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폭동 특집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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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폭동 특집 기획연재
(1) 잊혀진 4?29폭동’의 진실
(2) 4.29 폭동성금의 진실(상·중·하)
(3) 한인정체성 확립과 4.29
(4) 4.29와 흑인민권운동
(5) 4.29와 미주한인사회


4·29 폭동 피해자들을 위해 모금된 성금을 놓고 여전히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992년 4월 29일 LA 흑인폭동 당시 LA 한인회는 한인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할 때였다. 미증유의 폭동 사태를 만난 한인사회는 구심점이 없었다는 얘기다.
한인사회를 대변해야 할 LA한인회가 법정소송에 휘말리는 바람에 당시 LA한인상공회의소 하기환 회장이 LA총영사관(당시 박종상 총영사)의 주선 등으로 4.29폭동범교포대책위원회(한미구호기금재단의 전신·이하 범대위)의 수장직에 올라 총영사관에 본부를 꾸리며 피해대책을 수립하게 된 셈이다.
당시 한국정부와 언론사, 적십자 등을 비롯한 각계 단체와 본국 국민들이 성금이 적잖이 모였다. 또 일본 등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사회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모금운동이 벌어진 바 있다. 폭동이 벌어진 그 때 LA에서 24시간 관련 방송을 내보낸 라디오코리아는 물론 미주한국일보, 미주중앙일보, KTE방송(현재 KBS아메리카)한미방송 등 여러 언론사들도 관련 성금 접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모인 엄청난 규모의 성금이 어디에, 얼마나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선데이저널]은 ‘눈먼 돈’이 돼 버린 4·29 폭동 피해 성금을 둘러싼 의혹을 3주에 걸쳐 특집 보도한다.
                                                                                               <성진 취재부기자>



4·29 폭동 당시 국내·외서 모인 성금은 약 1200만 달러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주에 한인이민사회가 형성된 이후 이처럼 엄청난 성금이 모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체적인 총 모금액수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당시 한국일보 미주본사와 서울본사가 모금한 액수만 790만 달러에 달해 모금 열기를 얼마나 뜨거웠는지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일보는 폭동 발생 사흘 만인 1992년 5월 1일부터 발 빠르게 모금 캠페인에 돌입했다. 서울본사도 이틀 뒤 모금 접수 안내문을 실어 이 같은 운동에 동참했다. 약 2개월간 미주한국일보에 250여만 달러, 서울 한국일보에 270여만 달러가 모여 같은 해 7월 6일 피해자들에게 19만9500 달러가 1차 지원하고, 나머지인 약 140만 달러를 4·29폭동피해자연합회(회장 이정)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성금이 피해자협의회에 전달되기 전까지 한국일보는 모든 성금을 LA총영사관이 주도한 공식 단체인 4·29폭동범교포대책위원회(한미구호기금재단의 전신)와 별도로 자체 관리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 언론사와 단체가 모금한 성금은 범대위에서 관리를 담당했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자체적으로 ‘코리아타운 비상구호대책본부’라는 이름의 기구를 만들어 유의영 박사(칼스테이트LA)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장재민 회장(한국일보), 문애리 박사(UCLA교수), 유근관 교수,김봉환 한인청소년회관장, 안용식, 안덕원 목사, 강성용 변호사, 신영한CPA, 신종욱 당시 한국일보부사장, 민병용 한국일보 이사, 윤온숙 한국일보 총무국장 등을 위원으로 구성해 범대위와 맞섰다.



