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사건 마지막 篇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 뉴스를 공유하기














 ▲ 최추봉 재미 육사 총동창회장(예비역 대령)의 제주 4.3 사건 편이 이어집니다.

 ⓒ2005 Sundayjournalusa

한반도의 휴전선이 불안한 상태에서 현 노무현 정권의 안보태세가 위기를 맡고 있다. 북한을 주적에서 제외시킨 현 정권의 국방태세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최추봉(예비역 대령) 재미육사총동창회장이 입을 열었다. 지난해 휴전선 최전방 철책 절단 사건에 대한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증폭되어 야당에서는 국정조사까지 벌이겠다며 압박하고, 국민적 불신에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당국은 의혹을 풀 만한 조사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월북자의 신원이라도 파악되면 의혹이 풀리겠지만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어 고민스럽다”고 토로할 정도다. 월북자를 단순히 민간인으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만큼 해당 부대 전역자 등을 상대로 군과 경찰, 민간 전문가까지 총동원해 조사를 하고 있지만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윤광웅 국방장관도 “철책이 뚫린 것을 (나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할 정도다.

국방부와 국정원 기무사 등의 합동조사와 유엔사의 별도조사에서도 ‘남쪽에서 월북’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누가? 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부는 “민간인이 월북했다”는 발표를 내놓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정부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와 관련 최추봉 회장은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사건의 감춰진 사실을 공개하면서 오늘의 안보대세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다음호에서는 ‘제주도 4.3 사건’편이 시작된다.                                

<정리- 성 진 기자>


북한측의 ‘청와대 기습사건’이 있기 1년 전인 1967년 12월 10일에 있었던 원주 “전국 대간첩대책 치안관회의”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이유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제치고 윤필용 보안사령관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그 일로 우리 중정은 막강한 권력이 땅에 떨어졌다. 그 대신 보안사가 또 다른 권력체로 등장한 것이다. 도대체 ‘대 간첩작전통제권한’이 무엇이길래 김형욱과 윤필용이 서로 다투었는가.

이 같은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분위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청와대 기습사건’이 일어난 1968년 전후로는 무장 간첩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침투하여 전체 군부대는 간첩 색출작전에 투입되어 쉬는 날이 없었다. 무장 괴한들이 동부에서 나타났는가 하면 중부에서도 나타나고, 좀 잔잔해지는가 하면 서해와 남해에서 공작선이 출몰하고, 동해로는 잠수정까지 몰고 왔다.

이 같은 무장 간첩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침투해 들어오곤 하니 여기저기 공비출몰 지역에 대한 수색작전으로 군의 인적, 물적, 시간적, 재정적 손실은 막대했다. 또한 지역에 대한 수색작전으로 지역주민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불편을 겪어야 했고 불안이 가실 날이 없었다. 모든 안보가 마치 간첩 잡는 일 같았다.

내가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 경기도 지부장으로 부임했던 1967년대 당시만해도 북한 간첩들이 매달 한 두 차례씩 그믐밤을 이용하여 소위 “연습작전”이라고 하여 특별한 임무도 없이 그야말로 <침투훈련>을 위해 강화, 김포 지역으로 상륙해서 한, 두 시간 머물다가 돌아갈 정도로 북한 공작원과 간첩들이 제집 드나들 듯 빈번히 오고 갔던 것이다. 때로는 야음을 타고 침투하여 포섭된 주민을 데리고 가서 교양시켜서 다시 돌려 보내기도 하고 남한에 잠입해 있는 고정간첩에게 암호 난수표 등을 전달하거나 새로운 지령문 등을 약속돼 있는 비밀장소에 묻어두고 철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간첩색출 성공의 중요한 요건은 현지 주민의 정보 제공인데 그 지역 주민들이 비협조적일 때에는 침투간첩  체포는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주민들의 신고가 한 두 시간만 늦게 접수되어도 간첩들은 고도로 훈련된 자들이라 현지 지역을 이미 빠져나가 서울 시내로 숨어 들기도 하고 목적하는 타 지역으로 침투해버리기 때문에 주민들의 지체 없는 신고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특별히 대 간첩작전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기관의 정보관들의 신속한 회동과 정보자료의 공유 및 통합이다.

그 당시 무장 간첩들이 하도 많이 침투하고 있을 때 여서 간첩을 체포한 부대나 개인을 포상하고 특별한 공로자에게는 진급 시키는 등의 특전제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공로를 세우면 빛도 못 보는 고된 대 간첩부대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으로 공명심과 경쟁적 사고에 빠져서 자신의 부대가 간첩을 먼저 잡으려고 정보를 내놓지 않음으로써 공동작전을 저해하여 적시에 색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마는 일이 허다하게 있었다.

















 

간첩통제권이 권력


“간첩출현 정보”가 전달되면 현지에는 관계기관 정보요원들이 정보자료를 얻고자 달려 나오고 거기다가 각 언론기관 취재진들이 몰려와 취재 활동 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혼잡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현지 군부대의 부대장이 작전참모와 정보참모를 대동하고 나타나고, 그 지역 방첩(CIC)대장과 요원들, 미 2사단 정보장교와 미CIC, 군사령부 정보장교, 군단과 사단정보장교, 관할 경찰국과 현지 경찰수사와 직원들, 지역 검찰지청 정보요원도 나타난다.

