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간첩 원정화 사건 ‘후 폭풍’ LA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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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간첩 원정화 사건은 미국에 망명신청을 하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에게 있어 날벼락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LA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들은 ‘원정화 사건’이 자신들의 망명신청에 혹시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한 소식통은 “현재 미국정부에 망명신청을 한 탈북자들이 이번 사건으로 만에 하나 자신들의 수속이 지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미 정부를 상대로 탈북자들의 망명신청을 도와주고 있는 한 법조인은 “이미 미국정부는 오래 전부터 세계 각국에서 오는 망명신청자들을 심사할 때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 “이번 한국에서 보도된 간첩 사건으로 탈북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최근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 정대상(가명)씨는 미국 망명심사과로부터 “가까운 시일에 귀하의 망명신청에 대한 결정을 서류로 통보할 것”이라며 “필요한 노동허가 등을 신청할 것”을 안내하는 서류를 받았다. 인권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정씨는 빠르면 이달 중 난민에 해당하는 망명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워싱턴 DC의 주한미대사관과 LA·뉴욕 등 한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공관의 정보 관계자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탈북 위장 간첩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LA에서 2~3명의 탈북자를 상대로 정보관계자들이 소재를 파악하는 등 구체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한편 지난호(656호) 본보의 보도가 나간 뒤 ‘일부 목사와 단체 임원들이 북한의 공작과 관련됐다’는 제보가 줄을 잇고 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현재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갖가지 괴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의 가족이나 친지를 통해 ‘제2의 원정화’가 나올지 모른다는 보도내용을 듣고 이를 이웃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관련 소식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정화 사건도 원정화로부터 학대를 당한 조선족 가정부의 이야기가 정보 관계자들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수사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주 본보의 특집보도가 나간 뒤 미 거주 탈북자 사이에서 “미국 내 탈북자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다” “누구는 평소 언행이 이상했다”는 등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 김석재(40대·가명)씨에 대한 첩보는 LA총영사관(총영사 김재수)에까지 전해져 관계자 들이 김씨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그의 탈북 과정부터 의문에 싸여있다. 김씨가 탈북 당시 전혀 북한 체제에서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는 점부터 시작해, 그가 북한을 빠져나와 중국에 피신하는 과정도 의혹투성이다.
김씨는 북한에서 도망친 뒤 중국의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움직였다. 어느 날 중국 공안원들이 피신처를 급습했지만 당시 김씨는 현장에 있지 않아 체포를 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체포된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강제 송환돼 처형 또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이 강제 북송 되는 과정에서 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는 당시 현장에 없었던 김씨의 행적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후 김씨는 한국에 입국해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여성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일부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김씨가 다른 이들보다 빨리 망명허가를 받은 점도 수상하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그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아 더 큰 의혹을 뿌리고 있다. 망명허가를 받은 김씨 부부는 한국으로 들어가 거액의 정착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총 1억3천여만원의 지원금과 임대 아파트를 받았으며 주거지원금으로 750만원을 따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부부는 지난 2003년 미국으로 출국할 때까지 매달 생계비로 미화 1천 달러 정도를 보조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탈북자 남애자(여·40대·가명)씨 역시 위장 탈북자로 의심을 받는 처지다. 일부 탈북자들은 남씨의 행적이 원정화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한 탈북자는 “그녀가 한 곳에 있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하다”면서 “남씨가 이웃들에게 말하는 내용은 탈북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고 말했다. 남씨는 김정일 정권을 두둔해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탈북자는 “남씨가 탈북자들 사회를 이간질했다”면서 “원정화 사건을 보고 미주 사회에서도 충분히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탈북자 망명신청 120건


