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값에 팔려가는 북한 여성을 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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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신 미국을 선택, 지난 5일 미국에 망명한 탈북자 6명이 최초로 지난 2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다음은 기자회견 내용 전문이다. 이들은 북한 탈출 계기 및 중국 내에서의 인신매매와 성폭행, 북한 수용소의 참상 등 그동안 겪었던 참상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편집자

















 ▲ 기자회견 하는 탈북자들

◇찬미(여 20)
=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도와준 많은 이들의 기도 덕에 자유를 찾았다. 16살때인 2002년에 밥 실컷 먹고 싶어 국경 넘어 친척 집 찾아가다가 3번이나 팔려다녔다. 2003년 북송됐지만 미성년이어서 풀려났으며 다시 북한에서 살 수 없었다. 거의 먹을 게 없어 재차 탈북했다. 또 팔려갔다가 현재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셋째오빠를 만났고 2004년 오빠와 함께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던중 오빠는 잡혀갔고 나 역시 며칠 후 다시 북송됐다. 감옥에서 만난 오빠는 정치범 수용소로 옮겨갔고 이곳에서 3년형을 살게 됐다. 1년7개월 감옥에 있었는데 다른 7명은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이때 고통은 말하기 힘들 정도다. 먹을 게 없어서 모두 얼굴이 붓고 배가 퉁퉁 부어 하루에도 3~4명씩 죽어나갔다. 죽은 시체를 묻으러 2번 갔는데, 시체를 자그마한 창고에 마구 던져놓았다. 여름에는 시체에서 냄새가 풍겼고 산 꼭대기로 개처럼 끌고가 구덩이에 묻을때 시체의 관절을 꺾었다. 형기를 채우지 못한 이중범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랬는데, 관도 없이 맨 땅에 묻었다. 배가 고파 옥수수를 따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죄로 많은 교정(고문)을 받았다. 입을 벌려 옥수수를 물리고는 무릎 꿇고 손을 위로 올려 빗속에서 반나절동안 있게 했고 견디다 못해 쓰러졌더니 구둣발로 온 몸을 찼다. 그래서 오른손 세번째 손가락이 기형이 됐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영혼들이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올해 2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50대 남자에게 팔려갔는데 마침 인근에서 오빠가 살고 있다는 걸 알았고 구해줘 도망쳐 나왔다.오빠가 2년전부터 천기원를 목사 알고 있어 미국으로 오게됐다. 이제 자유를 찾았다. 감옥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려줬으면 좋겠다. 탈북해 헐값에 팔려가는 여성들을 구해달라. 그리고 중국 당국은 방황하는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보내지 말아달라. 나는 고생했지만 자유를 찾았다. 언론이 모든걸 공개해서 북한의 사람들을 구해달라.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다.


◇한나(여 36)
= 평양에서 예술체조 지도교원(무용하고 다름)으로 있다가 군복무중인 남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가정 살림이 아주 어려워졌다. 담당 학부형에게 사정을 말하고 나서 그 사람과 국경 지역 장사를 떠나게 됐다. 남편이 말렸지만 딸(당시 12살)이 다른 아이들 입는 운동복을 부러워했다. 학부형이 짐을 들고 다녀오면 2천원을 주겠다고 했다. 딸 운동복을 사주고 가정 살림에 보탬이 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때 딸이 “꼭 가야 되냐고, 운동복 사줄 수 있느냐고…약속해달라고 해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직도 가방을 메고 등교하던 딸 아이의 모습이…(울음) 사흘간 여행한끝에 국경에 도착했다. 중국과 거래하는 3자거래집에 들어가 하루를 묵게 됐는데 주인이 주는 빵을 먹었다. (수면제가 들었는지) 정신을 차리니 머리가 띵하고, 지하 감방에 손 발이 묶인채 있었다. 도대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묶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었다. 중국돈 2만위안에 선양으로 팔려가 중국인과 살게 됐는데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지금도 머리에 뼈가 나온 상처가 있는데 가슴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조선족 여성을 폭행하는 일이 다반사다. 조선족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잘못하면 공안에 고발한다고 해 반항할 수도 없다. 어느날은 칼을 들어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도 했지만 딸 생각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딸 하나를 낳았다. 탈북자들이 이처럼 고통받는 것은 중국 당국이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민족을 구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 (한나씨는 이후 취재진 질문에서 현재 딸들을 데려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했다)


◇나오미(여 34)
= 1998년 탈북해 중국에 건너갔다. 94년부터 시작한 북한 식량 난에다가 어머니가 장사하던중 병세가 악화됐다. 아버지쪽 친척이 중국에 있어 도움을 받으려 중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중국 조선족에게 부탁, 친척집에 데려다 주면 돈 주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떠나 지린성 용성시 도착했지만 헤이룽장성에 팔려갔다. 3년간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았다. 중국인들은 조선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면 돈으로 사왔다면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병 치료도 안해준다. 1년간 걷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꾀병이라면서 병원에도 안데려갔다. 참다 못해 친척집으로 도주, 친척이 소개한 사람과 결혼해 임신 6개월째 되던 때에 공안에 체포됐다. 공안들이 악랄하게 심문했다. 동네에 사는 북한 사람들을 대지 않으면 아이를 걷어차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에 잡혀가면 모두 죽는데 모두 살리려면 다 대라고 협박했다. 공안에게 5천 위안을 주고 풀려나와 1년간 5천위안 갚기로 하고 업소와 계약했다. 출산후 6개월만에 다시 공안이 잡으러 왔다. 내복 바람에 맨 발로, 아이도 못보게 하고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에서는 청바지 입고 있었는데 청바지가 미국의 상징이라면서 미국이 인디언 죽일때 입은 것이라며 벗겼다. 당시 11월이었는데 아이를 당장 해산할 여성이 있었다. 그 여자는 배가 불룩했는데 어느날 병원으로 끌고가 침대에 팔을 묶어놓고 다리를 묵고는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켰다. 그날로 여자를 다시 감방에 넣었다. 낙태했으니 얼굴은 부어오르고, 그래서 보다못해 콘크리트 바닥에 뉘일 수 없으니 간수보고 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런 말 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다. 철장에 무릎 꿇려 손을 밖으로 내밀게 하고는 나무 몽둥이 등으로 손을 때리고 머리를 때렸다. 그 여자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고문과 박해를 못견디고 숨지는 사람 이 많다. 이 자리를 빌려 북한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극심한지 말하고 싶다.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워싱턴에 갔을 때 우리 보고 왜 왔느냐, 북한에서 죄짓고 온 것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이런 이야기 들을때마다 북한 실상, 중국에서 겪는 실상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 여성들은 거의 100% 인신매매 당해 팔려다닌다. 중국에서 일해도 탈북자인 것을 알면 월급도 안준다. 일자리를 얻어 여러곳에서 일했었는데, 탈북자 신분 들어나면 몇천위안씩 되었지만 안줬다. 우리는 결국 하느님 선택받아 자유를 얻었지만 북한에 있는 동포들, 중국내 탈북자들이 아직도 인신매매당하고 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였으면 한다. 세계가 북한에 인권 압력을 가했으면 좋겠다. 중국이 탈북자를 북송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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