성금총액 왜 말 다른가

4·29 폭동으로 피땀 흘려 이룩한 업소가 잿더미로 변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그땐 이들에 대한 구호가 시급했다. 이런 까닭에 여러 곳에서 거두고 있는 성금을 단일화해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이내 각종 모금액을 범대위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유독 한국일보 미주본사만 이에 반대했다.
한국일보 측은 “우리가 모금한 것은 우리가 책임지고 나눠 주겠다”고 고집하며 피해자들에게 자체적으로 보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폭동 피해자들은 범대위와 한국일보사로 각각 모여들여 적잖은 혼선이 빚어졌다. 결국 한국일보는 여론에 밀려 성금 잔여분 140여만 달러를 피해자협회를 통해 범대위에 전달하는 식으로 단일화에 합세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폭동 발생 후 7년이 지난 1999년 6월 ‘한국일보미주본사30년사’를 발간했는데 185쪽에는 4·29폭동성금 모금과 관련 “한국일보가 모금한 성금 총액은 미주본사 350만 달러, 서울본사 440만 달러로 폭동성금 1100만 달러의 70%를 웃돌았다”고 기록했다. 폭동 당시 신문 기사에서 밝힌 액수와 상당한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한국일보 본사와 미주본사가 모금한 액수가 약 790만 달러에 달했다면 한국과 세계 각지에서 모은 성금 규모는 지금까지 알려졌던 1200만 달러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성금 총액을 1200만 달러로 가정할 때 한국일보가 전체 성금의 약 66%를 모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라디오코리아, 중앙일보, KTE방송, 한미방송 등과 한국정부와 국내 각계(한국일보사 제외)가 모은 돈이 약 400여만 달러 밖에 안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지난 2002년 사망한 코미디언 故 이주일씨는 작고 전 서울 한국일보에 게재한 ‘내가 남기고 싶은 글’에서 4·29폭동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그는 “LA동포사회를 생각해 라디오코리아에 2억원을 보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폭동 당시 LA총영사관 주도로 구성된 범대위 산하 성금관리위원회(한미폭동구호기금 전신) 등과 피해자협의회 단체들이 관련 자료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여전히 모금 규모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200만 달러 도대체 어디로?

4·29폭동피해자협의회(회장 이정)는 지난 2008년 4월 24일 USC한국학도서관에 4·29폭동 당시 관련 자료들을 기증했다. 기증된 자료는 폭동 당시 한인들에게 지급했던 성금 수표 원본과 사진 등이다. 4·29폭동피해자협의회는 1992년 당시 한국 국민들이 보내온 성금 약 450만 달러를 피해 한인 1600여명에게 2500달러씩 두 번에 걸쳐 지급했으며, 그 원본을 보관해왔다.
이정 회장은 “마땅히 기증할 곳이 없어 16년간 계속 보관해왔다”며 “이를 통해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4·29폭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이 김 USC한국학도서관장은 “받은 자료를 DB(데이터베이스)화 해 4·29폭동수난사를 연구하는데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폭동 피해를 어루만지고자하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무엇보다 천문학적 액수의 모금액을 둘러싼 논란은 한인사회의 추한 단면으로 남아 있다. ‘당장 피해자들에게 배분하자’는 측과 ‘기금을 보관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자’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며 오랫동안 추태를 보인 것은 LA한인사회의 치부로 남았다. 당시 불거진 추문과 의혹 탓에 고국에서는 한인동포들을 ‘똥포’라 부를 만큼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기록에 따르면 성금의 관리책임은 한미구호기금재단(이하 재단)이다. 재단은 범대위 산하 성금관리위원회를 이어받은 것이다. 재단은 1대 하기환, 2대 최상봉 3대 곽철 4대 이민휘 5대 전주찬 이사장을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금은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뒤 약 120만 달러 정도가 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내에서는 “폭동의 상처를 영원히 잊지 말자”는 취지로 기념될만한 건물을 구입한 바 있다. 남은 성금을 푼돈으로 분배하는 것 보다 4·29폭동을 상기하고 2세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 시가 135만 달러인 3400 6th St.에 있는 건물(현재 MBC 아메리카 소유)을 90만 달러에 다운하고 4만5000달러를 융자해 1994년 구입해 ‘4.29폭동기념관’을 세운 것. 건물에는 각 업주 별 피해자단체들이 입주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 달리 건물관리는 순조롭지 않았다. 구입 5년 만인 1999년 95만 달러에 기념관을 판 재단은 운영관리 과정에서 진 빚을 청산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약 20만 달러가 남았지만 이 돈은 미래은행과 ABC에 투자해 모두 날린 것으로 드러났다.
1200만 달러 규모의 성금을 한 푼도 남김없이 소진한 과정에는 의혹이 적지 않았다. 발단은 폭동이 발생한 그 해 7월 22일 서울에서 온 1차 성금 445만578달러 12센트($4,450,578.12)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부터다.
(다음 호에 계속)









10년 세월이 지우지 못한 상처

4·29폭동은 한인이민사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깊고 깊은 상처를 새겨 놓았다. 다음 글은 폭동 피해자 중 한 명인 김동찬(수필가)씨가 폭동발생 10주년인 지난 2002년 4월 LA에서 발행된 미주 <문학세계> 14호에 게재한 폭동 수기 일부다.
– 편집자 주






