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도 4·3 사건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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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Sundayjournalusa

‘제주도 4.3 사건’이 최근 한국에서 ‘과거사’ 및  ‘의문사건’으로 재조명 되고 있다. 이 사건은 분명히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사건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제주도에서 사과 성명 때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1일 기점으로 해서 1948년 4월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다”고 말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4.3사건이 공산 프락치들의 난동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마구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최근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다. 소위 ‘4.3사건’의 폭도들의 유족들은 “피해자들이 민주화를 위한 희생자”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 왜곡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제주4.3 사건’의 피해자들은 당시 이승만 정권이 미군정과 공모에 의한 것이라며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로 몰아 갔다.  DJ는 이 같은 주장에 편승했다. 현정권에서도 이 제주 4.3 사건을 조사하면서 객관적 시각보다는 일부 피해자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분위기로 몰아 가고 있다. 그래서 “민주화”라는 단어는 요즈음에 좌파들이 애용하고 있다. 심지어 남파 간첩들까지 “민주투사”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번 호 부터는 최추봉 재미육사총동창회장의 ‘제주도 4.3 사건’의 진상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정리-성진 기자]


나는 ‘제주 4.3 사건’ 일차 진압된 후 제주도에 위술 사령부 부관으로 파견됐다. 57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는 그 때의 폭도들의  악랄한 행위를 잊을 수가 없다. 빨갱이들은 극악무도하다는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 없다. 1948년 제주도에 파견된 우리의 ‘서울유격대’는 현지에서 선무공작과 함께 토벌임무를 마무리 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 당시 나는 토벌작전에서 생포된 공산 프락치들의 심문을 담당했다. 의무관을 대동하고 포로들이 수용된 장소에 나가 하나하나 심문을 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불려 나온 포로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혁명군인데 어떻게 미제 앞잡이들에게 심문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불응했다. 그 뿐 아니라 이들 대부분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항거했다. 포로들 중에는 부상 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의무관이 진찰을 하려면 앙탈을 부리면서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포로들 중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민간인을 살해한 사람들은 군법재판을 거처 사형에 처하게 됐다. 그 이외 많은 포로들 중 전향을 하거나 가족들의 진정이 있는 사람들은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사형을 면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사형집행에도 참석했다.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의 99%는 모두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극히 일부만이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당시 군에서는 사형집행을 당한 시신을 유가족에게 넘기지 않고 매장한 경우가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미 사형집행을 당한 시신에게 유가족이 있다면 그들에게 통보를 해주는 것이 도의적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 제주도 4.3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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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은 북한의 지령공작
 
‘제주도 4.3 사건’은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과 이에 편승한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사건이다. 그 당시의 제주도의 치안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사건의 진실을 볼 수가 없다.

당시에는 남한 각 기관 단체와 군부대에 많은 공산 프락치들이 침투해 있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이용한 좌익계 시가행진이 폭력시위 난동으로 돌변하여 질서를 잡으려던 경찰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나라 곳곳에는 매 국경일 행사마다 좌우익 단체들이 갈라져서 따로 행사를 치르는 와중에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수가 빈번했었다.

여기에는 주로 북한에서 공산당 학정에 시달리다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사상으로 뭉친 우익단체와 한편에는 남로당원과 침투한 북한공작원 등 좌익 사람들이 반미 친소노선의 단체를 조직하여 대규모 폭동성 시위를 함으로써 우익단체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서울은 날만 샜다하면 좌우익 투쟁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제주의 3.1절 행사도 이와 같이 좌우익의 군중들이 충돌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요사태로 번지게 되자 경찰이 진압과정에서 발포하게 되어 좌익계 시위자 10명이 죽고 8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빌미로 공산주의자들은 ‘제주총파업위원회’를 결성해 발포경찰 처단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면서 총파업을 단행하는 한편 매일 같이 폭력 시위를 벌였다.


