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립문서보관서 OSS 요원 명단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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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항일투쟁에 참가했던 한인들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에서 핵심요원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8일 확인돼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OSS는 산하 극동작전국(FETO)과 중국에서 활동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동양인을 모집하면서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던 한국계 인사들을 대거 선발했다. 그 동안 한국현대사 소설 등에서 간간히 미국 정보부대에 한국계 인사들이 활동했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미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함께 OSS는 비밀요원으로 좌익성향의 조선 민족혁명당 미주 지부 소속 인사까지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가 공개한 OSS 요원 명단자료에 따르면 OSS는 1945년 일제 저항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한국그룹(Koran Group)을 만들었으며 함용준 박사 등 한국계 인사 80여명이 OSS 창설 초기인 1942년부터 1946년까지 가담했다.
                                                                                  <데이빗 김 취재부 기자>



이번에 국립문서보관서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전략정보국(OSS)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말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그룹(Korean Group)을 창설키로 하고 요원을 모집했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요원을 선발했다.
OSS는 또 한국그룹 요원 선발과 훈련을 담당할 ‘현장실험부대(FEU)’를 만들었다. 미 전쟁부의 특수기금으로 운영된 FEU에 장석윤 전 내무장관(1952년 1∼5월, 당시 상사)과 찰스 리 상사, 얼 S 벤 중사, 이태모 하사, 스탠리 D 최, 박기북 등 한국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장 전 장관은 1944년 7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김구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OSS 지부 설립 작업을 하다가 FEU 창립을 위해 급거 소환됐다. 앞서 그는 인도에 101부대원으로 파견돼 미군 전투원들을 위해 식량보급선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미국 정부가 전투 등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다른 나라 시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한국그룹의 지휘관으로는 함용준 박사가 선발됐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에서 강의했던 그는 미 해군정보국(ONI)에서 정보훈련을 받았으며 OSS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캘리포니아주 뉴포트 해안에 있는 ‘서해안 훈련센터’에서 1945년 3월부터 약 2개월간 실시됐다. OSS는 그를 지휘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1945년 1월 미국에 귀화시킨 뒤 같은 해 3월 ‘임시’ 대위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대부분 30∼40대였던 이들은 다른 미국 요원 4명과 함께 1945년 8월 1일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중국 충칭에서 한국인 등 200명을 모집해 한국 침투훈련을 시키고 지하 네트워크를 구축해 정보수집 및 분석, 역공작을 추진하는 것 등이었다.
OSS 한국그룹 요원으로 최종 선발된 사람은 이종석(Frank Lee), 서상복, 남궁탁(Peter Namkoong), 이경선, 이창희, 김순걸, 김추항(David Kim), 김훈(Chester Hoon Kim), 해리 리(Harry Lee) 등 9명이었다. 서상복은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재학 중 행정업무 전문가로 채용됐으며 한국그룹의 수석요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23세로 가장 나이가 어렸던 해리 리는 예일대 중국어학교에서 언어심화 훈련을 받았으며, 다른 요원들은 캘리포니아주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초기 한국 요원들의 임무는 일본어 통역 및 번역, 일본 무선 감청 등이었다. 강한모는 미 육군 통신부대 출신으로 1944년 9월 일본 무선감청 목적으로 OSS에 차출됐다.
조선기독학교(연세대 전신) 출신 윤기승은 일본어 및 중국어 통번역 및 현장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을 무대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점 조직원으로 움직였다.
1943년 9월부터 전쟁부 언어부대에서 근무했던 곽충순은 부부가 일본 우편물을 검열하는 작업을 했다. 조선기독학교 출신인 그는 H H 언더우드 박사와 친분이 있다고 밝혔으며, 전쟁부에서 한영사전 및 영한사전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전조셉(육군 사병)은 하버드대에서 일본어 훈련을 받다가 OSS 극동작전국으로 차출됐다.
군부대 밖에서 선발된 요원들은 상당수가 독립운동을 염두에 두고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가정주부와 이발사 등도 OSS에 지원해 독립운동 열기를 보여줬다. OSS 인사서류에 첨부된 신원 검열 보고서에는 ‘일본에 대한 불만’이라는 항목이 첨부돼 있어 반일 정서가 한국 요원들의 선발 기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종 선발된 한국계 OSS 요원들은 상당수가 신학교 출신 등 고학력 인사들로 재미 독립운동단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1942년 9월 워싱턴 대한민국 구미위원부(의장 이승만)가 OSS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이 박사가 추천하는 인사 8명을 포함해 9명의 이력서를 보내며 “이로써 모두 23명의 이력서를 제출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이 박사의 추천을 받아 OSS에 지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박사의 비서였던 장기영씨는 미네소타주 새비지에 있는 군정보서비스(MIS) 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번역가로 채용됐으며, 1942년 12월에는 극비 해외방문 허가를 받아 활동했다.
김태춘은 YMCA 및 신간회 회원으로 이 박사의 추천을 받아 OSS에 지원했다.


이색인물


조선기독학교 3대 교장이던 H H 언더우드(원한경) 박사는 1942년 9월 조사·평가 컨설턴트로 채용됐으며, 요원 후보자를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현장 대표’로 채용됐으며, 연봉은 4300달러로 당시로는 거액이었다. 그는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파견돼 현장을 조사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OSS 정보보고에 따르면 그는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 일제에 호의를 보여 ‘효과적인 요원이 되지 못하며 연합점령군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해군 장교인 H G 언더우드(원일한) 박사는 OSS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와 동생이 비슷한 일을 하고 있고 지휘관이 거부한다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했다. 김하태 전 목원대 총장도 1942년 6월 OSS에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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