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폭동성금 행방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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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폭동 1주년인 1993년 4월 4일자 <선데이저널>에는 ‘성금관리 문제로 또다시 진통’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기사에는 “4.29폭동 1주년이 다가오는데도 피해자 성금 배분문제와 창구 단일화 문제로 동포사회가 극심한 분열현상을 보이고 있다”면서 “폭동 이후 수없이 생겨난 각종 폭동 관련 단체들은 이전투구 형식으로 상대방을 헐뜯으며 자신들만이 피해자들의 대변 단체라며 자중지란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본지 보도만 보더라도 당시 한인사회는 성금 분쟁 문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미 주류언론에서조차 성금분쟁을 보도했으며, 한국에서는 미주사회 성금분쟁에 대해 “성금을 잘못 보냈다”며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주한인사회에서도 “내가 낸 성금을 돌려 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성금을 관리했던 한미구호기금재단 사무실에는 매일 피해자들을 대표한다는 각종 단체들이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며 협박성 요구가 쏟아져 재단 이사들은 자리를 피하기에 바빴다. 당시 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던 한 단체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워서 더 이상 이사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성진 취재부기자>



당시 각종 피해자 단체들과 한인 단체들까지 남아있는 성금을 찢어가 재단 관계자들은 “그 나마 기금을 보전하려면 ‘폭동기념관 건립’을 명분으로 건물을 구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3400 W. 6th St. LA, Ca 90020에 위치한 건물(현재 MBC America 소유 건물)을 매입한 것. 그나마 이 건물도 운영부실로 인해 결국 유지하지 못하고 매각했고 남은 성금도 투자손실과 사기로 모두 날렸다.
한편 남가주한인공인회계사협회가 92년 폭동 당시 5월 이후 10개월에 걸친 성금감사보고서를 통해 그나마 폭동성금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4.29폭동성금진상조사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이 자료를 근거로 분석할 때 약 200만~400만 달러에 달하는 폭동성금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200만~400만$ 어디로?

4.29폭동 후 성금 배분이 시작되자 너도나도 피해자였다. 유리창 한 장 깨진 사람도 피해자를 자처했고, 흑인촌에서 가게를 운영한 사람도 무조건 피해자로 나섰다. 누가 얼마나 어떤 피해를 입엇는지 확실히 파악할 자료가 없었다.
4.29폭동성금은 1992년 5월 이후 1년 동안 2000여명의 피해자들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에게 한 가구당 500~2500 달러씩 지급됐다. 또한 정부 상대 소송 명분, 피해자 단체 활동비, 방범단체 활동비 등등으로 포함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출돼 1년이 지난 1993년 6월에는 약 120만 달러 정도만 한미구호기금재단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재단 이사회는 같은 해 6월 14일 가든 스위트 호텔에서 정기 이사회를 통해 “잔여 성금이 120만 달러가 있다”며 차후 한국일보가 이관할 잔여 성금 50여 만 달러를 합치면 170여 만 달러가 될 것으로 추산했다.
그 해 이사 수는 21명이었다. 당시 이사회는 이 기금에서 20만 달러는 대정부 소송비용에 지출하고 150만 달러를 폭동기념관 성격의 커뮤니티센터 건립기금으로 동결키로 했다. 여기에 한인노동상담소(당시 소장 홍순형)는 93년 9월 3일 폭동 실업자들을 대신해 20여명의 실업자들이 재단 사무실을 방문했다.
한인노동상담소는 지난 8월부터 3주간에 걸쳐 실직자 한인 1,116명으로부터 받은 성금분배 촉구성명서를 전달하고 “모든 피해자들에게 똑 같은 지분의 성금을 분배하라”고 요구했다.
홍 소장은 “폭동 실업자들이 1500 달러만 받는 차별대우를 받아왔다”면서 “다른 피해자들과 균등하게 3,500 달러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재단 측이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을 경우 재단 이사들의 개인 비즈니스 상행위에 대한 보이콧과 더불어 법정소송도 불사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원래 1993년 9월 28일 타운 내 가든 스위트 호텔에서 열린 정기 이사회 당시까지 한미구호기금재단은 잔여 성금이 170여만 달러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날 정기 이사회는 폭동 부상자 치료비, 타운 방범 지원비, 피해자 이규섭씨 소송지원비, 폭동으로 실직 당한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1인 당 1500 달러 지급 등등 53만 달러를 지출키로 의결했다.
이 같은 결정 이후 이번에는 폭동피해 스왓밋 상인들 150여명이 9월 30일 재단사무실에 몰려가 “한인사회 중지가 모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단이사회가 성금 지출을 결정한 것은 성금을 낸 기탁자와 피해자들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항의했다.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뜻이 관철이 안될 경우 재단을 상대로 “성금지급 차별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주장했다.
어수선한 한 해가 저무는 1993년 그 해 12월 28일 재단 이사회는 타운 내 호반 식당에서 정기 이사회를 개최해 성금을 계속 분배 할 것인가 아니면 폭동기념관을 위한 커뮤니티센터 건물을 구입할 것인가를 두고 집중적인 논의를 벌여 건물 구입안을 재확인 결의했다. 커뮤니티센터 구입안은 폭동관련 자료를 보전하고 피해자들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취지로 재단 이사회가 그 해 6월 14일 결의한바 있다.
당시 재단의 관계자는 ‘성금을 분배하려 해도 과거 사용했던 피해자 명단에 변동사항이 있고 너도나도 피해자를 자청해 성금을 달라고 했기 때문에 자칫 성금 때문에 또 다시 말썽이 일어날 소지가 컸다’는 이유로 센터 구입안을 성안했다고 밝혔다.
이사회는 이 작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5인 전담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조용직 부이사장, 안응균, 이정, 김재열, 유성겸 이사 등이다. 이들이 적절한 건물을 물색하기로 했다. 당시 재단의 4대 이사장은 이민휘 재미체육회장이었는데 성금 단일화를 완료한 직후 물러나 이사장 직이 공석이었다.




