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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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에 이은 연속 5주>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하여 자리잡은 경교장에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인사 행렬이 줄을 이었고 12월1일에는 오세창 권동진 이인 등이 주선한 임시 정부 환국 봉영회가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고 제2진이 돌아온 뒤인 12월 13일에는 김석황 안재홍 홍명희 등이 앞장선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국민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김구 주석이 귀국할 당시의 정국은 대단히 착잡하였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출범한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안재홍이 탈퇴한 후 인민 공화국을 설립했는데 그것은 좌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미군정청에 등록한 정당이 205개나 되어 10월 5일부터는 주요 정당대표들이 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때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좌우 정당의 연합체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친일파까지 포함한 단합 방침으로 독립 운동자를 실망시켜 그의 정당 통합의 초당적 위치는 흔들리고 말았다. 11월 16일에 조선 공산당이 탈퇴하면서 20일 인민 공화국 산하에 전국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립했던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때에 임시 정부 주석 김구가 환국한 것이다. 수백 개로 난립한 정당 좌우와 중립으로 노선이 분화된 정국의 수습은 이제 임시 정부가 떠맡게 되었다. 임시 정부는 중경에서 통일 전선 형성에 성공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9월 3일에는 1940년에 공표한 건국강령에 입각하여 당면 과제를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임시 정부는 귀국하여 과도 정부를 세우고 해체한 후 과도 정부가 정식 정부를 건립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12월 19일 임시 정부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백범은 답사에서 “임시 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에 입각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친일파 민족반도를 제외한 우리 동포는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이 있은 후에야 우리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좌파가 계급 국가를 지향했다면 백범은 모든 계급의 공동 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단결을 지향했다면 백범은 친일파를 숙청한 단결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환영대회가 끝나고 백범이 민족 세력의 총집결체로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을 준비하자 정가의 주목을 한 몸에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과는 달랐다. 좌파의 인민 공화국은 임시 정부와 대등한 정부적 존재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 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 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백범이 중경에서 계획한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도 쉬울 수 없었다. 그럴 때 1943년부터 걱정되던 신탁 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12월 28일의 일이었다.

5년간의 신탁 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 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 결의를 하고 각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 운동을 새로운 독립 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정치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반탁 위원회는 권동진 안재홍의 이름으로 조직하여 31일에는 백범이 선두에 선 시민 대회를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하는 한편, 임시 정부에서는 같은 날 국자 제1호를 선포하여 전국의 행정과 경찰 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국자 제2호로써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주권행사를 선언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은 분명히 자주 독립의 적극적인 표현이었으나 미군정으로 보면 반탁 정변이었다. 혹은 반쿠테타라고도 한다. 미군 점령하니까 반탁 쿠테타이기는 해도 외세를 배격하는 백범의 투철한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역사적사건이었다.

백범이 선봉에 선 전국적인 반탁 열기와 반탁 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 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부터 신탁 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었지만 백범의 임시 정부가 주권 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군전청 하지 장군은 임정 요인을 감금 추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긴장이 극도에 오른 새해 1월 1일 반도호텔에서 김구, 하지회담이 열려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평화적 반탁 운동의 전개로 합의한 것이다. 반탁 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 것은 임시 정부가 주권 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 공화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음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님 6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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