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이철수씨가 코리아타운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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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주 아시아커뮤니티 인권운동의 상징이었던 ‘이철수사건’의 주인공 이철수(54)씨가 오는 5월 LA 코리아타운에서 개최될 ‘이철수사건’ 심포지엄에 직접 참석해 지난날 자신을 위해 도와준 한인커뮤니티와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고마움을 전할 계획이다.
LA 심포지엄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철수사건의 또 다른 진실 등도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지난 83년 사형수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를 암살하려는 갱단들의 위협 때문에 은둔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씨는 지난 달 22일 UC 데이비스 대학에서 개최된 ‘이철수 사건의 조명’이란 회의에 참석해 출소 후 최초로 자신의 10년 옥중생활과 오늘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고백하여 참석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20대 젊은나이에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수의 고초를 겪었던 이철수씨는 50대의 모습으로 UC 데이비스 캠퍼스에 모습을 나타냈다. UC 데이비스 대학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센터와 아시안학생협회 등 주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이철수사건’을 특집보도한 이경원 원로기자를 포함해 ‘이철수구명위원회’를 구성했던 루크 김 박사, 그레이스 김씨 등이 패널 토의자로 참석했다.


성진 취재부기자


















이날 UC 데이비스 켐퍼스 유니버시티 홀에서 열린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 회의에서이철수씨는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서 이런 강연회를 개최하여 초청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는 “10여년 사형수로 복역하는 동안 9년 간은 독방신세였다”
면서 “이경원 선생님과 후원회의 활동이 희망을 잃지 않게 용기를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 이후 사회적응이 쉽지 않아 커뮤니티의 후원에 보답을 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면서 “비록 석방되어 사회에 나왔으나 갱단들의 위협에 계속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이씨는 “중국갱단들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불을 질러 3도 화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 했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숙연케 했다. 그는 당시의 화상으로 얼굴이 많이 상해 옛날의 깨끗한 모습이 많이 상했었다. 하지만 수차례 성형수술로 많이 회복됐다.
그는 최근 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와 같은 사람이 다시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나의 체험을 글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철수사건’ 발생 30주년(2003년)이 지나면서 UC Davis 나 UCLA 아시안 아메리칸 학회를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철수사건’이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실제로 이철수 구명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1980년 당시 이 운동에 참여했던 20-30대 학생들 중에는 미국사회의 법제도에서 소수민족이 당하는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이 많았다.
최초로 이철수 구명운동에 나섰던 일본계 3세 여대생이었던 랑코 야마다는 누구보다도 이런 부조리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여러 변호사들을 찾아 다녔으나 모두들 거액의 선수금을 요구했다. 나중 그녀는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 지금은 오클랜드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저소득층을 돕고 있다. 지금 미국 여러대학에서는 이철수사건을 두고 석사논문들이 계속 나오고, 박사논문도 심사단계에 있다.
‘이철수사건’은 1980년대 LA한인사회는 물론 미전국과 한국에까지 잘 알려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내 주류사회는 물론 일본계, 중국계, 필리핀계, 흑인계, 에스키모 등 소수민족 커뮤니티를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지난 1964년 12세 어린나이에 미국에 온 이철수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학교생활은 이철수에겐 지긋지긋한 악몽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생활에서 백인학생들의 놀림과 교사들의 무관심은 동양에서 온 어린이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백인학생의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맞부터 싸움까지 벌렸는데, 백인 교장은 백인학생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이철수에게만 벌을 주어 말로 자신의 결백을 다 할 수 없어 손짓과 발길질을 하면서까지 대들었다.
이런 이철수를 백인교장은 교육적인 선도보다는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었다. 결국 이철수는소년원 신세를 지게되면서 방황의 날을 보내게 된다. 당시 미국사회는 오늘날처럼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람이 전혀 없었다.
1973년 6월 3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식당거리에서 대낮에 총성 한발이 울렸다. 임이택이란 와칭갱단이 쓰러졌다. 차이나타운에서 연속적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장은 “빨리 잡아내! 어떻거나 동양인을 잡아내!”라고 다구쳤다고한다. 백인 관광객이 잘못된 진술에 사건발생 시간에 여자친구와 전화를 걸고 있었던 이철수는 사건 후 용의자로 체포되고, 물증도 없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경찰은 “이철수가 범인이 아니다” 목격자의 증언을 무시했던 것으로 나중 밝혀진다. 더 한심한 것은 이철수를 담당한 관선변호인은 이철수를 중국인으로 알았다. 미국사법제도에서 소수민족이 겪는 차별을 나타내는 한예라고 볼 수 있다.
무기수로 듀엘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이철수는 1977년 10월 8일 자신을 노리는 나치주의자 백인 갱단원 모리슨 니드햄의 칼부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당방위로 상대방을 죽이게 되어 다시 재판을 받게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샌퀸틴 교도소로 이감되어 21번째 사형수로 집행을 기다리게 된다. 한편 6개월 동안 이철수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을 탐사추적했던 이경원 기자의 특집기사 “차이나타운의 앨리스”가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 탐기사로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사로 ‘이철수구명위원회’가 조직됐으며 “이철수에게 정의를 찾아주자”라는 캠페인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인종을 초월하고 세대를 넘어 확산됐다. ABC 20/20 등을 포함해 주류언론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는 가운데 끝내 재심이 받아져 1982년 9월 3일 샌프란시스코 법정에서 이철수는 극적인 무죄평결을 받는다.
캘리포니아주는 이철수사건에 영향을 받아 한국인들과 외국이민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카운슬러 및 생활을 도와줄 수 있는 지원을 하는 내용을 법으로 제정했다. 또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미국의 많은 주에서 외국 이민자들이 재판을 받을 때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참작해야 한다는 판사들이 증가하고 있다. 모두가 ‘이철수사건’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철수 사건 주요일지