미국에서 추진 중인 탈북자 망명재판은 2006년 기준 120여건에 달해 현재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들은 한국에 정착했다가 정식으로 미국 입국 비자를 받아 미국에 온 경우뿐 아니라 멕시코를 통해 밀입국으로 미국에 들어와 망명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미국 내 정확한 탈북자 수는 조사되지 않았으나 인권단체 추산에 따르면 적어도 200명 이상이 미국 사회에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망명 지위 획득을 돕고 있는 로베르토 홍 변호사는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미국에 건너온 탈북자들이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며 “수많은 탈북자들이 망명이 아닌 ‘국제 미아’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 변호사에 따르면 현재 미국 체류 중인 탈북자의 수는 200여명에 달한다. LA지역에만 50가정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자들이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는 겉과 속이 다른 미 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미 의회는 지난 2004년 북한 인권법(NKHRA)을 제정해 탈북자들의 미국 망명을 허용한 바 있다. 법대로라면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다 해도 미국으로의 난민 또는 망명신청 자격을 제한받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라는 것이 홍 변호사의 설명이다.
지난해 4월 최상위 이민행정법원인 BIA가 오히려 이 NKHRA 법 조항을 왜곡 해석해 한 탈북자 가족에게 망명 지위를 줄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 단적인 예다. 홍 변호사는 “당시 BIA는 본인들이 원해 한국 국적을 이미 취득한 이상 미국 망명은 ‘거주 재정착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댔다”며 “법 자체는 망명을 허용하면서 시행은 불가능하다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홍 변호사는 가두시위를 선택했다. 홍 변호사는 “선교 단체도 중국 내 탈북자보다 미국에 이미 건너온 탈북자들부터 먼저 챙겨야 순서라고 생각한다”며 “미국 정부가 러시아 거주 유태인들의 망명을 허용했던 전례가 있는 만큼 목소리를 모은다면 탈북자들의 망명 또한 충분히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망명 지위 획득을 위한 가두시위는 지난 1월 23일 오후 LA다운타운 연방법원 앞에서 열렸다. 이날 시위에는 LA기독교 윤리 실천운동본부와 탈북난민들의 망명을 도와온 워싱턴 DC의 ‘사랑 나눔의 터’ 조윤희 대표가 참가해 탈북민들의 인권보장을 요구했다.
탈북망명자지원회의 로버트 홍 대표에 따르면 미 의회가 지난 2004년 북한 인권법(NKHRA)을 제정해 탈북민들의 미국망명을 허용했으나 지난해 4월 이민행정법원이 이 조항을 왜곡 해석해 탈북민들의 망명 지위를 줄 수 없게 했다.
홍 대표는 “미의회는 망명을 허용했으나 시행이 불가능한 모순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자유를 찾아 미국에 건너온 탈북자들이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고 성토했다.









“망명허가 내준다”













한편 미국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 프로젝트의 주디스 우드 대표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탈북자들의 망명추진 현황을 전하면서 앞으로 추가 망명 승인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은 탈북여성 최모(33)씨는 2001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2005년 7월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한 뒤 지난 2006년 초 망명을 신청해 미 이민법원으로부터 망명 승인을 받았다. 한국에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탈북자에 대해 미 법원이 망명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지난 2006년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에 이어 최씨가 두 번째다. 최근 미국정부가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미국에 망명 신청한 탈북자들에 대해 허가를 내준 것은 노무현 정권에서의 차별정책을 염두에 둔 것으로도 풀이된다.
또 미국 정부는 지난 1월 이민법원의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망명국 심사만을 통해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자 부부의 망명 신청을 승인해 관심을 모았다. 북한을 탈출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탈북여성 이모(44)씨와 남편 유모(46)씨는 지난 1월16일 미국 국토안보부 이민국 (USCIS)으로부터 망명 승인을 받았다. 이민법원의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망명국 심사만을 통해 망명허가를 받은 것은 이례적이다.
이씨는 당시 VOA와 전화통화에서 자신들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2004년 1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왔으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미국 망명을 결심했으며 2006년 4월 비자를 정식으로 받고 미국에 들어가 망명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탈북자들이 많이 오니까 일거리가 없어 더는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씨 부부의 망명을 도운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 프로젝트’의 주디스 우드 변호사는 이 방송과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탈북자들의 망명 신청을 지원해 오면서 이민법원이 아닌 망명국 심사 과정만 통해 승인이 나온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미인계’ 제보 줄이어


