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 국민회’ 최후의 증인, 故 구융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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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5시 LA동문교회에서는 초대부터 장로로 봉직하다가 지난 3월 15일 사망한 고 구융회 장로의 장례예배가 엄수됐다. 이날의 장례식은 타운의 일반 장례식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신이 성전 앞에 안치되지만 이날의 장례예배에는 시신이 없었다.
고인의 영정도 앞에 놓이지 않고 뒷편에 자리잡았다. 특히 이날의 장례예배 순서에는 ‘고인의 답사’가 있었다. 돌아가신 분이 조객들에게 주는 답사였다. 이날의 장례예배는 ‘구융회 장로 천국환송 예배’였다. 구 장로는 임종전에 스스로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어둡고 무거운 찬송보다는 밝은 찬양을 원했으며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시신을 앞에 두고 장례예배를 드리기보다 시신은 화장한 후 사진만을 놓고 환송예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날 장례예배의 주인공 고 구융회 장로는 1909년 미주에서 창립한 대한인국민회가 1989년 해산될 당시의 기록과 청산업무를 맡았던 최후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성진 취재부 기자>


20일 시신화장 후 영정사진과 밝은 찬양 천국환송 장례예배
1909년 미주에서 창립한 대한인 국민회 청산업무 ‘최후증인’


이날 고 구융회 장로의 장례예배를 집전한 이규복 목사는 “나 하나가 살 때”라는 설교를 통해 “구 장로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나사로와 같은 삶”이라면서 “나 하나가 살 때 가정이 살고, 나 하나가 살 때 교회가 살고, 나 하나가 살 때 커뮤니티가 산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목사의 행복은 훌륭한 장로를 만나는 것”이라면서 “그런면에서 나 자신은 구 장로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 구본훈 목사는 조사에서 고 구융회 장로의 생전의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해 주었다.
구 장로는 선비적 인품과 신심의 성품으로 항상 자상함을 지닌 분이며, 겸손과 희생으로 삶을 살아가 명예나 부귀보다는 사회정의에 관심을 둔 분이라고 말했다. 또 구 장로는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이해심이 특출한 분으로 언제나 다정다감했다고 밝혔다.
그는 위선의 모습이 없었고, 허황된 것은 절대로 찾지 않았다. 이같은 구 장로는 자신은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고통스런 면을 지녔으나, 겉으로는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고인은 임종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성도들에게 보내는 유언을 녹음해 두었는데, 이날 장례예배에서 공개되었다. 고인은 성도들에게 “예수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며 신심을 강화할 것을 당부하면서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찬송가를 3절까지 힘들게 불렀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다”면서 찬송가가 3절에 이르자 조객들은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 구 구융회 정로는 1909년 미주에서 창립한 대한인국민회가 1989년 해산될


당시의 기록과 청산업무를 맡았던 최후의 증인이다.

