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수호 최전방 사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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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인권과 관련해 주목받는 두 사람이 있다. ‘한국인 보다 북한동포를 더 생각하는 미국인’ 수잔 솔티 디펜스 포럼 재단 대표와 재미탈북자로서는 최초로 목사로 변신해 북한 선교에 투신하게 된 김용 재미탈북자협회장이다.
솔티 여사는 북한인권운동에 공헌한 공로로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 오는 10월 7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시상식을 갖는다.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솔티 여사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수상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LA한인사회는 솔티 여사를 위한 환영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미주 탈북자 가운데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아 북한 선교에 나서는 재미탈북자협회 대표 김용 회장의 인생 역시 파란만장하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악명 높은 북한 정치범수용소 14호를 극적으로 탈출한 김 목사.
그는 미국에 건너와 비참한 북한의 인권실태를 폭로해 북한인권법 통과에 증인이 된 주인공이다. 김 목사는 “하느님의 목자로 새로 태어나 고통 받는 북한 동포 사역에 남은 인생을 걸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성 진 취재부 기자>


한국인보다 진한 북한 동포사랑


서울평화상 수상이 결정된 뒤 솔티 여사는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탈북 난민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크고 훌륭한 상까지 받게 돼 영광이다. 비참한 북한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행동을 하는 것은 시대적 양심”이라고 밝혔다.
12년 동안 탈북자와 국군포로를 포함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힘써온 여성 지도자인 그는 북한과 탈북자에 관한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행동가다.
지난 2005년 5월 LA코리아타운 갤러리아에서 국군포로송환위원회(회장 토마스 정 박사)가 주관한 ‘북한학살세계순회LA전시회’도 직접 나서 북한의 참상을 고발했다. 당시 솔티 여사는 전시된 북한 탈북자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같은 민족이 비참한 꼴을 당하는 것을 방관하는 정부도 문제다”라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최근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를 묘사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가 미국 순회공연 준비과정에서 좌초될 위기에 빠졌을 때 직접 나선 것도 그다. 당시 워싱턴DC에 예약된 극장이 계약상의 이유로 대관료를 올려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솔티 여사는 “이 공연은 반드시 무대에 올려야 한다”며 자신의 집을 담보로 내놓기도 했다 했다.
국군포로송환위원회의 토마스 정 박사는 “같은 한국인도 하기 힘든 결정을 솔티 여사는 행동으로 보여줬다”고 말했다.













 
양심이 인권운동으로


북한인권 운동에 나서기 전 솔티 여사는 예전에는 자유를 찾아 구 소련연방, 중국을 떠나 온 망명자들을 돕는 일을 했다. 그러다 북한인민들의 참상을 알게 됐고 북한관련 사업에 매진하게 됐다. 러시아·중국 등 다른 나라들을 위해 일하는 미국인, 외국인들은 많지만 유독 북한사람들을 돕는 손길은 적었기 때문이다.
솔티 여사는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며 이 문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가보지도 못하고, 사진·영상자료 조차 변변찮은 북한의 실상과 인권에 대해 지지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솔티 여사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수단의 다르푸르나 티벳은 그래도 사람들의 접근은 가능하지만, 북한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에 매우 힘들다”며 “북한에서 일어난 일은 수단이나 티벳에서 일어나는 일보다도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을 ‘자매’(Sister) 라고 부르면서 힘을 줬던 탈북자들이 힘들고 외로운 인권 운동의 길에 있어서 동반자라고 말했다. 최근 목사로 새롭게 태어난 재미탈북자협회 김용 회장의 미국 망명을 적극 도왔던 솔티 여사는 힘든 가운데도 자신을 믿고 격려 해주는 탈북자들을 보면서 힘을 얻는 다고 밝혔다.
솔티 여사는 또 “1990년대 중반 북한의 300만 대량아사 소식은 내 양심을 일깨웠고, 그동안 많은 탈북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달려오게 만든 힘이다. 아직 할 일은 너무 많다”고 말했다.
여사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어느 날,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한 편의 글이 올라왔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도롱뇽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종교편향을 주장하는 모 스님이 금강산 절간에 돈을 갖다 부을 때. 미국의 수잔 솔티 여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위한 것이 수상의 이유라면 당연히 같은 동포인 대한민국 사람들 중 그 수상자가 나와야 했다. 그러나 같은 동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잔 솔티처럼 북한 동포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수잔솔티는 누구?