여간첩 원정화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기존 ‘아날로그 간첩’과 달리 무전기와 난수표를 전혀 사용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E-mail과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중국 거점 공작원들과 의사소통을 하다 검거된 후 드러난 또 다른 사실은 남한 체류 중 일본을 3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결혼상담소 소개로 일본 남성과 맞선까지 본 사실이 일본 유력 일간지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지난주 본지가 보도한 ‘북한 ‘미인계’에 놀아난 미주 종교인, 사업가, 단체장 등 동포 많다‘는 내용과 관련해 관련 제보도 줄을 이었다. 한 제보자는 “또 다른 모 인사가 방북 중 고려호텔에서 미인계에 놀아나 북한 요구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제보자는 “현재 친북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한 교회 목사는 초대소에서 ‘미인계’에 걸려 북한의 지령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미인계’ 제보와 달리,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 중 한 방북자는 “북한에 가보니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는 친북 관계자들이 거의 고정간첩 수준으로 활동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방북자는 “북한 관리들이 LA 코리아타운에 대해 어떤 점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이는 누군가가 매일 북한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한 관계자는 “LA에서 한국어 신문은 3일이면 평양에 보내지고, 업소록 등 중요 발간물 등도 1주일 내에 모두 평양에 도달한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원정화 사건이 새삼 한국은 물론 해외교민사회에도 충격을 주고 있음에 위기를 느낀 북한은 ‘한국의 날조극’이라는 상투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2003년 해외반체제인사들의 잇따른 한국방문 소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지난 60년대 이후 해외에서 민주화 투쟁으로 귀국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초청하는 행사였다.
독일의 송두율 교수와 LA 선우학원(작고) 박사도 포함됐다. 그러나 송두율 교수가 ‘북한 노동당 김철수’인 사실이 확인돼 결국 구속되는 등 이 행사와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간첩시비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LA에서 대표적인 친북 인사로 알려진 김운하(신한민보 발행인)씨 부부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김씨 부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청이 아니라 도산기념사업회(당시회장 서영훈)의 초청을 받았다. 당시 타운에서는 “김운하씨가 친북인사인데 어떻게 서울을 가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에서는 “그가 전향을 했다는데 사실이냐”며 반신반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리차드 윤 취재부기자>


91년부터 본격적 친북













▲ 전 신한민보 발행인 김운하
1988년부터 전금여행사를 운영하면서 미주동포들을 대상으로 방북단을 주선 하며 각종 세미나를 통해 노골적으로 북한을 지지했던 대표적 친북인사 김운하씨는 지난 2001년 7월 MBC-TV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프로그램은 과거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의 김씨의 반독재투쟁사를 소개했다.
<조선일보>기자 재직 중 72년 LA에 정착한 김씨는 박정희 정권 당시 미국의회 프레이저위원회에서 박 정권의 해외동포 탄압사례를 증언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당시 김씨는 한 중정 요원으로부터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첫째는 비판을 중지하고 한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것, 둘째는 신문사을 팔거나 폐업하는 것, 셋째는 보복을 당하는 것이었다. 김씨가 이 통첩을 무시하자 중정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 결과 친척, 친지들이 멀어져 갔고 신문사 직원들은 사직했으며 새로운 직원도 구할 수 없었다. 김씨 부부는 두 사람만의 힘으로 신문사를 꾸려나가야 했다. 당시 신문사에 지금의 장태한 교수(UC리버사이드대), 찰스 김(KAC사무총장)씨 등이 자원봉사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말대로 그가 공산주의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김씨는 지난 1972년 ‘신한민보’를 인수해 반독재, 반정부 기사를 게재하고 이와 관련한 행사를 주도했으며 경우에 따라 김일성에 대한 찬양일변도의 기사를 게재해 한국의 중앙정보부와 LA총영사관 등에서 ‘친북’으로 분류돼 동포사회에도 이 같은 인식이 퍼져 나갔다.
그 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해외동포들의 방북이 허가되자 1988년 전금여행사를 인수해 북한 관광단을 모집, 동포들의 방북을 주선하면서 친북성향이 노골적으로 두드려지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김일성 찬양발언


김씨 부부는 당시 LA에서 개최된 ‘북한 바로알기’ 세미나에서 6·25 북침설과 고려연방제 지지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91년 1월 일본 조총련계로부터 북한조선통신을 수신해 ‘미주 조선통신’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친북활동에 나섰다.
김씨는 이 통신을 통해 김일성의 신년사를 게재하고 북한의 정치 선전 창구역할을 담당해왔다. 1992년 2월에는 ‘김정일 선생 51돌 생신축하회’를 열어 축하 연설을 하고 ‘조국 떠난 멀리서’라는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북한 도서 3만 권을 수입해 전시회를 열었다.
그 해 10월 김씨는 노동당 창건일에 방북 했다. 그는 1994년 4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 탄신 82돌 축하회’를 개최했으며 같은 해 7월 ‘김일성 사망’ 소식이 발표되자 LA 사무실에 빈소를 설치하고 장례식 참석차 북한을 찾기도 했다. 1995년 이후 김씨는 전금관광여행사를 통해 북한교역을 시도한 바 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1995년 3월3일자에서 김씨의 대북경제활동을 소개했다. 신문은 남북경협에서 ‘미동포사회가 유력창구로 떠오르고 있다’는 제목에서 <친북단체 가운데 경제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기업은 김운하씨가 지난 1월 세운 조선네트워크회사(CNC)다. 그는 신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 그리고 북미조선친선협회 공동의장 겸 사무총장, 조미상공인협회 간사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북한 투자창구 일을 맡아 투자사절단 조직, 광고대행업무, 북한상품의 대미수출을 위한 전시소개업무 그리고 북한 쪽의 대미 홍보활동을 대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고려항공과 평양축전 참가 및 관광을 위해 미주총대리점 계약을 맺은 전금여행사 사장이 바로 김운하씨의 부인 김충자씨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는 별개로 미국이란 사회에서 친북단체의 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자본주의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일반 동포들에게 이들의 행동은 관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자금력도 그렇고 미국이 가진 반공적 성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사업의 중점은 평양축전 행사에 관련돼 있을 뿐 특별한 이슈는 없다>고 보도했다.