공비토벌부대가 반란군으로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역사적 5.10 선거의 투표일이 임박해지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를 벌리라는 북한으로부터의 지령에 따라 총선반대를 명분으로 삼고 대규모 과격 시위가 발생했다. 급기야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은 군중들이 미약했던 경찰을 무력화 시키면서 폭동으로 돌변하여 순식간에 화북, 성산, 남원, 한림, 애월 등에 있는 75개 경찰지서와 제주 경찰청 산하 경찰서 등을 습격하여 소각하고 초등학교 등 공공기관 건물을 파괴하고 각 투표소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4.3 사건이다.

폭도들이 경찰과 공무원들을 무차별 살해하며 제주도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자 재정비에 나선 군경에게 쫓기어 한라산 아지트로 잡입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됐다.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은 1949년 5월에 가서 대략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폭도 사살 약 8천명, 포로 약 7천명, 귀순 약 2천명, 군경 전사자 약 400명, 부상자 약 8백 명, 이재민 약 9만 명 그리고 토벌대 포함 민간인 사상자가 약 3만 명 정도에 이르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 4.3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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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4.3사건 당시 제주도에서 창설 중이던 국군 제 11연대와 폭동 진압차 출동한 5연대 내에서도 공산 프락치가 다수 침투해 있었다. 이들 프락치들은 군부대가 빨갱이들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기도 하고, 폭도들에게 은밀히 무기와 탄약들을 넘겨주는 악질적 행위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무기와 탄약을 빼돌려 내가던 제5연대 4중대장은 한 장교에게 발각되어 군법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남로당원 프락치로서 중대장이었던 문길상 중위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 사병이 제11연대에 새로 부임한 연대장 박진경 중령 환영회에 뛰어 들어 연대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대대장 오일균 소령도 남로당원으로 공산 폭도들과 내통하다가 체포되어 군법재판에 회부되는 등 충격적인 군부대내의 반란사건이 연발했었다.

그러자 부대내의 공산분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강화되니 침투해있던  공산계열의 군인들이 단독으로 또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잡입하여 폭도들과 합류하여 군경 진압부대와 관공서를 공격하며 파괴와 살상하기를 그칠 줄 몰랐다. 이 같은 엄청난 제주 4.3폭동 사태는 지역내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소요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평양의 소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박병률과 이승엽이 이 사건을 계획하고 총지휘한 것으로 잘 알려진 사건이다. 이승엽은 박헌영 뒤의 남로당 총책으로 1949년 봄에 월북해 강동정치학원의 남한 정치현황관계 특별강사로 활동하다가 6.25 당시 서울에 들어와 서울시 인민위원장을 했던 거물간첩이었다.

박헌영은 대구에 잠입하여 대구폭동을 계획 지휘하고 제주도에서는 김달삼 등이 현장에서 직접 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아직도 그 악명이 기억되고 있는 이주하, 김삼용, 정재식, 이현상, 이인모(6.25때 문화정치장교 대위로 내려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93년 미전향장기수 북송때 북으로 송환) 등 거물간첩 또는 공작원들이 남한 도처에서 반란과 폭동을 통해 남한을 전복시키고 공산주의로 통일하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통해 한국 국민의 반공사상이 강화되어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김일성이 남한봉기 기대


후일 김일성은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0년 12월 4일 제2기 제3차 중앙위원회와 1961년 11월 1-4일의 제4차 중앙위원회의 중간에 발표한 1961년 8월 31일자의 “미해방지구에서의 당의 조직과 공작에 대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에 모든 것이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소련에도 보고한 문건으로서 남침전쟁의 과정을 과대평가한 반면 남한에서의 민중조직과 공작의 실패를 자인하고 특히 제주도에서의 반란성 폭력조직과 활동도 상부조직과의 연결의 부족 등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 문서들은 미해방지구 즉 남한을 5개 지구로 분담하여 지하당 조직을 강화하고 인민들의 협력을 최대한 얻어서 동원할 수 있도록 공작하여야 할 문제들을 강력히 제기한 문서이다.

