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의 손예진은 2005년판 ‘자유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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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부인> 포스터

바람난 아낙네의 원조 <자유부인>

바람난 아낙네의 원조는 정비석 원작의 <자유부인>(한형모 감독, 1956)이다. 이 작품은 소설만으로도 발표 당시 큰 이슈가 되었다. 교수 사모님의 바람난 애정 행각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교수 사모님이 뭇 남성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용납이 어려웠던 그 시절. 영화는 그런 사회상을 반영하듯 주인공이 사랑과 가정,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스크린에선 유교적 가부장제에 대한 균열이 조금씩 일기 시작한다.

이후 한국영화의 쇠퇴기라 불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에서 여성은 이전 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그러나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의 불륜이란 느슨해진 가족 관계에 팽팽한 긴장감을 넣어주는 무엇이거나,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류의 기존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 영화에서 여성의 불륜은 남성들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사>, 그들은 왜 만날 수밖에 없었나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불륜의 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단계(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망)를 넘어, 산업사회에서 의사소통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의 사회적인 상처를 읽어내게 된 것이다.

1998년 발표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정사>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중년의 부인 서현(이미숙)과 여동생의 남자친구인 우인(이정재)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매끈한 무채색의 세트와 세련된 영상 속에서 영화의 초점은 ‘이들의 잘못된 만남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보다 ‘이들이 왜 만날 수밖에 없었나’에 모아진다. 때문에 영화는, 여성의 바람을 다룬 이전의 영화들이 대부분 사건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반해 인물의 감정선을 타고 진행된다.
















 
<정사>의 오락실 정사 장면.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화석처럼 살던 서현. 그녀 앞에 다가온 젊은 남자 우인은 위협적인 동시에 매력적이다. 결국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기존의 금기를 무참히 깨버린다. 이를테면 시댁의 제삿날 욕구를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우인과 오락실에서 갖는 관계라든가, 아이의 운동회 날 아들을 외면하고 과학실에서 갖는 관계 등은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와 모성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지금껏 지녀왔던 윤리적, 도덕적 질서가 영화 속 수족관처럼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제 영화 속 불륜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나 성적 호기심의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 심리적 관계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남편의 역할 보여준 <해피엔드>, 그러나

그러나 99년, 진일보한 듯 보이던 불륜 영화는 <해피엔드>에 이르러 방향을 선회한다.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며 남편과 애인을 구분해 관리하고 있는 보라(전도연). 주인공 보라는 이전 여성 캐릭터에 비해 매사에 적극적이고 당당하며 남편에게 자신의 요구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여자다. 남편이 아닌 애인에게도 ‘우리의 은밀한 미래’를 운운하며 매달리기 보다는 서로가 스치듯 지나가는 관계이길 원한다.
















 
<해피엔드> 포스터 및 주요 장면들

남편의 역할 역시 이전의 한국영화들과 크게 달라진 걸 볼 수 있다. 보라의 남편 민기(최민식)의 캐릭터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IMF 금융위기 사태 이후 실직하고 헌책방을 전전하며 아내의 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렇다고 살림을 하며 가정 내부를 책임지는 데는 더더욱 익숙하지 않은 무력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역전된 관계에서 ‘바람’의 기운은 남편이 아닌 아내를 향해 불어오며 그 바람을 지켜보는 남편은 이 뒤바뀐 관계를 용납하기 어려워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감정은 카메라 시선을 따라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가도, 결국은 버려진 남편에게로 시선이 간다. 이렇게 흔들리던 시선은 보라가 아이의 젖병에 수면제를 타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순간 방향을 확실히 한다. 그녀의 비정한 모성 앞에 ‘벌 받아 마땅한 불륜녀’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이로써 기존 멜로드라마에서 아이를 볼모로 윤리적 거래를 해왔던 관습이 다시 영화를 지배하게 된다.

‘남편=가해자, 아내=피해자’ 공식 깬 <바람난 가족>


그리고 2003년, 불륜 영화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긴다. 이제 영화는 ‘남편=가해자, 아내=피해자’라는, 불행한 결혼과 이혼의 도식을 떠나 개인 주체의 은밀한 욕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매력적인 아내(문소리)를 두고도 또 다른 여성을 탐닉하는 변호사 남편(황정민), 병을 앓고 있는 남편 대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시어머니(윤여정), 10대의 고교생(봉태규)과 바람난 아내. 온 가족이 바람을 피운다는 파격적인 설정의 영화 <바람난 가족>은 그동안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세우며 전통적 가족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영화는 대중매체인 만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때, 한국 영화 속 불륜 역시 사회상을 반영하며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2005년 9월 현재,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허준호 감독의 <외출>에서의 불륜은 또 어떤 진일보한 면을 준비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외출>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표현했으되, 불륜이라는 일탈 행위를 통해 표현해 왔던 사회적 문제와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 <외출> 그들의 배우자들처럼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 수진(손예진)과 인수(배용준)

<외출>, 다시 <자유부인>시대로 회귀?
“우리 사귈래요? 두 사람 기절하게.”

당돌한 말을 건네는 그녀(손예진)와 그녀를 당황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남자(배용준). 배우자들의 사고로, 그들의 부정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들이 왜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각각의 배우자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편이 이해가 빠르다. 각각의 배우자와 맺고 있는 관계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들의 관계는 영화를 위한 설정처럼 무의미해 보인다.

또한 서영의 캐릭터야말로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마치 <자유부인>의 선영이 그랬듯 착실하게 살아온 여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스스로 ‘미쳤나봐’를 되뇌며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들의 관계를 통해 나아진 상황은 없으며, ‘당신들(그들의 배우자)처럼 우리도 사랑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찌됐든 영화의 결말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현실로의 귀환이다.

영화 속에서 불륜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건 그것이 호기심과 관음의 대상이기 이전에,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불륜은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다. 단, 과거로의 회귀, 답습은 피하자. 불륜의 방식이 남녀 사이에서의 도식관계를 떠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치부를 건드릴 때 관객은 극장으로의 외출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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