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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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도록 애쓰시고 두 동강이 난 우리의 대한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우리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총탄에 비명에 가신지 56주년이 된다.

백범 김구(1876-1949)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 독립운동가요, 해방된 조국을 민족 통일 민주 문화의 바탕 위에서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족의 큰 스승이시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 의 후예이며 문파의 시조 익원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전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 김자점의 역모 사건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 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 후에 양반의 문화생활은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둔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같은 형편에서 이웃 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은 4형제 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 자를 돕고 자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낙원)로 l4의 나이에 열살 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때 난산 끝에 백범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하여 무료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 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버린 여성답지 않은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며, 백범이 일지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 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 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서 간도 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들에게 시해 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 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는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2 연속-


<자비원 지안 스님  213-268-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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