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이철수 무죄석방 공로-전씨, 한인 최고 연방정부 고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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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이민2세기를 맞는 동포사회는 올해 제정된 ‘미주한인의 날’(1월 13일)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코리아타운에서 단체장을 지낸 50여명의 ‘올드타이머’들이 모여 지난 1월에 설립한  ‘동포사회 발전후원재단'(이사장 이민휘)이 마련한 제1회 ‘자랑스런 한국인상’이다.
한인사회의 역사를 바로잡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유산을 물려주는데 협력할 것을 취지로 하는 이 재단은 ‘이번 시상식을 통해 이민 한인 1세들의 희생과 업적을 2세들에게 알리고 함께 한인사회 발전에 힘을 모으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동포사회발전후원재단은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첫 수상자로 언론인 이경원(75)씨와 연방노동부 여성부 장관 전신애(63)씨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수상자에게 기념패와 함께 1만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지금까지 이와 유사한 수상 중 최대의 상금이다. 후원재단은 수상배경을 설명하면서 이경원 기자는 50년 가까이 주류언론에서 근무하며 한인을 비롯한 소수계의 인권보호를 위한 기사를 다뤄왔고 특히 74년 ‘이철수씨 사건’을 집중 취재하여 이씨의 무죄석방에 기여한 공로를, 그리고 전신애 국장은 평범한 주부에서 일리노이주 노동부 장관에 이어 한인으로서는 미행정부 최고위직에 오른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높이 샀다고 밝혔다.
제1회 ‘자랑스런 한국인상’ 수여식은 오는8일 오후 6시 윌셔 플라자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다. 미주한인 이민1세기의 역사는 조국의 독립과 해방된 모국의 선진화를 위한 희생과 개척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인사회는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경제·교육·종교계 등에서 비교적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류사회의 핵심인 미국 언론계나 정계에서 뚜렸한 활약을 하는 한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자랑스런 한국인상’의 수상자로 언론인 이경원 선생과 연방노동부 전신애 여성국장이 선정된 것은 2세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수상자의 면모를 소개한다.


제임스 최 <취재부 기자>


















“4.29를 잊으면 또 당한다. 엘리뜨 한인들이 책임을 다해  4.29폭동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꿈이 없어진다”
이경원 기자는 ‘4.29폭동이 우리에게 증명한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한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수많은 빛나는 개인적 명예와 업적을 합친다 해도 경쟁관계와 이해집단으로 점철된 이 나라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 어쩌면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는 커뮤니티 의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980년의 일이다. 당시 이경원 기자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형성되고있던 한인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로스엔젤리스에서 최초의 전국판 영자 주간지 ‘코리아타운 위클리 (Koreatown Weekly)’을 창간하고 1년 동안 자동차로 2만5천마일을 달리며 미주한인사회를 취재했다.
그는 미 대륙 곳곳의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어는 잘 못하지만 부글부글 끓는, 위험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자리잡고 생활하던 수백 명의 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들 한인들을 “배짱 좋은 코리안”이라고 말한다.
그는 취재를 통해 놀랄만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한인들이 어려울수록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뻗어 나가는 끈기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활기차고 대담하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 한인들의 모습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수많은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의사, 교수, 엔지니어, 과학자, 변호사, 회계사, 기업인,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눈부신 개인적 성공사례에 고무된 것만큼이나 이경원 기자를 악령처럼 괴롭힌 우울한 사실이 있었다. 분열되고 힘없는 코리아타운,  특히 코리아타운의 대부분 엘리트들이 어려운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봉사와 참여 정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 대해 “놀랍고도 아찔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아시안 아메리칸 저널리즘의 학장”이라 불리는 이경원 기자는 지난 45년간 미 주류사회에서 신문기자로 활약한 격동의 미 현대사와 한인사회 변천사의 산 증인이다. 1950년에 도미하여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저널리즘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55년 테네시의 ‘킹스포트 타임즈 (Kingsport Times)지 에서 사건기자로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70년까지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찰스턴 가제트 (Charleston Gazette)’지에서 일하며 50년대와 60년대의 흑인 민권운동, 아팔레치안 산맥의 빈민 탄광촌, 남부 웨스트 버지니아의 부패한 선거운동에 대해 많은 기사들을 남겼다.