마지막 증언
오늘날 국민회관기념관으로 복원된 국민회관의 원래 주인인 ‘대한인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한인 역사상 최초의 연합운동체로 창립되어 시대에 흐름에 따라 1989년 3월 7일에 해산됐다. 해산을 위한 마지막 공식회의를 기록한 사람이 바로 구융회 장로였다. 지난 2003년 9월 5일 구 장로는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면서 본보 특별취재반에게 약 3시간 동안 피맺힌 증언을 했다. 그는 국민회를 청산하는 마지막 회의록을 보여 주면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국민회관 사료 문제와 관련 “이런저런 사연으로 국민회관의 사료들이 분실되고 사그라지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메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67년 7월 13일 이민으로 LA에 정착한 구 장로는 당시 국민회 회장인 김성락 목사(작고)의 권유로 국민회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그 해 12월부터 그는 편집장과 주필로 근무하면서 신한민보를 창간호부터 자신이 만들 때 까지를 모두 읽었다고 했다.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에 대해 그는 “대학 공부한 것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을 배운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한민보는 한국의 국호와 연호 그리고 한글을 고수한 유일한 역사적 신문”이라며 “특히 세계 각 지역 동포사회로부터 접수된 전보문을 가지고 편집하는 등 살아 숨쉬고,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신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한민보의 기사는 조상의 눈물 자욱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미국에서 나라없는 한인들에게 조국의 정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1913년에는 미국정부로부터 ‘자치정부’의 대우까지 받을 정도로 역량을 보였다. 국민회가 보증을 서면 미 이민국도 한인동포에게 미국 체류증을 발급해 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단체였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에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회를 탄압했다. 1965년 개정이민법으로 한인이민이 대폭 증가되면서 미주동포사회는 새로운 커뮤니티로 형성되어 가면서 독립운동체였던 국민회는 회원들이 줄어들어 자연히 해산의 길을 걷게 됐다.
공식적으로 국민회 마지막 회장은 안승화(작고)씨였다. 국민회 마지막 회의는 1989년 1월 20일 오후 1시30분 LA코리아타운의 세종회관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안승화 회장을 포함해 이화목(작고), 안정옥 이사, 구융회 서기 그리고 김희선 재무 등 5명이었다. 이날의 주요결의사항은 국민회의 재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당시 국민회 재산은 국민회관에 보존된 유물과 사료 등과 ‘홈 세이빙 오브 아메리카’ 은행에 정기예금으로 기탁된 기금(만기일 금액 45,118달러 25센트)이었다. 회의에서 재산을 총영사관이나 동포단체등에 위탁시키자는 논의를 한 결과 국민회와 가장 유사한 흥사단으로 결정했다. 국민회는 은행예치기금 45,000 달러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측으로부터 받을 미수금(국민회는 자체 건물을 교회에 매각했다)까지를 흥사단에 기탁하는 조건은 ‘국민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일생을 청빈과 겸손으로 국민회 선조들의 삶을 살기를 원해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세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신문”


흥사단의 약속위반
또 국민회의 모든 유물과 사료는 흥사단이 위임을 받아 훗날 조국이 통일되면 책임있는 기념관에 영구 보존하도록 한다는 조건이었다.(아직도 이 유물과 사료에 대한 논쟁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회의는 이 결의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안승화 회장, 구융회 서기, 김희선 재무 3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들 3인은 그 해(1989년) 3월7일 왕관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흥사단에게 국민회의의 청산결의문을 발송하고 흥사단측의 공식 수락서를 받은 후 청산업무를 집행키로 했다.
당시 흥사단미주위원부는 위원장의 명의로 국민회의 모든 조건을 수락한다는 공문를 국민회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안승화 회장이 흥사단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기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졸지에 구 장로는 국민회 회장대행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국민회와 흥사단은 1989년 5월1일 한국회관에서 청산에 따른 기금전달식을 가졌다.
국민회로부터 ‘국민회 장학금 지급’ 조건으로 청산기금을 받은 흥사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3년 본보와의 인터뷰 당시 구 장로는 “오늘 날까지 흥사단이 국민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그 돈이 어떤 돈인데···국민회 청산을 담당했던 한사람으로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흥사단측에 연유를 알아보았는데, 자기들 단소(회관)구입비에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 분이 복바쳤다”며 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노감을 나타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시 흥사단에 촉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 장로는 끝내 흥사단에서 ‘국민회 장학금’을 지급 약속을 듣지 못한 채 별세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다”가 한이 됐다.
구 장로는 4년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이라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비젼을 우리사회가 지녀야한다”면서 “우리 한국인에게는 다른 민족이 지니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취재반에게 “젊은 세대에게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알려주는 일이야말로 희망의 비젼이다”라며 “국민회관 사료보존에 교회나 흥사단을 포함해 관련단체들이 서로 칭찬하면서 바른 길을 택하길” 당부했다. 구융회 장로의 삶도 신한민보에 서려 있는 선조들의 삶과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날의 고 구융회 장례 환송예배에 국민회와 관련이 있는 오늘의 국민회관기념재단이나 흥사단 등 한인단체 관계자들의 모습이 없었으나,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끼는 성도들과 조객들이 있어 그의 천국 환송예배는 한층 경건하고 성스러움마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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