그리고 각 신문 방송사 기자들까지 모여 많을 때에는 수십여명이 간첩 잡는 현장에 바글바글 모여 들었으니 이것도 통제하여야 했다. 또한 각 정보요원들의 입수한 첩보들을 있는 그대로 제공받아서 정보화하여 지역 통제관의 판단과 결심에 따라 협동작전을 전개하도록 조정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 간첩대책과 작전상의 통제기능이며, 그 통제권 최고책임자가 중앙 정보부장이었고, 따라서 각 도에도 그 지역 중앙정보부 도 지부장이 현지에 임하여 각 정보기관 요원들을 소집하여 통제부를 설치하고 정보를 종합 시켜 분석하며 협동작전을 유도해주는 통제관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 간첩작전통제 권한과 임무를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 중정 부장 손에서 빼앗아 보안사령부 관장으로 넘겨주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중앙정보부의 통제기능을 정지시켰던 것이니 중앙정보부로서는 그 통제기능으로 지역 내 각 군과 기관을 조정할 수 있었던 권리를 잃게 됨으로써 김형욱 부장으로서는 대통령과 윤필용에게 삭힐 수 없는 앙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대통령훈령 제18호가 발효되어 중앙정보부가 맡아왔던 정부 각 기관과 기업체에 대한 조정기능마저도 CIC에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대공사찰과 정보수집 및 국가적 기업업무의 조정이란 구실 하에 중정 요원이 각 기관과 기업체에 출입하고 있었는데, 어떤 곳에는 아예 사무실을 차리고 상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정기능이 기관과 기업에 기여한 점도 있었으나 폐단 또한 큰 점도 있었으리라. 다만, 그 공과(功過)는 사가(史家)와 연구기관에 미루고 여기서는 그 막중했던 중앙정보부의 대정부, 대민(對民) 조정업무와 권한이 대통령의 원주발언 ‘대통령 훈령 18호’로 중정의 권세가 사라짐으로써 김형욱 부장의 윤필용 사령관에 대한 원한이 깊어져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 각 기관과 민간 대기업에는 CIC 요원들이 상근하거나 출입하면서 사찰업무를 개시했으니, 우리나라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군인들이 공공연히 정부부처와 민간기업체에 상주하면서 “대공조정업무”를 했다는 아름답지 못한 역사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군의 민간사찰길 열려
 
이렇게 하여 하루아침에 대정부, 대기업조정 업무를 물려 받은 보안사령부에서는 늘어난 근무처의 요원 충당을 위해 갓 훈련 받은 신병들을 대거 충원 받아 정부기관과 대기업체에 투입하였으니, 젊은 홍안의 병사들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각 기관에 출입하는 광경을 보는 국민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김형욱의 성격상  대 간첩통제권을 상실한 틈에 북한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언저리까지 침투하는 것을 책임자인 윤필용이 몰랐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군부대들이 침투를 모르고 오직 자신의 휘하 인 내가  ‘무장공비 출현’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아마도 김형욱은 “각하, 보십시오. 대 간첩작전은 역시 중정이 맡아야 합니다”라고 소리 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형욱은 나에게 ‘무장공비 출현’을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 훈령 18호’로 김형욱을 제친 것은 대통령 특유의 통치 스타일인 ‘견제론’의 일환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통치 스타일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김형욱은 ‘못된 개가 주인을 물듯’ 해외로 망명해 ‘독재타도’라는 명분으로 ‘청문회 증언’이나 ‘회고록 발행’ 등등을 하다가 끝내 미스테리한 죽음으로 아직까지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소위 ‘김신조 일당 청와대 기습 사건’은 당시 서울 시민은 물론 전국민을 경악케 했으며 한편, 우리 국방정책과 대북 군사대비태세를 다시 검토하고 점검해보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건의 발단은 1968년 1월21일 밤 10시경, 31명의 북괴 무장게릴라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하였다. 이들은 북한군이 1967년 4월 창설한 민족 보위성 정찰국 직속 124군 부대의 습격·파괴·살상 전문 특수교육을 받은 요원들로서 31명 전원 25세 전후의 함경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남파 직전까지 황해도 사리원에 청와대 모형을 만들어 놓고 예행연습을 해왔으며 남파 시엔 개인별로 기관단총, 권총, 대전차수류탄 및 방어용 수류탄 등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당시 경제개발에 총 매진하던 우리에게 대북 경각심을 제고한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대통령특사가 내한하여 한·미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정부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향토예비군을 창설(68년 4월1일)했다.

또한 그 해  5월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국방력 강화와 극동에서의 자유진영 방위문제’를 주제로 제1차 `한·미 연례안보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방위산업육성, 한국군의 현대화, 자주국방태세에 대한 전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그 일환에 의하여 대비 정규전 전담부대 편성, 해안경찰의 전투경찰화, 해안초소 통신설비 보강, 철책선 설치, 팬텀전투기 인수, 미 공군력 증원 등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21청와대기습사태는 우리의 방위태세와 자주국방의 내실화를 촉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 제고로 간첩신고 정신이 고양되었으며 강력한 군사력만이 북한의 재도발을 막는 길임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8년이 되었지만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이란 기본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치도 변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유비무환,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다음호는 ‘제주도 4.3 사건’편)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