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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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이은 연속 4>
일제는 홍구공원 의거 직후 백범의 몸값을 3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리는 등 백범 체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시 비취 목사 댁에 몸을 숨겨 있던 백범은 가흥의 피신을 시작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도 상해를 떠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1940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같이 중경에 도착하여 전시체제로 재정비되었다. 임시정부가 이와 같은 전시 중 장정하던 동안에 백범이 벌인 여러 활동 중에서도 감격적인 일은 스스로 “대가족” 이라 칭하던 100여명이 넘는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안전 수송과 생계대책에 대한 헌신이었다.
온갖 방책을 다 동원하여 중국 정부의 후원을 얻어내는 한편 가족들의 상호 협조와 자활을 유도하여 마침내 중경에까지 무사히 옮겨놓고 토교 봉취 지역에 한 지단까지 마련하여 집을 짓고 그들을 안주케 한 일이다. “대가족”에 대한 정성은 상해 탈출시 미처 연락이 되지 못해 낙오되었던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를 모셔오고자 두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때 거금을 들여 파견하였던 안공근에게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유기함은 군의 가도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불인한 처사”라고 크게 질책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백범은 이 파천 중 많은 가족을 잃었다. 독립운동의 원훈이며 그가 가장 경모하던 이동녕이 71세로 진강에서 작고하여 그곳에 안장하였고 중경 당도 직후에는 그의 모친 곽대부인이 하세하였다. 백범은 망명초 국무총리 이동휘를 만나 공산주의 이념과 노선의 수용을 권유받았으나 그를 거절하였다.

그 후 세차게 밀어닥친 새로 풍미하던 여러 이념과 사상의 갈등 속에서도 끝내 그는 지론인 민족주의 이념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활동은 민족주의 구현의 테두리 속에서 공산, 사회주의 및 그 밖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합작과 협동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를 위하여 상해 시절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봉준 등과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조선혁명당 및 한국독립당과의 3당 통합논의를 벌였고 1920연대 후반기에는 다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도 그는 한국독립당을 이끌고 의열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미주독립당 등과 5당의 통합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대 중경 시절에는 다시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어 5당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국무위원과 윤회 주석제를 폐지하고 임시정부를 내외에 대표하는 주석과 그를 보좌하는 부주석제를 채택하여 백범이 주석에 그리고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나아가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조완구 차이석 장건상 박찬익 조소앙 함주식 김붕준 유림 김원봉 김성숙 조경한 등 좌우를 망라한 14인으로 강력한 국무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백범은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면서 연래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 그리고 황학수를 서안의 전방사령관에 선임, 항전을 시작하였다. 처음 30여명의 인원으로 미주 교포의 성금을 바탕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김원봉이 지휘하던 조선 의용대까지 통합하면서 병력을 증강, 1945년 8월 해방전후에는 700여명 내외의 임시정부 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은 OSS훈련이라 칭하는 미군과의 합작 특수공작 훈련도 받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대전에 참전, 본토 수복을 위한 국내 정진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한편, 백범 주도하의 임시정부는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마련, 임시의정원의 심의를 거쳐 확정 공포하였다.
이 건국강령은 임시정부의 정치 이념과 건국방략을 결집한 것으로, 임시정부는 이 강령에 따라 전시체제를 확립하면서 광복군을 통한 대일 항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조국해방을 목전에 두고서 광복방략과 경륜을 보다 체계화하면서 복국과 광복에 대한 비전과 규범을 제시하려 하였다. 백범이하 임시정부 요인은 그 해 11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중국 군용기 편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중경을 이륙하였다.
이 환국의 비행은 바로 임시정부의 금의환국이었으나 상해에서 미국기로 옮겨 타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시되고 임정 요인들은 조국을 잃었던 망명객의 개인 자격 환국이라 지칭되었다.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임시 정부의 제 1진으로 환국하였다. 백범과 함께 환국한 이는 모두 15인이었다. 제2진 19인 12월2일에 환국하였다. 백범은 도착 이튿날 방송에서 미군정 측의 요구로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27년간의 독립운동자로서 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하였다. 그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5연속-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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