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드리운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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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현대 한국정치사에 거대한 족적을 아로새겼다.
4차례 대선 출마와 6선 국회의원 등 현실정치인의 길을 얻으면서 갖게 된 무수한 기록 외에도 해방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남북정상회담,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보내며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 만큼 현대 한국 정치사에 등장하는 크고작은 정치인들은 정치인 김대중과 직접이든 간접이든 교직(交織) 하며 존재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시종일관 악연을 맺었다.1987년이 잉태한 3김정치 구도에서도 김대중은 중심 축이었다. 그가 뿌려놓은 크고작은 갈등과 희망들은 한국 정치의 현재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한국지사 = 박희민 기자>




박정희와의 악연


김대중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관계는 ‘저항과 탄압’이란 말로 요약된다.
두 사람 다 거의 비슷한 시기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체제에서 최대 정적이었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탄압을 받아야 했다.
투옥과 연금, 그리고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리는 탄압……. 김대중과 박정희, 이들의 관계는 ‘악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DJ가 정치권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61년 5월 13일 치러진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다.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 이후 3번의 고배를 마신 끝에 비로소 국회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원선서 조차 못하는, 비운의 정치인이 되고 만다. 당선 3일 뒤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5.16 쿠데타를 감행하고 18일 국회를 해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 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숙명적 대결로 맞붙었다.
김영삼 후보를 이기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 DJ는 줄곧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하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없는 총통 시대가 올 것”이라며 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 DJ는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대신 그는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DJ는 교통사고로 골반을 크게 다쳤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로 알려진 이 사고로 그는 평생 불편한 걸음걸이를 하게 된다.
 
유신반대 투쟁







그러던 중 급기야 그의 ‘경고’ 처럼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DJ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 유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도쿄에서는 유신 반대 첫 성명이 발표되고 워싱턴에서도 국민투표 무효선언이 발표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작정치로 일컬어지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1973년 8월 8일 DJ는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당시 일본을 찾은 양일동 통일당 당수와 김경인 의원을 만난 뒤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됐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지고 팔, 다리에는 무거운 추가 달린 채 현해탄에서 수장될 뻔한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 해상자위대의 추격 등으로 그는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강제 귀국됐다.
이 사건은 한일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됐지만 진상이 밝혀지기 까지는 무려 34년이 더 걸렸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 위원회는 이 사건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고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구사일생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에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귀국 직후 자택 연금으로 정치활동이 금지 당한데 이어 1976년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명동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했다가 구속되는 등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했다.
그러다 1979년 10.26이 발생, DJ와 박정희 대통령간의 저항과 탄압의 악연은 18년만에 끝이 났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고 2004년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DJ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셨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DJ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아다”고 회상했다. 김대중과 박정희, 이 두 전직 대통령은 살아 생전 어떤 화해나 용서도 하지 못했다. 다만 산자와 죽은자의 간접 화해가 이를 대신했을 뿐이다.




3김 시대의 종말


DJ의 서거는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하지만 이듬해 1988년 4월 총선에서 DJ(평민당)와 YS(통일민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호남, 영남, 충청의 표를 결집시키면서 지역감정에 기반한 여소야대의 구도를 만들었다.
1990년 YS와 JP는 집권여당과 합당하는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YS는 여당의 대권후보를 꿈꾸고 있었고, JP는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배를 탄 것이다. 하지만 DJ는 민자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합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YS 패배 후 정계 은퇴 선언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 번의 승부였다. YS가 이끄는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139석을 얻는데 그쳤고, DJ의 국민회의는 79석, JP의 자민련은 50석을 확보했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뤄낸 것. 이에 따라 DJ는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그러나 DJP 공조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JP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고, DJ는 전직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서 정계를 물러났다.
JP는 자민련 총재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2004년 총선에서 자민련이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고 참패하면서 비례대표 의원에도 당선되지 못하게 되자 3김 가운데 마지막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3김은 2007년 17대 대선국면에서 현실정치 개입 논란을 불러 일으키며 질긴 정치의 끈을 놓지 못했다.
DJ는 갈라진 범여권의 결집을 촉구하면서 단일후보를 촉구했고, YS는 “잃어버린 10년을 끝내야 한다”며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JP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천명했다.
특히 DJ와 YS는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북핵 사태 등을 거치면서 여전히 화해할 수 없는 사이임을 입증했다.
3김은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지만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기기도 했다. 3김 정치의 공과는 이제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형은 3김이 만든 지역주의의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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