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김대중 그리고 나와의 추억

이 뉴스를 공유하기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의 상징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고인을 보낸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이런 큰 슬픔 뒤에는 <선데이저널>과 나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이 맺었던 각별한 인연이 자리 잡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은 그가 전두환 군부에 의해 LA로 망명오게 된 198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 김 전 대통령과 나는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취재원으로 ‘희노애락’을 함께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력에 저항하는 위치에 있을 때 나는 그를 지지했지만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나는 그가 가진 권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그게 ‘권력의 감시견’인 기자의 숙명이라고 믿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때 주변 사람들은 나를 ‘김대중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나를 ‘배신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김대중’이란 정치인을 기준으로 나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지었다. 모든 것들이 기자로서 내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이런 기자의 자세에 우선하여 인간으로서의 슬픔이 먼저 밀려왔다. 내 기억 속에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억은 몰라도 적어도 인간 김대중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발행인 = 연 훈>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4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32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나는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망명 온 김대중 선생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메모를 남겼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이었다.
뜻밖에도 다음날 김대중 선생님은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다. 어두웠던 군부 독재시절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선생이 LA의 조그마한 주간지 발행인에게 인터뷰 수락은 물론이고 직접 전화를 걸어 주었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김대중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감격에 사로잡혀 한참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던 일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질문서를 팩스로 보냈고 다음 날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변서를 보내며 다시 전화를 걸어 나에게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신문 발행에 전념할 것을 독려해주었다.
30대 초반의 초짜 기자였던 나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거목 김대중 선생님의 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만남의 손은 내가 내밀었지만 이후 우리의 인연이 지속됐던 것은 김대중 선생님이 그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개월 후 김대중 선생님은 LA강연 때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아침에 함께 조찬을 할 수 있겠느냐”며 물어 오셨다. 나는 그 때까지 설마 김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지금은 없어진 윌셔와 버질에 있는 쉐라톤 호텔에 머물고 계셨던 김대중 선생님과 부인 이희호 여사는 나, 그리고 그레이스 이 기자와 함께 오찬을 했다. 당시 김대중 선생님과의 오찬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무려 1시간이 넘도록 오찬을 함께하며 그는 32살의 젊은 주간지 발행인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자유와 정의로운 삶의 지표를 제시해 주셨다.
식사 도중 내가 계속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렸음에도 그는 오히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잘 나온 사진 한 장 보내달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셨다. 이런 첫 만남 이후 난 10차례 김대중 선생님을 만났다.


언로개요 흥망소계


나는 전두환(군부) 정권 당시 정보부에 의해 해외반정부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한국에 입국하지 못했다. <선데이저널>은 80년 대 초 당시 미국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쓴소리와 부정 비리를 폭로하는 신문으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민주화 세력들의 데모 현장에는 항상 <선데이저널>이 호외처럼 배포됐다.
일각에서는 <선데이저널>을 ‘김대중 신문’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문은 묘하게 김대중 선생의 정치적 입장 맞아떨어졌고 나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김대중의 사람’으로 분류되었었다.
1986년 이른바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해외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해제되었다. 나는 그 해 7월 한국을 방문했으나 여전히 정보부와 경찰 외사과 형사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동태 파악을 했다.
나는 동교동 김대중 선생 자택을 찾아가 함께 조찬을 했으며 식사 후 김대중 선생님은 내가 보는 자리에서 <연훈 동지 “언로개요 흥망소계” 1986년 하 김대중>라는 글귀를 붓글씨로 써 주시며 “언론이 열리고 닫히는 여하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다”라고 친히 글귀를 풀어주셨다. 당시 김대중 선생님은 금일봉 50만원 까지 흰 봉투에 담아 주시는 넉넉함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당시 동교동의 아침은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그는 LA에서 온 나를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뒤로한 채 나와 오찬을 함께했다. 동교동에서의 그 오찬 역시 내 인생에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하이라이트였다.
이후에도 김대중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해외망명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평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총재를 취재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아갔다. 나는 김대중 총재와의 추억을 기념하며 그린색 넥타이를 선물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넥타이를 매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상이다”라고 즐거워했다. 동교동 거실에서 5분 동안 면담을 마친 뒤 김대중 총재는 나에게 “남산 사리원이라는 중국집에서 모임이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권했다. 나는 김 총재님의 말씀대로 사리원에 갔고 거기서 그의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동네 아저씨 같은 소탈한 모습을 지녔지만 연단 위에 선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조리 있는 언변으로 대중을 사로잡았고 그의 연설은 젊은 내 가슴과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구속 그리고 김대중의 배려