상처는 아물기 마련인가 보다. 결코 잊혀질 것 같지 않던 4·29 LA폭동도 올해로 만 10년을 맞으며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한인타운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불타버린 건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남는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가지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당시에 도매상을 차려서 운영하고 있었고, 아내는 인도어 스왑밋에서 소매를 하고 있었다. 내 삶의 희망이었던 그 도매 가게가 약탈되는 광경이 텔레비전에 비춰지자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광란의 물결이 무사히 비켜 지나가 주길 바랐던 나도 허탈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날 나가보니 폭동이 지나간 현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비참한 몰골로 나를 맞았다. 폭도들은 그 많던 상품을 훔쳐간 것은 물론이고 계산기를 부수고 남아있던 잔돈을 꺼내갔고 화장실의 거울까지도 떼 갔으며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렀다. 가게 앞쪽으로 온통 시커멓게 타다만 자국, 소방서 차가 출동해서 불을 끄기 위해 끼얹은 물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온 죄밖에 없는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탑 하나가 무너진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빈손으로 이민 와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중략)

나에게 한동안 무력감과 절망감을 안겨준 4.29폭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로드니킹을 무차별 구타한 백인 경관들이 무죄평결을 받았기 때문에 흑인들이 묵은 분노를 터트린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한인 상인들과 흑인 고객들 간의 불화가 폭동의 주된 요인 중의 하나인 것처럼 연일 보도했다. 그것은 미국의 주류사회가 얼마나 비겁했는지 반증하는 사례다. 흑인들의 분노를 희석시킬 희생양으로 한인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폭동 피해자로서 증언할 수 있다.


미국정부는 책임져야

바로 군대를 동원했으면 폭동은 그날 밤으로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들의 분노가 너무 커서 어느 정도 불길이 약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화재가 크게 나면 불길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멀쩡한 옆집을 부셔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밀집지역과 가까운 한인타운이 희생되는 걸 미국 정부는 방치했다.
그것을 감지한 한인타운과 흑인 밀집지역에 사는 비양심적인 주민들이 덩달아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4.29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커다란 부분이다. 
모든 TV 방송국에서 생중계 했던 폭동의 현장 중에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한 폭도가 전자상점에서 커다란 텔레비전을 훔쳐 나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차에 옮겨 싣지 못하자 경찰이 함께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권력이 폭동에 어떤 자세로 대치했었던 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순간,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범죄는 면죄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면 공권력은 폭동의 공범으로 비난 받아야만 한다.
(중략)

미국정부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점은 보상은커녕 명백한 피해자였던 한국계 피해자들에게 은근히 폭동의 책임을 전가했다는 점이다. 흑인 밀접지역의 상가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피해를 입었고 상당부분의 난동은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들이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있을 수 있는 한인 상인과 흑인과의 사소한 갈등을 크게 부각시키고, 신문과 라디오 등에서는 한인이 갖고 있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 토론하고 비난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도대체 한국계 폭동 피해자들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잘 모를 지경이었다. 세계의 인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파병까지도 서슴지 않는 대국인 미국의 행동으로는 너무나 비열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 당황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생각보다도 많은 것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한, 억장이 무너지는 피해자도 있었던 그 난리통에서 내 가족과 집이 무사했고, 아내가 하던 인도어 스왑밋도 불타지 않았다.
교회, 이웃, 친구, 조국의 동포 등 각지에서 보내주는 성금도 나를 감격시키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나는 재산보다도 더욱더 귀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재산은 금방이라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 이웃 등과 나누는 정이야말로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폭동이 나를 단련시켰다. 만일 일찍 그러한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작은 추위에도 견디지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되었을 뻔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어졌지만 미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세상의 질서와 규범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미국은 복잡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산다는 건 그 구성원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고객이고,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동료가 되는 그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지도 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미국 정부가 그나마 신속하게 저리 융자를 해주어 다시 도매상을 시작했고, 폭동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4.29 전보다 몇 십 배 더 큰 규모의 업체로 성장시켰다. 이제 4.29폭동은 과거의 일로 잊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4.29는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어났었고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미주이민 100주년을 앞둔 지금 사탕수수 하와이 이민 선조들의 애환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처럼, 후일에 4.29를 겪은 한 개인의 생생한 증언을 누군가 듣고 싶어 할 때가 꼭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비록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4.29의 일면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보고 느낀 4.29를 그를 위해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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