1952년   이철수 한국에서 출생.
1964년   이철수 미국에 이민.
1973년 6월3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대낮 와칭갱 임이택 피살.
1973년 6월7일   샌프란시스코 경찰 이철수를 하숙집 입구에서 체포.
1973년 6월11일  3명의 백인증인이 이철수의 16세때 사진을 보고 용의자로 지목.
1973년 6월28일  샌프란시스코 검찰 이철수를 임이택 살인혐의로 기소(이철수 제1사건).
   법정 클리포드 굴두 관선변호인 지명.
1974년 4월2일   샌프란시스코 법원 이철수 재판지를 새크라멘토로 이전. 굴드 변호인
사퇴하고 해밀턴 힌츠 변호사 지명.
1974년 6월3일   새크란멘토 법원 살인혐의 재판 시작.
1974년 6월19일  이철수 제1급 살인혐의로 종신형 선고. 듀엘 교도소에서 복역시작.
1977년 3월  교도소 당국은 이철수를 라티노 갱인 ‘뉴에스트라 화밀리아’ 단원으로
   간주해 분류, 이철수는 이에 항의해 교도소는 이철수가 갱단원이 아님을
   공식 분류. 
1977년 6월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청소년그릅 이철수 무죄운동 시작. 이경원 새크라멘토 유니언 기자 사건 취재
1977년 10월8일  이철수 교도소 운동장에서 복역수 모리슨 니드햄을 정당방위로 살해. 교도소 당국 이철수를 살인혐의로 입건(이철수 제2사건).
1977년 11월22일 이경원 기자 이철수 면회, 6개월 심층취재.
1977년 12월      이철수 제2사건 관선변호인으로 레오나르도 터만 지명.
1978년 1월29일  이경원 기자의 ‘이철수 특집기사’ 새크라멘토 유니언 1면 톱으로 보도.
  “제1사건 평결은 잘못됐다”
1978년 2월-3월  새크라멘토 지역의 유재건(당시 법대졸업생), 그레이스 김(당시 고교교사)
  등이 주축으로 “이철수구명위원회” 구성,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일본계 3세 랑코 야마다 여대생, 한인 3세 게일 황, 브렌다 선우 등이 이철수 구명을 위한 아시안 공동전선을 구성.
1978년 6월17일  ‘이철수 구명위원회’는 이경원 기자의 기사와 정황증거를 근거로 새크라멘토 법원에 이철수 인신구속해제(Habeas Corpus) 신청.
1978년 9월15일   ‘이철수 구명위원회’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지닌 인권문제 레오나드 와인글래스 변호사를 이철수 사건 변호인으로 선임.
1978년 10월20일  새크라멘토 법원 로렌스 칼튼 판사 인신구속해제 심리 시작.
1978년 11월2일  제1사건의 증인 스테판 모리스 “이철수는 임이택 살인범이 아니다” 증언.
1979년 1월15일  샌호킨 법원 크리스 파파스 판사 이철수 제2사건 심리 시작.
1979년 2월2일   새크라멘토 로렌스 칼튼 판사,이철수 제1사건 “재심 이유있다” 판결.
1979년 3월12일  샌호킨 법원 배심원단, 이철수 제2사건(정당방위살인사건)에 유죄평결.
1979년 3월22일  샌호킨 법원 이철수 제2사건 사형선고.
1979년 5월14일  이철수 사형선고로 샌퀸틴 교도소로 이감.
1980년 3월21일  새크라멘토 항소법원 이철수 인신구속해제 1심판결 인정.검찰 상고철회.
1980년 7월21일  이철수 제1사건 재심 샌프란시스코 법정으로 이관해 심리할 것을 결정.
1982년 5월      ‘이철수 구명위원회’ 전국적으로 10만 달러 기금모금캠페인 시작. 건강상
                 사임한 와인글래스 변호사 후임으로 스투어트 헨론과 토니 세라 변호사
                 선임.
1982년 8월11일  샌프란시스코 법정에서 ‘제1사건’ 재심 공판 개정.
1982년 9월3일   샌프란시스코 법정 ‘제1사건’ 배심원 이철수에게 무죄평결. 배심원 반장
                 ‘이철수 구명위원회’에 참여.
1983년 1월14일  캘리포니아 제3항소법원 ‘이철수 제2사건’ 사형판결을 무효결정.
1983년 2월28일  캘리포니아 대법원 검찰측의 ‘제2사건’ 무효결정 이의상고를 기각.
1983년 3월 28일 샌호킨 법원 이철수 석방을 판결. 이철수 10년만에 자유의 몸으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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