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동포 애절한 애환 담은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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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말 한국에서 발간된 ‘고향마을 살구꽃은 피는데…’는 탈북자들의 편지 모음집이다. ‘떠나 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새조위(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가 탈북자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자 기획한 책이다.
책은 탈북자들이 북한 가족에 보내는 피맺힌 사연을 담고 있다. 이들이 차마 부칠 수 없는 얘기들, 겉봉에 주소를 써도 부칠 수 없는 편지, 우표를 붙여도 배달되지 않는 편지를 서적으로 묶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는 혈육이 받아볼 수 없는 편지를 눈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이탈주민’ 혹은 ‘탈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미국 땅, 우리 주위에도 있다. 지난 18일 오후 LA침례교회 208호실에는 탈북 동포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봉사단 약 100명이 한자리에 모여 미국 땅에서 탈북동포들이 겪는 아픔과 이들을 돕기 위한 대책이 논의됐다. 특히 이들의 미국망명에 대한 커뮤니티의 이해와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날 ‘탈북동포 관계포럼’은 탈북망명자지원회(대표 로버트 홍)와 LA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홍진관,허성규·이하 기윤실)이 공동 주최했다. 김동진 목사(탈북망명자지원회 실행위원)의 사회로 2명의 탈북동포의 간증과 한국일보 옥세철 논설위원이 ‘가치동맹’이라는 주제로 주제 강연을 했으며 추덕엽 목사(그리신 교회)의 패널토의, 이민생활 지침서를 간행한 김종현씨가 탈북동포들을 위한 미국생활 안내 등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이창우 목사(오렌지 열린문교회)와 김병호 목사(횃불교회)가 각각 기도를 통해 탈북동포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동포들과 단체들의 사명을 고취했으며, 주최단체들의 사역보고도 발표하는 등 약 2시간 30분 동안 진지하게 진행됐다.


                                                                                               <성진 취재부기자>



북한 체제의 억압과 굶주림을 피해 한국을 택한 탈북동포는 지난 6월 말 현재 1만6000여명으로 곧 2만 명을 돌파할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탈북동포들은 대한민국 주민증을 발급 받고 신분상으로 어엿한 한국인이지만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이들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탈북동포 대부분은 혈육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이어서 이산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산다.
탈북동포들 중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온 사람들도 300여명이나 된다. LA지역에만 약 5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왜 이들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만리타국 미국에까지 오게 됐을까.
지난 10년간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당시 이들 탈북동포들은 겉으로는 ‘자유와 풍요의 나라 대한민국 품에 안긴 동포’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다. 많은 탈북동포들은 남한 내 북한  세력에 의해 공포에 떨었다. 과거 정권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나 북한정보원들은 자유롭게 남한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한 탈북동포는 전화로 이들 북한 공작원 등에 의해 상습적인 공갈과 협박을 당했다. 자택 창문에 칼이 놓여있기도 했다. 또 다른 탈북동포의 딸은 학교에서 동료학생들에게 집단 따돌림과 학대를 당했다.
마침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을 듣자 일부 탈북동포들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일부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처음부터 미국행을 원했으나 당시 정권의 외교관들이나 국정원은 이들의 한국행을 유도했다. 정권에 의해 한국에 들어온 탈북동포들은 한국에 들어왔으나 이번엔 북한의 ‘이중간첩’으로 몰려 감시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일부 탈북동포들은 또 다시 한국 땅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온 탈북동포들은 망명신청을 했으나 북한인권법으로는 망명을 허가받을 수 없다. 현재 탈북망명자지원회와 LA 기윤실은 미국정부에 대해 200여명의 탈북동포들의 망명허가를 건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부터 서명운동과 시위 등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아메리칸 드림 꿈꾸며···


탈북동포들의 망명허가를 위해 힘쓰고 있는 로버트 홍 변호사는 “미국정부가 한국을 거처 미국에 온 탈북동포들의 망명을 허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탈북동포들은 다른 한인 이민자들과 달리 언어, 경제, 문화, 건강, 복지 등에서 차원이 다른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변호사는 “미주한인사회가 탈북동포들의 사정을 이해해 도와주기를 바란다”면서 “언젠가 이들도 ‘재미북한인’(North Korean-American)으로 구분될 날이 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사회를 맡은 김동진 목사는 “탈북동포들과 미주한인동포 간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탈북동포들은 하나같이 ‘어금니’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탈북동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치과질환이다. 고된 여정에 중국 등에서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치아가 성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북한인권법은 무엇?


‘북한인권법’(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은 북한의 난민을 돕기 위한 미국의 법률이다. 북한인권법은 오랜 기간 수정을 거쳐 지난 2004년 9월 28일 상원을 통과했다. 2004년 10월 4일 추가 수정 없이 하원을 통과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4년 10월 18일 서명을 했고 법안은 공식 발효됐다.
그간 부시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을 독재자로 명명하고 북한정권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는 등 부정적인 대북인식을 솔직하게 표출해 왔다. 9.11 테러이후 반 테러전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미국 내에서 불량국가로 분류된 북한의 인권문제는 관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관련 법안을 추진해 2년 만인 2004년 10월 4일 ‘북한인권법안’이 하원에 만장일치로 통과해 의회절차를 완료했다. 2008년 1차로 만료된 북한인권법은 오는 2012년까지 4년 연장됐다.
연장법은 그동안 임시직이었던 북한인권특사를 정규직(full time position)으로 전환하고 대사급으로 위상을 높여 특사가 탈북자 및 북한인권문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은 또 탈북자들의 미국 정착을 위해 미국 정부가 외국 정부와 더 많이 협력하고 탈북자의 망명을 더 많이 허용하도록 하는 데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도록 했다. 이를 위해 고위 외교관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파견 대사들에게 외교활동을 강화토록 규정했다.
이밖에 신원조회 수속 기간을 단축해 탈북자들의 미국 정착을 용이하게 하고 중국 등지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도 강화하는 내용이 북한 인권법 재승인 법에 담겨 있다.