수잔 솔티 여사는 인권연구단체인 ‘디펜스포럼재단’(Defense Forum Foundation) 대표로 재직 중이다. 디펜스포럼은 미국의 국가안보·외교·인권문제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민간단체로 1996년 솔티 대표 주도로 탈북자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솔티 여사는 미국의회와 백악관 등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03년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의 방미를 주도한 것도 그다. 그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청문회를 1999년 4월 처음으로 개최하는데도 기여했다.
또 미 상원 법사위원회와 하원 국제종교자유위원회에서 북한인권 상황, 정치범수용소, 중국 내 탈북난민의 고통 등 북한인권 실태를 증언해 북한인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제고시켰다. 특히 미국의 ‘2004 북한인권법안’ 통과와 ‘2006년 북한 자유주간행사´ 등에 앞장서기도 했다.
솔티 여사는 북한자유연합(North Korea Freedom Coalition) 회장으로 2004년 이후 북한자유주간을 주최해왔으며 2005년 북한인권법안 통과를 위해 강력한 로비를 주도해왔다. 2004년 LA 국군포로송환위원회(회장 토마스 정 박사)와 연계를 맺고, 국군포로 송환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와 공청회를 개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선교목사로 다시 태어난 탈북자


지난 20일 오후 5시 3가와 알바라도 인근 국제기독성경교회에서는 조촐하지만 엄숙한 예식이 거행됐다. 이날 재미탈북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일해온 김용 탈북자협회장이 다른 3명의 목사 후보자들과 함께 프랭크 스트레인저스 목사(President, International Evangelism Crusades)로부터 안수를 받고 선교목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날 김용 목사는 신임 목사들을 대표해 축도를 마친 뒤 본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 목사는 “내가 목사가 된 것은 고통 받는 북한동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계시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김책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국가보위부에 들어가 중좌(중령)까지 오른 엘리트 출신이었던 김 목사는 하루아침에 ‘간첩의 자식’으로 몰려 정치법 수용소에 갇히며 생사를 넘나든 인물이다,
북한에서도 악명 높은 14호 정치범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해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천안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솔티 여사의 도움과 북한인권법을 주도한 샘 브라운 백 상원의원 등의 후원으로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
LA에 거처를 정한 김 목사는 재미탈북난민협회장으로 탈북자들의 미국입국과 정착을 돕는 한편 신학공부에 전념해 4년 만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됐다.
1950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북한 국가 보위부에서 일본에 어류를 수출하는 서해아사히무역회사 부사장으로 일했다. 북한사회 고위 관리였던 김 목사가 관리소에 수감된 것은 우연히 김씨의 출생 성분과 관련된 과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씨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와 형이 미군의 간첩으로 활동하다 발각돼 처형됐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의 출생서류를 위조한 것. 이 사실은 진급 심사에서 발각됐고 김 목사는 1995년 평남 개천 14호 관리소와 북창군 덕창리 18호 관리소에 수감돼 4년여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김 목사는 “아버지가 간첩이었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고 체포돼 인권을 유린당했다”면서 고문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손목과 이마를 보여 주기도 했다. 김 목사는 ‘한번 들어가면 절대 살아나올 수 없다’고 알려진 18호 관리소에서 탈옥을 결심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어머니 덕분이었다. 김 목사의 모친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그의 탈옥을 격려했으며, 마침내 김 목사는 지난 1998년 석탄을 나르는 기차 숨어 타고 관리소를 탈출해 1년 만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악명 높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


귀순자들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수용소는 크게 두 개 부류로 나뉜다. 종신수용소로 다시는 일반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이 그것이다.
수용자는 광산, 벌목장 등에서 처참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결국은 수용소 내에서 죽는 게 보통이다. 완전통제구역의 수용자들에게는 사상교육을 시키지 않고 채광 및 영농기술 등 생산에 필요한 지식만을 교육시킨다.
반면 혁명화구역은 ‘가족구역’과 ‘독신자구역’으로 나뉜다. 여기에 수감되는 정치사상범은 일정기간(1년 내지 10년) 경과 후 심사결과에 따라 출소가 가능하다. 출소할 때는 수용소 내 생활상을 일체 누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되고 이를 위반하면 재수감된다.
강제수용소에서 출소된다 해도 적대계층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최하층 생활을 면치 못한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최우선 감시대상이 돼 취직·이사 등 모든 생활에서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이 출소 후 일반 형사범죄를 저지를 경우엔 형량이 10년 가중된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중 함남 요덕의 ‘15호관리소’만이 유일하게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으로 이분화돼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완전통제구역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아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수용소는 15호관리소 내의 혁명화구역뿐인 셈이다.
혁명화구역에는 대체로 북한의 엘리트와 재일조총련 간부와 인연이 깊은 북송교포나 그 가족들이 수용된다. 북한당국은 이들을 수용소에 수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가한 뒤 사회에 복귀시킴으로써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 순응케 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사상범들은 모두 종신수용소에 수감된다.


(자료제공:북한민주화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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