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은행 최고의 경영자”-민수봉 윌셔은행 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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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봉 전 윌셔은행장의 2008년 새해 아침은 은행장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는 또 다른 도약의 기회로 맞이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 48년 간의 은행가 생활을 “전격적인 사퇴”로 마감하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택사스주에 마련한 자신의 골프장에서 2008년 새해 설계와 함께 황혼의 꿈도 마련했다.
그의 48년간 은행 생활 성적표는 개근상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단 한번도 업무를 쉰적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열성과 정열로 가득 찬 은행원 생활을 마감했다. 그만큼 부지런 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한국인 은행가 중에서는 기네스 북에라도 오를 기록이다.
그는 48년 은행 근무 중 13년간은 LA에서 보냈다. 지난 86년 상업은행 LA지점장을 인연으로 시작 윌셔은행장과 한미은행장을 역임한 것이다. 지난13년간 코리아타운에서 은행장 생활이었지만   코리아타운의 많은 사람들은 민 전행장을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타운에서 생활 했던 “올드타이머”로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친화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는 커뮤니티 행사에도 못 본체를 하지 않았다. 최근 그의 윌셔은행 행장직 사퇴는 은행들의 주가하락 시기에 나온 만큼 자칫 책임론으로 비춰질지 모르나, 은행가로서 민수봉 전행장은 “한인은행 최고의 경영인”이라는 크레딧으로 확고부동의 위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민 전 행장의 퇴임은 한인은행가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인은행가의 큰별 민수봉 전 행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여정과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성진 <취재부 기자>



“수렵표범”이라고 불리는 ‘치타’는 지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 달리기 시작해 2초만에 70km를 넘어서고 최고 시속 110km 를 달린다. 성질은 온순하여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길들이기 쉬워서 인도의 왕후는 치타를 영양 사냥에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치타’를 민수봉 전윌셔행장은 마스코트처럼 생각한다.
민 전행장은 지난해 말 행장으로서 마지막 결재 사인을 했는데, 그의 사인은 별명이  “치타 사인”이다. 그의 사인 모양이 ‘치타’의 날렵한 생김새와 비슷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는 40여년전 한국에서 은행 대리로서 처음 결재사인을 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한자 이름 ‘수’를 빨리 그리다 보니 그 모양이 ‘치타’의 모습과 유사해 스스로 자신의 사인을 “치타 사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류에 사인을 할 때마다 “치타처럼 민첩하게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한다.
윌셔은행장 시절에 그가 밸리에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프리웨이가 2번 도로이다. 그는 멀리 LA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을 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나에게 오늘 하루도 최대의 지력, 체력, 기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종교가 없는 그가 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이다.
민 전행장에게는 ‘은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70대에 들어설 그는 남 보기에 50대 후반으로 보여질 정도로 언제나 온화한 미소와 패기에 찬 저돌적인 돌파력과 치밀함은 친화력과 어울려 젊음을 보인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다. 친화력과 돌파력은 민 전행장의 이미지이다. 성실성과 뚝심은 그의 이미지를 바쳐주는 바탕이다. 한국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LA에서도 그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항상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한미은행장으로 재임시 한미은행을 한인은행 중 1위 은행으로 부상시켰고, 윌셔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겨 윌셔은행을 한인은행 중에서 최고의 성장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파란만장한 인생여정


