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특집1> 이명박 당선자,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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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신화를 일궈냈다”
이명박 당선자를 두고 정치권에서 하는 말이다.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불과 35살에 CEO 자리에 오른 이 당선자에게는 항상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별명이 뒤따랐다. 지난 2005년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던 청계천을 복원한 후에는 ‘청계천의 신화를 일궈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제 그가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다시 한 번 신화를 만들어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손수 학비를 벌어 다녀야 했던 시골의 가난한 학생이 세계 10위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이명박 당선자의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한국지사 = 박혁진 기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살아온 길은 굴곡 많았던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광복, 한국전쟁과 자유화, 군사독재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와 세계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파고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넘어왔다.
이 당선자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데는 만큼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경험을 한 것이 그 이유다.













▲ 1980년대 말 현대건설 회장 시절의 이명박 후보(왼쪽). 인도네시아의 한 기업이 발주한


시멘트 공장 확장공사 계약 후 발주사 사장과 악수하고 있다.


격동의 한국사 몸으로 겪어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의 4남 3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족보에 올라있는 이 당선자의 이름은 형제들과 같이‘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때문에 곤욕도 치렀다. 일본식 이름이라는 이유에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뻥튀기장사, 과일행상, 환경미화원 등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고, 대학시절에는 6.3사태의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민주화 투사’라는 이력을 보태기도 했다.
철들기 전부터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벌였던 좌판은 그를 강인하게 단련했고, 찢어지는 가난함 속에서도 안정된 가풍을 만들었던 어머니는 그의 인간성 형성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수없는 위기에 맞닥뜨리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신념은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했다는 것이 이 당선자의 `자찬’이다.


‘샐러리맨 신화’


이명박 당선자의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은 `왕회장’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나고 부터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서 “부지런하고 판단력이 빨랐다”고 그를 평했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불과 35세에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쓰게 된다.
이 당선자가 현대 재직 시절 건설부 장관과 맞섰던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 말,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 당선자는 당시 세도가였던 건설부장관과 맞섰다. 중동경기 붐에 편승, 실력 없는 건설업체들을 마구 진출시키려고 한 정부 방침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건설부는 현대 산하의 한 회사를 불법기업으로 몰아 해체 압력을 가했다. 이 당선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탄원을 했고, 결국 청와대는 현대 손을 들어줬다.












▲ 이명박 후보(왼쪽에서 두번째)가 현대건설에 재직할 당시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를 하고 있다.

1980년 신군부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라는 경제정책을 들고 나와 현대자동차를 포기하라고 강요한 일이 있다. 국보위에 출두한 그는 군인들의 갖은 협박에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현대차는 남게 됐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이 당선자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盧泰愚)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천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치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 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 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1년여 와신상담하던 그가 1999년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하던 인터넷뱅킹 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이 한 때 대선정국에 최대이슈로 떠올랐던 `BBK 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씨다.


삼수 끝에 서울시장 당선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려던 차에 김 씨가 `수익률 조작’ 등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사업관계를 청산한 이 당선자는 2002년 삼수 만에 서울시청에 입성, 4년의 임기동안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등으로 주가를 올린 뒤 대권 도전장을 냈다.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이념, 연령,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원인도 보수정당 소속임에도 서울시장 재임당시 보여준 실천하는 모습이 이념적 스펙트럼과 상관없이 전 연령층에서 고른 득표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치 전문가들의 평가다.
“대한민국을 위해 온몸을 바쳐서 일하고 싶다. 5년간 정말 죽어라고 일하고 싶다”고 외쳤던 그가 과연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위해 어떻게 일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연보


1941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0년 동지상업고(야간) 졸업
1965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65년 현대건설 입사 
1977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78년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78년 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8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82년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85년 한라건설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7년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8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1992년 민자당 입당
1992년 14대 국회의원(전국구)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 
2002년 제32대 서울특별시장
2007년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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