도산기념사업회 개입 의혹


김씨는 북한에서 김정일 비서의 통치가 시작된 1995년~1997년까지 해마다 2월에 ‘김정일 생일 축하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 사진전과 관련해 충돌사건도 일어나 미국경찰이 출동하는 등 국내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97년 2월 김정일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자 6·25참전 동지회 등 한인단체 회원들이 몰려가 전시회 중단을 요구하며 몸싸움을 벌여 경찰이 출동하는 이른바 ‘김정일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김씨는 부인 김충자씨가 운영하는 전금여행사 사무실에서 산업현장 시찰 등 김정일의 최근 활동을 담은 컬러사진 50여점과 금강산 등 북한 풍경을 담은 10여점의 사진 등으로 「김정일 장군 탄신 55돌 축하사진전」을 열었고 재미 보수단체들과 충돌을 빚어 본국에 보도된 것이다.
김씨는 북한선전활동에도 관심을 보여 1995년부터 ‘향도의 태양 김정일 장군’이라는 책자를 반입, 언론과 동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96년 10월 북한 잠수함 사건이 발생하자 “훈련 중 좌초한 것인데 한국 정부가 이를 무장 공비 남파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김씨 부부는 1997년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 월북사건으로 다시 한번 친북활동이 국내외로 크게 알려졌다. 안기부는 이와 같은 사실을 들어 이들 부부가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이라고 밝혔다.
당시 중앙일보, 한겨레, 대한매일 등도 안기부 발표를 인용해 “김운하씨 부부는 재미 북한공작원”으로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은 1997년 8월22일자에서 안기부가 오씨를 베이징까지 동행한 김충자씨와 남편 김씨를 ‘북한을 각각 30∼50회 이상 방문한 사실이 있는, 미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북한 공작원’으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1997년 9월13일자에서 오익제씨 월북사건을 수사 중인 국가안전기획부는 오씨가 출소한 미전향 장기수들의 북송을 추진한 사실을 새로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이 기사에서 “오씨는 또 미국 LA 전금여행사 대표 김충자·김운하 부부 외에 월북한 최덕신씨의 장남인 재독교포 최건국(55)씨, 실향민단체인 효도회 회장 장승학(68)씨를 통한 베이징(북경)대 최응구(60조선족) 교수 등 3중으로 북한과 연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북한찬양 중지 다른 이유는?


지금까지 방북한 횟수는 김운하씨가 50여회 이상, 김충자씨가 30여회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독교신자인 김운하씨는 불교에도 관심을 가져 법명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김씨 부부는 3년 전부터 북한방문을 중단했다. 대신 미국의 여러 주를 여행하면서 남북한 미술품전시회를 개최해왔다.
목적은 전시회 수익금 일부를 현지 한인동포단체들에 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LA이외 다른 주 한인단체들과 연결을 맺기 시작했다. 이들은 2002년부터 LA 한인단체들과도 조심스럽게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회관복원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도산기념사업회와 손을 잡았다. 당시 도산기념사업회 내에서 국민회관복원추진위원장을 맡은 이만열씨와 마산고교 동문이라는 인연으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만열씨는 김씨가 중요한 독립운동사료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이를 기증받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독립운동자료를 기증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친북활동”을 면제받는데 도산기념사업회가 다리를 놓아 줄 것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도산기념사업회는 당시 홍명기 회장이 주도하는 복원위원회에 김씨를 실행위원으로 추천하면서 김씨가 LA한인사회에 ‘친북’의 탈을 벗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씨의 북한 방문 중지 이유는 김씨가 북한정부 고위인사들을 상대로 금전적인 잘못을 저질러 방북이 금지됐다는 소문이 친북인사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어 사실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는 김씨를 이어 민족통신을 운영하는 노길남씨가 북한정부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씨는 최근 김일성 대학으로부터 정치학 박사를 수여 받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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