제주 4.3 사건 전후로 계속되는 군내부의 반란과 민간에서의 폭동사건은 거의가 다 공산주의자들과 대남공작차 남파된 간첩들의 선동과 조직적 폭력행위에 의해 야기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 같은 반란과 폭동에 주동하거나 동조하는 세력의 무리들이 엄청나게 많았으며 대체로 진압되고 체포, 수감되어 평정상황에 들었다고 했지만 많은 극렬 분자들이 지하로 숨어 들고 산악지대로 피신하여 재기를 노렸던 것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 동기는 어떻든 간에 대구 10.1 폭동에서 제주 4.3 사건으로 이어지고 또 여수, 순천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이어진 공산반란사건은  곧 북한의 6.25남침으로 연결된 것이다.
소련의 공산체제가 해체된 뒤에 모스크바의 외교문서 보관소에서 한국전을 전후한 비밀문서가 공개된 바 있다. 그 중에는 김일성이 1948년 9월 9일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6개월이 채 안된 1949년 2월 22일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하여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계획을 승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 문서에는 스탈린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만류한 사실이 대화록에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첫째로 남침을 감행했을 때 미군이 즉각  개입할 것을 우려했고, 둘째로 남침을 개시했을 때 남조선 인민이 호응을 않하고 반대할 것이며, 셋째로 북조선의 군비가 아직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수준이 못된다는 것, 넷째로 소련이 종전 후 복구사업이 진행 중이고 중국이 아직 내전 중이라는 것 등을 들어 김일성의 전쟁 개시를 반대하였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여간 김일성은 자신을 단장으로 하고 부수상겸 외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사업상 장시우, 교육상 백남준, 체신상 김정우 등 7인의 소위 북조선 대표단과 기타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는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스탈린을 비롯해 부수상 모로토프, 미코얀, 외상 비진스키, 대외무역상 멘시코푸 등과 연쇄회담을 가졌으며 전쟁계획을 허가 받기 위해 약 1개월간 모스크바에 체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허가하지 않았다.

그 후 김일성은 스탈린은 재차 찾아가 경제원조 4억 루불과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면 “조국통일전쟁”은 성공할 수 있다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더욱이 스탈린이 의문을 제기했던  미군의 개입문제에 대해서 김일성은 이미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 했음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다시 개입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스탈린의 또 하나의 의문점이었던 전쟁 발발 시 남조선 인민들의 반감문제에 대하여 김일성은 이미 남조선에서 여러 차례의 혁명적 투쟁을 경험한바 미군정과 남조선 봉건세력에 대한 인민들의 반감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어 전쟁만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들이 먼저 혁명에 동참할 것이 확실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남조선에서 혁명활동을 하다 월북해 부수상에 올라서 김일성을 수행한 남로당 총책 박헌영에게 “동무는 남조선에서 활동했으니 그곳 동향을 말해보시오”라고  명령했다. 이에 박헌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조직인 남로당원과 빨치산 동지들이 족히 30만명에 이르고 있어 전쟁만 개시되면 이들 정예 열성 동지들이 남조선 도처의 군사, 행정을 선제 접수할 준비가 되여 있습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박헌영의 이 같은 말에 스탈린의 남침반대 의사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확실한 남침 승낙의 언질은 주지않고 다만 중국의 마오쩌뚱 동지와 잘 의논해보라”는 묵시적 지침을 주었다. 그러나 김일성과 스탈린은 3월 5일부터 단독 비밀회담을 시작하여 3월 17일에는 드디어  소련이 북조선의 전력증강을 돕고 북한군 장교들을 소련에서 훈련시켜 주며 경제원조로 4억 루불의 무상지원이라는 3가지 협약을 얻어 내는 데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김일성의 주도면밀한 남침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사전에 남한 인민의 봉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남한내의 취약지구에 대한 공산 주의자들의 준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주도가 바로 그런 지역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섬 지역이라 중앙의 영향력이 자연 미약해 공산 푸락치들의 침투지역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제주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어 자연 주민들의 불만이 잠재되어 있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 잘 먹혀 들어 가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남로당이 제주도를 자신들의 계획지구로 표적을 삼았다. 그래서 D-데이로 잡은 날이 1948년 4월 3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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