그는 1970년부터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유니온 (The Sacramento Union)’지에서 추적탐사기자로 활동하면서, 한인 이민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다. 바로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갱  살해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한인청년 이철수 사건이었다. 그는 6개월간 이철수 사건을 취재하여 1978년 1월 29일 ‘차이나타운의 앨리스’라는 특종기획기사로 이철수 재판의 부당성을 고발했다.
이철수 기사로 미전국에서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5년 동안 120여 개의 기사를 통해 이철수에 대해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과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의문점들을 제기하였고 샌퀸틴 감옥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이철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83년 석방되었다.
‘이철수 사건’은 미국역사에서 소수민족들이 연합해 일군 최초의 인권운동의 승리로 기록되고 있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 기자의 필봉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역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주류 언론계에서 이경원은 유색인종과 소수민족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가졌던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DC에 자리잡은 언론박물관 ‘뉴지엄'(Neseum)에는 ’20세기를 빛낸 언론인’ 중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는 주류 언론계에서 수많은 수상경력이 있으며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영자신문 KoreaTown Weekly를 창간해 운영했으며, 한국일보 자매지Korea Times의 편집장을 맡아 한인사회와 흑인 및 라티노사회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세크라멘토에 거주하는 그는 아직도 정열적으로 기고와 강연활동을 하고있으며 ‘이철수 사건’ ‘외로운 여정-이민 1세기’ 등을 포함해 한인 이민사에 관한 두 권의 저서를 집필 중이다.



전신애 여성국장은 누구인가?-미주한인 이민1세로 과감한 정계도전 끝에 미정부의 최고위직
                                                     동성동본 결혼 위해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아메리칸 드림’성공


특유의 친화력 바탕과 남을 배려하는 적극성 인정받아
노동부의 효율화에 지대한 공로 인정받아 부시에 총애


미국에서 소수민족 출신으로 공직사회에 진출해 성공한 비결에 대해 전신애  노동부 여성 국장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맡은 분야에만 집중하는 것, 그리고 베스트 아이디어를 내는 것” 즉, 최선을 다하라는 조언이다.
또 그녀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잔에 물이 절반만 차있을 때 반밖에 없다는 생각과 반은 있다는 생각은 큰 차이가 있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면 할 일도 많고 가능성도 많아요. 꿈에는 한계가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아메리칸 드림’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여성이다.
미국에서는 백인이건 유색인종이건 여성의 지위가 아직도 소수그룹에 속한다. 소수인종 중에서 소수인 전신애 국장은 1세 이민여성임에도 미국정계에 과감히 도전해  현재 한인으로는 미정계 최고위직에 올랐다.
전신애 국장은 60년대 미국에 유학생 부부로 도미한 1세이민이다. 동아일보는  그녀의 이민 당시의 모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1965년 9월 15일 김포공항. 이화여대를 갓 졸업한 젊은 여성이 어머니와 언니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울다 지친 그는 승무원의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타야 했다. 대학 때 만난 동성동본의 오빠 친구로 미국 유학 중이던 전경철씨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미국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그녀에게 대학 때 만나 사랑에 빠진 남편이 동성동본이란 사실은 그의 앞에 닥친 인생의 첫 시련이었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을 선택했다. 미국 도착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도전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미국에서 성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공부하는 것’이란 말에 평범한 주부를 꿈꾸던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대학 공부에 도전했다.
그녀는1971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졸업했으며, 1976년 이중언어 교육연구소에서 1980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남을 배려하는 적극성으로 1984년 일리노이 주지사의 아시아계 미국인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일리노이 주 장관을 지낸 그는 2000년 대선 때 공화당 캠프에서 공약개발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01년 연방정부 노동부 차관보에 임명된 그는 ‘노동부의 효율화에 대한 기여와 능력’을 인정받아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에서도 연임되어 그의 탁월한 행정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60세가 넘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밤에 3시간만 잔다고 한다. 부족한 잠은 오후에 2시간 정도 낮잠으로 보충하면서 무섭게 일을 한다. 젊은 사람도 지칠 법하건만 그는 오히려 “아이디어는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주로 나온다”고 말한다.
소수민족으로 누구나 미국사회에서 당하는 것이 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차별과 보이지 않는 차별이다. 여성으로서 미국 주류사회에서 당연히 무시당했다. 그 무시를 이겨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지닌 재능과 함께 당당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아시아계 후배 여성들에게 항상 충고하는 말이 있다.  ‘처음 보는 미국인들에게 인사할 때 절대 상체를 굽히지 말라’이다. 동양에선 그게 당연한 예절이지만 미국인들은 자기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해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디어 남에게 뺏긴 적 많지만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을 하면서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나 성과물을 남에게 빼앗긴 적도 많았지만 그로 인해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디어 6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더라도 그 사람으로부터 그 절반의 도움을 받으면 손해가 아니라는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 그런 여유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저서로서 ‘뚝심 좋은 마산색시 미국장관 10년 해보니’(1996년)를 펴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마산에서 자란 전 국장의 가족으로는 남편 전경철(70·아르곤연구소 연구원) 박사와  변호사와 할리우드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는 두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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