민수봉 전 행장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부친이 사망해 홀어머니 품에서 자랐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그는 몸이 약해 어머니의 걱정과 보살핌 속에 지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주의 집안”이라는 성분 때문에 학대를 당해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월남했다.
서울에서 장충초등학교에 편입을 했으나 공부를 게을리하자 않아 당시 일류중학교인 서울중학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대구로 피난간 그는 동성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생활을 위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여 미군부대 물품을 팔았다. 생활전선에 나간 그는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수재들이 진학한다는 서울 상대에 입학했다. 대학생활 중에도 그는 누나를 도와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이런 생활이 그에게 친화력과 돌파력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으며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정신력을 불어 넣었다.
서울 상대 경영학과를 졸업 후 당시로는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인 은행원이 되었다. 상업은행에서 그는 기획업무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 인정을 받으면서 30대 중반에 해외지점장이 되었다. 그 후 상업은행장 비서실장. 국제부장. 시카고 지점장. LA지점장. 본점 이사. 상무. 상업증권 사장 등 고속승진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상업은행의 계열사인 상업증권 사장을 맡아 회사 규모를 2배로 확장해 제일은행에 성공적으로 매각했으나, 사실상 그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였다. 이 때 그는 LA 한미은행 이사회로부터 행장 영입제의를 받게 된다. 당시 LA한인은행가는 이사회와 경영진간에 마찰로 내분에 휩싸였는데 그 중 한미의 벤자민 홍 회장이 이사회에 의해 사퇴가 결정됐다. 당시의 한미의 내분은 주정부 은행 감독국에서조차 우려할 정도였다.
한미로부터 행장 영입 제의를 받은 그는 단숨에 LA로 날라와 이사진과 밤늦게까지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거처 정식으로 행장직을 맡게 된다. 상업은행 LA지점장 시절에 이미 한인계 은행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그에게 초창기 상업은행 행원 시절의 의욕을 상기시켜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았다. 당시 LA 한인은행권들은 한국식 은행 경영 방식을 따르고 싶어 했다. 여기에 한국식과 미국식을 조화시킬 경영자로 민 전행장은 안성맞춤인 셈이었다. 한편 그는 한미행장에 취임하면서 이사회의 부당한 간섭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다.












 


“뱅커 톱 경영자”
 
그는 1994년 한미은행장으로 영입됐을 때, 내심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은퇴할 나이에 미국에 왔지만 LA코리아타운에는 한국에서처럼 인맥도 없고 그를 바쳐 줄 그룹도 없었다. 영어도 유창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은행장으로서 특유의 친화력과 돌파력으로 인사관리와 경영에서 ‘성실성’을 무기로 삼았다. 결과는 한미은행을 한인은행 중 “넘버 원 뱅크”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한미은행행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인은행 최초의 인수합병을 성공시키고, 자동차 융자편리, 본국재산 관련 서비스 개발 등등을 포함한 신상품개발을 주도하며 타 커뮤니티 시장 개척으로 한미를 선두 주자로 만드는 선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한미은행을 떠나 윌셔은행장으로 옮길 때는 충격적인 뉴스메이커였다. 지난 1999년 6월 한미에서 두번째 행장 임기 계약이 10개월이 남았는데 돌연 행장직을 사퇴하고, 바로 윌셔은행
행장으로 취임한다고 발표해 코리아타운 은행가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전임 행장으로 이사회에 의해 사퇴를 당했던 벤 홍 전행장처럼 되지 않기 위한 선수를 쳤던 것이다. 한미은행 이사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한 그의 돌파력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한미은행 퇴임과 동시에 윌셔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경영능력은 한층 빛을 발하게 되었는데, 한미에서 얻은 경험과 한국에서의 경륜 등이 조화되면서, 당시 한인들에게는 생소했던 윌셔은행을 한인은행 “빅 4 뱅크”의 하나로 각인시켰다. 그 뿐 아니다. 취임 당시 불과 자산이 2억 5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윌셔를 부임 8년만에 20억달러라는 기록적인 성과를 올렸다. 또한 주가도 지난 2006까지 무려 1900%나 올렸을 정도로 무서운 성장세를 기록했다. 아마도 누군가 이 같은 기록을 깨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그의 능력은 미 주류사회에서도 인정했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전국의 4백78개 커뮤니티은행 중 최고의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 은행전문잡지 US뱅커지는 민 전행장을  ‘뱅커 톱10 최고 경영자 ‘로 선정 표지 모델로 실리며 각광을 받기도 했는데, US뱅커 잡지는   윌셔은행을 중형은행 그룹 중 최상위권의 경영실적을 올린 것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IBD(Investor’s Business Daily)는 전국 커뮤니티은행의 주당 순이익(EPS)과 같은 범주내 은행들의 실적, 주식동향, 순이익 등을 비교평가한 RS(Relative Strength)를 분석한 결과로 윌셔은행(심볼:WSBK)이 1위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인은행가에 또 하나의 전설을 남긴 채 떠나간 민 전행장에게 윌셔은행측은 사은의 한 방편으로 100만 달러 생명보험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민 전행장은 윌셔은행을 고속성장 시키면서 행장으로서 주주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특히 고석화 이사장을 LA한인사회 “억만장자”라는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당분간 택사스와 LA를 오가며 새로운 활동과 사업을 구상 중인 민 전행장이 또다시 ‘뉴스메이커’로서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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