탈북동포를 돕고 있는 추동엽 목사(그리신 교회 담임)는 탈북동포의 종류를 크게 3가지로 구분하면서 이들의 탈북 동기도 각각 다르다고 했다. 추 목사에 따르면 먼저 북한에서 당 간부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은 책임 추궁 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탈북한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다.
둘째는 성분이 좋은 사람으로 정치적 성향이나 자기 내적인 이유로 탈북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전형적인 하층민으로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북한에서 도망치는 경우다.
추 목사는 탈북동포들의 미국정착에는 내적치유와 외적치유 그리고 사회적 치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교회나 사회가 한마음으로 협동하는 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탈북동포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날 탈북동포 김경철(남·40대·가명)씨는 간증을 통해 “우리 탈북동포들이 어떻게 미국까지 오게 됐는가에 대해 의심하는 한인들이 많다”며 “우리가 조국을 버리고 만리타국으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탈북동포들이 미국 시스템에 맞춰 살아가야하기에 안정된 직업, 주택, 가족후생 등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힘들다”면서 “한인사회가 문을 열고 우리들을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다른 탈북동포 최시정(남·가명)씨는 “우리는 한국 국적을 가졌으나 과거 정권 시절 제대로 신분을 보장받지 못했다”면서 “정부가 우리를 제대로 지켜준다고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왔다가 중국에 여행 갔던 탈북동포 중 지금까지 공안에 잡혀 북송된 수도 약 200명이나 된다. 당시 한국 정권은 이들을 방관했다”고 폭로했다.
또 그는 “미국에 왔던 탈북동포들 중에도 미국정착이 힘들거나 북한인권법상 망명허가가 어렵다는 것을 느껴 귀국한 경우도 많다”며 “우리들은 기필코 미국에서 성공해 미국사회와 한국에도 기여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편 이날 참석한 제14기 LA평통 최 사이먼 자문위원은 “14기 평통은 처음으로 탈북동포 들을 돕는 위원회를 설립했다”면서 “앞으로 탈북동포 돕기 운동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탈북동포들을 외면하는 상황에서도 한인사회에서 남모르게 이들을 돕는 손길이 있었다. 탈북동포들의 치과 치료를 위해 타운의 버몬 치과(대표 유근주), 미션종합치과(대표 정원중) 등은 무료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또 정신과 전문의인 장수경 박사, 통증치료 전문가인 박동욱 원장 등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일반 사회 후생복지 등에 있어서는 솔로몬 한 전도사가 무료상담을 진행 중이다.







탈북여인 이여림씨가 말하는 ‘고통의 세월


탈북자 이여림(여·가명·50대)씨는 이날 간담회에서 “하나님 앞에 찬양부터 하고 싶다”면서 직접 ‘내 영혼이 은총이고’를 불렀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쥔 이씨는 “내 생전 사람들 앞에서 나의 지난 온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다”면서 “어찌나 떨리는지 저녁도 먹지 못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까하며 가슴을 조렸다”고 운을 뗐다.
이씨는 “그동안 미국에서 도움을 받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간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60에 가깝지만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모습이 70세정도로 보인다”면서 “2개월에 한번씩 머리를 검정색으로 염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도서관에 갈 기회가 생겨 평생 못 보던 책들을 도서관에서 읽고 있다며 나름대로 보람을 찾고 있다는 근황도 밝혔다.
그의 북한 생활은 낭만이나 로맨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된 군생활의 연속이었다. 꽃다운 18세에 군에 들어가 말 그대로 ‘총대 맨 직업군인’으로 남편과 함께 포병사령부에서 20여년을 지냈다. 그가 평생에 걸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은 화장을 하고 핸드백 차림으로 나들이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군복에 장화를 신고 부대에 나가 전쟁준비를 위한 포탄 저장하기가 이씨의 하루 일과였다. 부대에서 돌아오면 남편이 부대로 출근하는 생활이라 가정생활조차 군생활의 연속이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친정어머니가 집안일을 주로 보았기에 이씨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충성스런 여성 포병군인으로 모성마저 희미해졌다.
매일 포탄을 관리하면서 ‘정말 전쟁이 나면 과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란 생각도 수시로 들었다.
포병군인 생활에서 남편이 척추부상으로 제대하고 얼마 후 사망하면서 그는 어린 자녀들을 홀몸으로 맡아야 했다.
특히 아들이 북한을 탈출하다 잡혀 고초를 겪은 뒤 또 다시 탈북을 시도하다 체포돼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아들을 보며 결국 실신해버린 이씨는 “이런 나라에다 딸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해 탈북을 결심했다. 우선 이씨가 먼저 중국으로 탈출해 돈을 벌어 딸을 데려가기로 했다. 
산을 넘고 숲을 지나 3일 만에 두만강에 도착하니 폭우가  온 후라 거센 탁류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강물로 뛰어 들었다. 그를 겨냥한 총성이 울렸다. 이씨를 발견한 국경수비병들의 사격이었다.
허우적거리며 죽을힘을 다하여 강물에서 헤엄쳤다. 무언가 손에 잡혀 당기며 올라서자 중국 땅이었다. 탈북에 성공한 것이다. 그곳에서 3년간 이씨는 죽을 고생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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