사실 난 다른 사람처럼 김대중 선생의 열렬한 지지자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원자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합된 적도 없었고 학연 인맥은 더 더욱이 없었지만 김대중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어만 갔다.
1987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총재는 낙선했다. 김영삼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던 양김은 노태우 후보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대선이 끝나고 수개월 후인 지난 88년 2월, 내가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회장 일가와 통일교 문선명 교주와 얽히고설킨 가족비사(泌事) 보도로 인해 고소당해 전격 체포 구속되었을 김대중 총재의 나를 위한 배려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구속되자마자 김대중 총재는 대중연설을 마치고 귀가 도중 조승형 비서실장(변호사)에게 ‘미국 LA에서 선데이저널을 발행하는 연 훈이라는 사람이 구속되었으니 당신이 변호사가 되어달라’고 당부하며 변호사 수임료로 3백만 원을 건네 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4월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여소야대를 이끌어 냈다.
이런 와중에 평민당은 정치적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양심수 명단에 나를 포함시켰다.
안기부는 구속된 나의 수감생활 조차 교도관을 시켜 모든 생활을 보고하게 지시했다. 나는 0.8평의 독방에서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출소 후 본지에 ‘연훈 옥중기’ 10회 연재)
출소 후 나는 김 총재의 미국 망명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둘째 아들 김홍업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부친께서 나의 출소 사실을 알고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다음날 국회의사당 평민당 총재실로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과 회의 도중에도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고생 많았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만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나의 모친의 안부도 잊지 않으셨다.
내가 구속되자 나의 모친이 김대중 총재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후일 모친께서는 무작정 국회의사당 평민당 총재실로 찾아가 “연훈이 모친인데 만나고 싶다”라고 하자 다른 일을 제쳐두시고 총재실에서 접견하며 “연훈 동지의 구속은 정치적 탄압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다는 말을 후일 듣고 참으로 인간 김대중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인쇄비에 보태쓰라고 준 3000달러


나에 대한 김대중 총재의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 총재는 지난 1992년 4.29폭동 직후 LA동포들을 위문하고자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LA매일신문>이라는 일간지를 발행하다 폭동 여파로 경영이 어려워 휴간 중에 있었다. 1주일째 신문발행이 중단되었으며 언제 다시 발행될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김대중 총재의 비서로 함께 온 심기섭(후일 한국냉동 사장 역임)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심기섭 선배는 워싱턴에서 김대중 총재가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의 워싱턴 본부의 핵심인사였으며 한동안 <선데이저널>에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적이 있어 나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나는 저녁 8시 김대중 총재의 숙소인 올림픽가의 로텍스 호텔 4층으로 올라갔다. 심기섭 선배의 안내로 방에 들어가자 이희호 여사가 함께 반갑게 나를 반겨주셨다. 3년 만에 만남이었다.
김 총재는 내 손을 잡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안부를 물으시면서 “내가 도와줄 것이 없느냐”며 신문발행이 중단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는 부인 이 여사는 내게 황색봉투를 직접 건네주시며 “얼마되지 않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손에 쥐어 주셨다. 몇 번 이나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했지만 김대중 총재는 “내 마음이니 받아두라”며 일간지 발행이 어려우면 <선데이저널>을 다시 발행하라고 권하셨다.
약 30분간의 만남을 끝내고 나와 차에서 이희호 여사가 준 황색봉투를 열어보니 3,000달러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손에 쥐고는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절박한 당시 상황에 아파트 페이먼트도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시기에 김대중 총재가 마음을 준 3,000달러는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귀국하시면서 주변에 각별한 지인들에게 나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시기까지 할 정도로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분이다.




통일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며 특별하게 만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해인 92년 대선에서 김 총재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또 패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한국 정치사를 뒤로하고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왔었다면 인연이 지속될지 몰랐지만 나와 김대중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서거 때까지 단 한 번도 뵌 일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김대중의 사람으로 불리었고 사건이 발생할 적마다 나는 오해를 받아왔다.
나는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인간 김대중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서슬퍼런 군부독재와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인간 김대중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사람들은 김대중을 독하고 무서운 정치인, 역경과 고난 속에 핀 ‘인동초’로 비유하고 있지만 적어도 내겐 인자하고 의리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김대중이 걸어 온 인생여정은 고난 속에 점철된 고통과 파란의 삶 그 자체였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난 김대중 선생님에게 많은 은덕을 입었던 사람이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는 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남북 정상회담과 대북송금 문제, 노벨평화상 뒷이야기, 숨겨진 천문학적 비자금 문제 등 적지 않은 의혹이 제기되었다. 나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인간 김대중과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선데이저널>은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 입장을 견지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대중 정권시절 얼굴 없는 실세로 군림했던 무기브로커 조풍언씨로 인한 불편한 관계도 한몫했다.
<선데이저널>은 지난 80~90년대 친 김대중 신문에서 2000년대는 반 김대중 신문으로 변했다. 그것은 나의 평가가 아닌 순전히 외부의 평가였다. ‘권력의 감시견’ 역할을 해야하는 언론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숙명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내가 ‘김대중을 배신한 게 아니냐’는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국장 기간 동안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누구보다 슬퍼했다. 지난 25년 동안 김 전 대통령과 맺었던 인연이 영화 필름처럼 내 머리 속에서 돌아갔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아직도 의혹으로 남아있는 문제들을 끝까지 파헤칠 것을 다짐한다. 그 이유는 김대중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바로잡아 졌으면 하는 나의 바람에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선데이저널>의 기사를 가지고 나를 몰아세우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사심’을 가지고 글을 쓴 적이 없다. 김 전 대통령과 정치적 맥이 맞닿을 때도 반대로 그에 대한 각종 의혹을 파헤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것이  기자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주어지는 비판은 내가 지고 가야할 몫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인간 김대중의 기억은 여전히 지워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고인의 유지인 ‘행동하는 양심’이란 문구를 항상 되새기면서 그동안 제게 베풀어 주셨던 당신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며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적어 고인의 명복을 빈다.
대한민국을 향한 김대중의 사랑과 열정!
그 사랑과 열정이 국민들에게 전해져 이제는 남은 자들이 김대중의 평생 과제였던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의 과업을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빌며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늘 행복하시길……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