭계의 변화를 예고했다.

즉위 27주년째를 맞는 교황은 역대 교황의 평균 재위기간인 7.3년의 4배에 가까 운 금세기 최장수 교황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2천년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상 성베드 로, 비오 6세에 이어 3번째 최장기 재위 교황으로 기록돼 있다.

◇ 시련의 교황 = `신의 운동선수(God’s Athlete)’라는 별명까지 가질 정도로 건강했던 그는 교황 재임 3년만인 지난 1981년 5월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 극 우파 회교도 메메트 알리 아그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며 첫 시련을 겪는다.

총격 후 6시간의 대수술을 받은 뒤 4일만에 의식을 회복한 교황은 “내게 총을 쏜 형제를 위해 기도하자. 나는 이미 진정으로 그를 용서했다”고 말해 전 세계를 감동케 했다.

당시 교황은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고 믿고 세계평화에 헌신하기 로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교황은 96년부터 파킨슨씨 병으로 왼손을 떨며 왼쪽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 외에도 만성적인 무릎 관절염를 앓으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 작, 주위의 도움없이 걸을 수도 없게 됐다.

또 오른쪽 어깨뼈와 대퇴골이 골절된 적 있으며 결장, 담석제거수술, 악성결장 종양, 맹장염 수술과 수차례의 독감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고령과 함께 찾아온 건강 악화는 줄곧 `신의 메신저’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6년 인도 켈커타에서 한 마
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전용 카트를 타고 있다.
<사진 LA Times>

◇ 행동하는 교황 =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전의 교황들이 교권수호에 전념한 것 과는 달리 끊임없이 세계를 누비며 `행동하는 교황’으로 꼽혀왔다.

착좌 이후 지금까지 100여차례 해외 사목방문에 나서 전세계 130여개국을 방문, 400여만명의 신도를 모아 미사를 집전했다. 해외순방 거리만 거의 200만㎞에 달한다.

교황은 조국 폴란드에서 공산치하를 체험한 탓에 공산주의에 완강한 반대입장을 견지하면서 79년 잇따라 조국 폴란드를 방문, 바웬사 등 당시 자유노조에 대한 지지 를 표명함으로써 동구권 해체에 기여했다.

또한 89년 당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접견, 냉전종식에 힘을 실어주는 등 20세기 후반 이념붕괴의 격동 속에서 정치적 좌표를 설정해주기도 했다.

한국에는 84년과 89년 두차례 방문했고 84년 방한때는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식 을 가진 바 있다. 특히 신앙의 차이를 뛰어넘어 `생명의 가치’와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9 억 가톨릭신자는 물론 전세계인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유엔인구개발회의의 낙태 허용안 채택을 끝까지 저지할 정도로 신념이 뚜 렷하면서도 관용과 타협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 인류의 정신적 지주 = 교황은 다른 종교에도 `진리의 씨앗’이 있음을 선언해 종교간 갈등을 줄이는 데 힘쓰면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등 보수적 로마 가톨릭 교의 개혁에도 앞장섰다.

특히 초교파적 세계교회주의를 확산시키는데에도 열성적이어서 그는 로마시내의 한 유대교회당에서 기도한, 그리고 세계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재한 첫 로 마교황으로 역대 어느 교황보다 유대교와의 관계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교황은 400년 전 가톨릭이 개신교를 탄압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 과하고 단교상태에 있던 북유럽 루터교 국가들과 관계를 회복하기도 했으며 해방신 학의 발상지인 중남미도 방문했다.

지난 97년엔 미국의 반대를 뿌리치고 쿠바를 방문, 가톨릭과 쿠바의 불편한 관 계를 해소하기도 했으며 루마니아, 러시아 등 동유럽도 자주 방문, 그리스정교회를 비롯한 동방교회들과 일치를 꾀하고 있다.

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비난이 잘못됐음을 인정했으며 “진화론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라면서 과학과 신앙의 화해를 촉구하기도 했다.

나치치하 때 유대인들의 학살에 가톨릭이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살을 방임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타임지는 “2천년 교황청 역사 중 그만큼 강력한 목소리를 낸 교황은 없었으며 도덕가치가 실추된 요즘 세태에서 선한 인생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세계가 이를 따르 도록 했다”고 교황의 업적을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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