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의거 45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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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비원 지안스님의 쓴소리 단소리 철학칼럼 
 ⓒ2005 Sundayjournalusa


45년전 4월19일(1960년) 광화문 거리를 피로 물들인 날. 한국민주주의의 초석을 만든 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민주주의교육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어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켰다.

또한 6·25 이후 진전된 도시화와 산업화는 민주주의이념을 더욱 빠르게 보급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여 4·19가 일어날 즘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높았고 이를 추구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이런 국민의 의식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정당무용론을 주장하던 이승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도구로 51년 자유당을 창설하고 자유당은 집권여당이 되었다. 1948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1인1당에 의한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정권교체를 목표로 성장해 온 야당과 여당의 부정사건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1956년 선거에서 자유당의 대통령후보로 이승만, 민주당 신익희, 부통령에는 이기붕과 장면이 출마했으니 선거를 10일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가 갑자기 죽자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60년 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간 사이에 정부는 2월1일부터 선거유세기간으로 정하고 3월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2월15일 조병옥이 심장병으로 죽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졌다. 자유당의 관심은 부통령선거에 집중되었다. 부통령이 중요시된 것은 고령인 대통령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 부통령이고 다음 대통령에는 현직 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거유세기간인 2월28일 대구에서는 관제데모에 동원되어 오던 학생들이 시위를 하였다. 시위의 원인은 민주당 강연회 참석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를 강요한 데 있었다. 이날 1800여 명이 학원자유화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 등을 내세웠다.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이 는 전국적으로 시위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3월8일 대전에서 시위학생과 경찰이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선거일인 3월15일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 및 개표가 실시되었다.

이날 자유당과 반공청년단에 의한 부정선거는 극에 달하여 민주당 선거참관인이 반공청년단에게 구타당하거나 투표소에서 쫓겨나고 사전대리투표·무더기투표 및 3인조·5인조 등 조직투표에 의해 자유당 지지표가 유권자 총수보다 많이 나오는 결과가 빚어졌다.

마산시 민주당원들이 3·15선거의 부정을 폭로하며 저녁 7시30분경 1000여 명의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이때 정전이 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마산은 타 지역과 통신이 두절되고 경찰은 이날 사건이 공산당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조작하였다. 이승만은 마산사건을 난동으로 규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4월11일 마산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눈에서 뒷머리까지 20㎝ 정도의 대무장폭도용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2만여 명이 경찰의 잔혹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였다.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19일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연합시위대가 시위를 시작하자 오후부터 경찰의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면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정부는 5시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하여 시위대와 동조자의 구분 없이 무차별진압을 감행하였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탈취한 총으로 경찰에 발포함으로써 평화적인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했다.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21일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4월22일 시국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을 해임하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시위는 계엄령으로 위축되었던 시민을 다시 시위에 끌어들였고 미국은 아이젠하워대통령의 한국 방문 취소와 원조 중지 등으로 이승만에게 경고하였다. 4월26일 시위군중이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며 광화문으로 행진하였다. 11시경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퇴와 정·부통령 선거의 재실시 를 발표하였다.

4월27일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수리되면서 허정이 권한대행이 되었다.
4월28일 과도국무위원회가 조직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 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6월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로 7월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이 압승하였다.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정권 퇴진 후 허정 과도정부는 처음에 표명했듯이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경제 건설과 군부의 정화 등 그동안 누적되어 온 문제의 해결, 부정축재자의 처리, 부정선거 관련자의 처벌 등에 대한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접근은 혁명세력은 물론 혁명에 동조·참가하였던 시민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혁명세력들은 혁명의 완수를 위한 항의와 시위를 시작하였다.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제정된 특별법은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정부 내부의 분열, 정부와 국민 사이의 의식의 불일치 등은 사회혼란을 가중시켜 결국 군부에 의한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여 사회 민주주의 실천을 목표로 일어났던 4·19는 사회질서 회복과 정부의 통치력 확보의 명분으로 일어난 5·16으로 중단되고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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