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여성 서니 보스웰(김성희) 부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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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양여성 서니 보스웰(한국명 김성희)
 
ⓒ2005 Sundayjournalusa

‘가족은 함께 있을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글은 입양아 가족을 찾아주는 한국복지재단 홈페이지에 올려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한국태생 입양아들이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으며, 이 중에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지난 날의 아픈 사연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자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부모들은 자신들을 찾아오는 입양아들을 만날 수 없어 피눈물을 흘리면 피해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양아들은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겠다고 나선다.

지난 1963년 10월말 경 서울의 길거리에 버려진 김성희는 한국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한 주한미군에 의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오하이오주에서 성장한 김성희는 방송 리포터와 모델로 활동하면서 이제는 부동산 융자전문가로 의욕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소원은 자신을 나아 준 한국 어머니를 찾는 일이다.


성 진<취재부 기자>


김성희의 미국인 양어머니 제랄드 보스웰은 평소 홀트 양자회를 설립한 해리 홀트가 펴낸 입양아에 관한 책을 읽고 한국 어린이를 입양하기를 원했다. 그 때가 1963년이었다. 마침 그녀의 남편 제리 보스웰은 주한미군 헌병대 소속으로 영등포에서 근무 중이었다. 남편은 서울 홀트사무소를 통해 입양을 신청했다. 당시 성희는 길거리에서 버려져 영양실조 상태로 병원에 오게 됐는데 더듬거리는 말투로 이름이 “김성희”라고 했으며, 아버지인지. 아저씨인지 또는 오빠인지 하여간 남자에 대해 중얼거렸으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병원에서 6주를 지낸 성희는 고아원으로 옮겨졌는데 마침 제리 보스웰이 신청한 입양자 대상에 3번째 후보 아기로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이미 고아원에는 2명의 유아가 보스웰의 입양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유아들은 입양수속을 받는 기간에 죽는 바람에 3번째인 성희로 결정됐다. 양어머니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성희는 양아버지가 근무하는 미군숙소에서 지내야만 했다. 군대 생활이라 주번사관이 갑자기 점호라도 실시하면 군인들이 성희를 감추기에 바쁘게 영내를 돌아 다녔다. 마음씨 좋은 중대장이 있어 성희는 양어머니가 올 때까지 부대의 마스코트였다.

1964년 5월 성희는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에 도착해 ‘서니 보스웰’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양어머니는 운전을 하지 못했기에 주로 집안에 있어 서니와 함께 지냈다. 어린시절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가끔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으나, 다른 백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다. 자라면서 조금씩 인종차별도 듣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양아버지는 서니에게 몸매 가꾸기와 화장을 짙게 하도록 부추겼다. 백인여학생처럼 보이도록 파란색이나 갈색의 아이 섀도우를 강조했고 아이라인도 크게 그렸다. 사람들의 관심도 끌게 되었다. 특히 틴에이저 백인 학생들이 유심히 그녀를 쳐다 보았다. 패션잡지에 실린 백인 여성들처럼 보이고 싶어 서니는 모델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이 19세에 뉴욕으로 가서 모델수업을 받았다. 그때가 80년대 초였는데 당시 모델계에서 동양계를 눈 여겨 볼 때가 아니었다. 신장이 불과 5피트 5인치의 서니는 단지 “귀엽다”는 것 이상으로 패션 모델로는 여러모로 핸디캡을 받았다. 그러나 열심히 모델 공부를 했고, 방송학교에도 나가 리포터와 PD, 아나운서 공부를 했다. 이런 경력으로 그녀는 조금씩 영화, TV 방송에 출연하게 되고, 라디오방송에서 호스트로 활약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디스크 자키로 인기를 모았다. 또 여러 이벤트의 사회도 맡았고 공공사업이나 상업적인 행사에 해설가나 호스트로 초청을 받기도 했다. 유니온뱅크, 샌디에이고 동물원, 스테이트팜 보험회사, AT&T, 패나소닉, MCI 등등의 유수기업에서 초청을 받았다. 방송과 모델을 공부한 관계로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라디오 방송계를 떠난 그녀는 오하이오 스테이트 유니버시티에 등록해 동양미술을 전공했다. 오래 전부터 그녀의 가슴속에는 막연히 동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양아버지는 그녀가 동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을 싫어했다. 양아버지는 그녀가 동양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혼하면서 부동산 면허를 취득해 융자와 중개업무를 담당했으며, 성실한 근무와 우수한 실적으로 글로벌 모기지 회사의 매니저의 위치에 올랐다. 현재 발렌시아 지역에서 7명의 스탭진을 지휘하면서 사무실을 의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코리아타운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뉴스를 통해 간간히 접하고 있으나 언어문제도 있고 연결고리도 없어 멀리서만 쳐다 보아 왔다.

그녀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서 의욕적인 부동산 융자업무와 함께 주택과 사업체 중개도 담당하고 있다. 또한 LA지역의 KCLA 99.3 FM 라디오 방송을 통해 “모기지 시간”의 호스트를 맡아 다양한 부동산 융자 상식을 전하고 있다. 이 “모기지 시간” 프로그램은 아델피아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웹 라디오로도 방송되고 있다. 

“앞으로 여건이 되면 한인비즈니스계와 연결을 맺어 보고싶다”는 서니 보스웰은 “한인들과 가까워지면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unni Boswell 연락처 전화 (661) 36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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