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책

이 뉴스를 공유하기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 ‘왕의 남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고 한다. 지난주까지 극장을 찾은 관객수는 600만이 넘어서 올해들어 최대 관객수를 기록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는 사극물에서 동성애 장면도 포함됐는데, 최근 미국에서도 카우보이 동성애 영화로 중국계 감독 앙 리가 만든 ‘브록크마운틴’이 화제이다. ‘왕의 남자’는 비디오나 DVD로 미국시장에도 선 보일 예정이다. 이 작품에 대한 이종도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사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낱 회고조거나 복고풍의 이야기에 불과한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은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한 방향으로 왜곡된 결을 다른 쪽으로 솔질하여 현재와 대면하고 싶어한다. 현재와의 접점이 없다면 사극은 한가한 회고지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 <황산벌>에 이어 <왕의 남자>로 기존의 사관을 뒤집어보는 낯선 시도를 펼치고 있다. <황산벌>이 왕과 장군의 시각에서 평민 ‘거시기’의 시각으로 역사를 새로 쓴다면, <왕의 남자>는 왕과 광대를 대비하며 왕의 존재론을 다시 바라본다.
굳이 연산군을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연산군은 사도세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족 가운데 가장 비운의 주인공으로 꼽히며 거듭하여 사극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사도세자는 동정의 눈물을 자아낸다. 연산군은 황음과 패악, 장녹수와의 인연,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 따위로 축소되어 기껏 관음증의 대상으로 떨어진다. 이준익은 기득권의 사관과 야사가 결합한 연산군의 이미지를 따라가면서도 연산군에게 신권에 대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군주, 예민한 감성으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관객, 풍자까지도 끌어안을 줄 아는 너그러운 검열관의 이미지를 새로 들여온다.
그러나 이준익이 <황산벌>처럼 전면적이고 전복적으로 역사를 새로 쓸 마음은 없어 보인다. 연산군의 황음과 패악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따르지는 않지만, 중신들 앞에서 즉결 처분을 하는 전제군주와 할머니를 밀쳐 죽이는 패륜아의 이미지를 답습한다. 다만 이준익은 연산군의 숨결에 바싹 다가서서 비극의 원인을 캐묻는다. 그 방법론은 연산군을 광대(예술)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광대들이 있다. 장생(감우성)은 단짝인 공길(이준기)과 함께 소속사인 비리형 가무집단 매니지먼트에서 벗어나 더 큰 무대인 한양으로 올라온다. 장생의 패거리는 연산군의 성생활을 풍자한 거리극으로 인기를 끈다. 이것이 연산군(정진영)의 예술보좌관이자 비서 노릇을 하는 신하 처선(장항선)의 눈에 들어온다. 장생패는 왕을 비하한 괘씸죄로 곤장을 맞는다. 장생의 기지와 배짱, 그리고 처선과 연산군의 너그러움이 맞아떨어져 장생패는 가까스로 살아남고 아예 궁중으로 들어온다. 이제 연산군의 성생활과 군신의 비리가 광대극의 소재가 되어 궁중에서 펼쳐진다. 장생패는 금기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목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가운데 광대놀음을 한다(사실, 예술의 운명은 이렇게 단두대 앞에서 춤추는 것이다. 다만 광대의 목을 치던 왕의 칼이 관객에게 넘겨졌을 뿐이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관객 연산군으로 넘어간다. 연산군은 관객의 운명을,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 앞에서 시연해 보인다. 연산군은 금기와 풍자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심지어 절대권력인 자신을 풍자하는 예술의 유쾌함을 맛본다. 그리고 비리로 얼룩진 신하들의 세계를 유추하며 통쾌해한다. 연산군은 예술이라는 창을 통해 자신의 깊은 상처인 어머니의 죽음과 대면하고, 왕권을 신권 아래 두려는 신하들의 권력욕을 들여다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연산군은 관객의 운명을 넘어서 예술 창작을 모방하며 즐기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연산군은 공길과 그림자극, 인형극을 함께 놀면서 창작의 비밀까지 움켜쥐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예술이라는 ‘창’을 깨고 들어간다. 거기엔 재현된 사실과 진짜 사실을 가르는 어떤 표지가 없다. 연산군은 거기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준익은 이렇게 폭군 연산군의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섬세하고 신경질적이며 상처받은 한 관객의 초상을 길어올린다. 동시에 관객과 배우의 운명을 되짚어본다. 관객은 예술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이지만 끝없이 배우의 운명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술은 현실을 더 밝게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바닥에 어두운 심연을 깔고 있는 허구라는 것이다. <연산군일기>에서 공길과 관련된 아주 짧은 문장 하나를 거두어, 이준익은 매우 풍요롭고, 많은 주름이 져 있으며, 여러 해석이 가능한 유쾌하면서도 비극적인 텍스트로 창조해냈다.
<황산벌>에 비한다면 <왕의 남자>는 표현의 질감에 있어서 무척 세련되었다. 현실과 허구 사이를 가뿐하게 넘나들며 역사를 즐기는 태도도 한결 여유롭다. 궁중풍자극에서 보여준 성생활극의 활력은 꽤나 흥겹다. 연산군이 그림자극으로 자신의 상처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이나,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과 동물로 분장한 광대의 놀이가 한데 어울린 후원 사냥놀이 장면은 가슴이 싸해지기까지 한다. 트라우마로 굳어버린 듯한 딱딱한 표정과 신경질적인 어투로 변덕스러우면서도 연민어린 캐릭터를 연기한 정진영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배우 경력이 다시 거론되어야 할 것 같다. 연산군 못지않게 두드러지는 캐릭터는 공길인데, 가녀린 선만으로 복잡하고 내밀한 남자들 사이의 우정을 드러냈다. 이건 <왕의 남자>가 거둔 또 하나의 의미라 할 만하다. 유해진도 오랜만에 활기찬 웃음을 선사했다. 풍요로운 텍스트이긴 하지만, 연산군과 공길이 두드러진 탓에 장생과 녹수는 파묻힌 감이 있다. 애초의 방점이 장생에게 있었을 듯한데, 아무래도 텍스트 속 인물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걸어다니게 마련이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