못 먹은 놈 바보








커뮤니티센터로 구입한 건물은 애초 예상과는 달리 폭동 관련 피해 단체들이 무상으로 입주해 사용하여 임대 수입에 지장을 주었으며, 자주 고장 나는 엘리베이터 수리비 등 노후 된 건물의 막대한 유지비 등으로 자칫 은행에 차압될 위기였다. 할 수 없이 건물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커뮤니티센터 건물을 매각하고 난 후 기금이 불과 22만 달러였다고 재단의 마지막 이사장인 전주찬 5대 이사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기금을 우선 한미은행에 예치했다고 전 이사장은 밝혔다.
전 이사장은 “그나마 22만 달러라도 유용하게 사용하려고 여러 방법들을 강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재단의 사무국을 맡았던 오봉균 목사는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차라리 4.29장학재단에 기증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해 이사회의 의결을 거처 기증했다”고 밝혔다.
당시 4.29장학재단은 본국 국회에서 1992년 11월 의결한 한인사회 폭동 지원금 10억원(당시 미화 123만 달러 상당)으로 설립된 재단이었다. 당시 본국 국회에서 통과된 항목은 “LA총영사관 영사활동비 10억원 지출안”이었다.
당시 김항경 총영사는 이 10억원 지원금을 폭동성금처럼 분배하지 않고 커뮤니티 장기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폭동성금 분쟁의 고통을 더 이상 당하지 않으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4.29장학재단(현 한미동포장학재단)이었다.
장학금은 은행에 예치된 기금의 이자에서 운용토록 했다. 초기 장학재단은 박희민 목사를 이사장으로 하여 안응균 부이사장, 김인환, 길옥빈, 김양일, 이영희, 임춘훈 이사 등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재단은 장학금 대상으로 한인 폭동피해자 자녀들을 최우선적으로 하고 인종화합을 위해 흑인 및 히스패닉계 학생 그리고 타운 방범을 맡고 있는 치안 관계자 자녀 등 타 인종을 20-30% 선에서 선발키로 했다.  
장학재단측은 한미구호기금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22만 달러를 자신들의 계좌에 일단 입금시켰다. 그런데 다음 날 장학재단의 재무를 담당한 최기욱 CPA가 “우리 이사회에서 다시 반환하라는 결정이 내렸다”면서 반환하는 바람에 22만 달러는 다시 한미구호기금재단으로 되돌려지는 운명을 만났다. 
문제의 4.29장학재단도 나중 기금의 난맥으로 크게 문제가 된다. 장학기금 대상자가 4.29폭동피해자 가족이나 흑인 사회 수혜자가 대상인데, 한인사회 이름 있는 단체장들이 장학금을 타가기도 해 말썽이 야기되고, 기금관리에도 문제가 발생해 나중 흑인 장학생이 받은 수표가 부도가 나는 등 부조리가 만연했다.(이 부분은 차후에 별도로 보도한다)
전 이사장은 “건물을 팔고 난 후 남은 기금에서 10만 달러는 미래은행에 투자했고, 나머지 12만 달러는 임경자 전 여성경제인협회장이 관계한 ‘ABC(Alternative Business Capital)투자회사에 투자했다”면서 “그러나 임 씨에게 투자한 기금은 전액 사기를 당했고, 미래은행에 투자한 것도 지난해 미래은행 파산으로 손실됐다”고 말했다. 전 이사장 개인도 임 씨에게 투자해 큰 손실을 보았다고 했다.
소위 “ABC투자사기사건”은 2006년 당시 여성경제인연합회 임경자 회장이 만든 금융회사로 ‘6개월 이내 이익을 2배로 만들어 준다’는 등으로 한인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대형투자사기사건이다. ‘ABC투자사기사건’은 지난 2004년 발생한 C+투자사기, 윈링크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과 함께 한인사회 3대 투자사기 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임 씨는 LA평통 부회장, 재미대한체육회 이사, 김덕룡 후원회, 윌셔-코리아타운 주민의회 대의원 등 굵직굵직한 단체에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화려한 투자유치 행각을 벌렸다. 임 씨는 한인사회의 여걸로 불리며 대표적 여성 기업인 행세를 하며 각종 한인단체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며 돈 많고 능력 있는 대표적 여성 인사로 행세했으나 실제는 투자가들을 끌어 모으는 투자회사의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김광남씨가 LA평통 시절 부회장으로 임명되자 1만 달러의 거액을 평통의 발전 기부금으로 쾌척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재미대한체육회 단장으로 나가면서 역시 수 만 달러의 후원금을 냈다. 크고 작은 행사에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는 인물로 단체마다 때만 되면 그녀에게 손을 벌렸을 정도로 한인사회의 ‘큰 손’으로 불렸다.
임 씨에게 사기를 당하자 한미구호기금재단측은 이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강구했으나 사법당국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재단 사무국을 관장했던 오봉균 목사는 임 씨의 ‘사기행위’에 대해 “2006년 당시 LAPD에 고발 조치했으며 나중에는 경찰 당국의 의뢰로 FBI에 까지 신고했으나 구체적 진전을 보지 못했다”면서 “우리로서는 피해보상 조치를 최대한 강구했다”고 말했다.
임 씨에게 투자한 배경은 2004년 8월 17일 월셔 플라자 호텔(당시 래디슨 윌셔 호텔에서 열린 한미구호기금재단 이사회에서 결의됐다는 것. 당시 전주찬 이사장의 긴급소집으로 개최된 재단 결의서에 따르면 <지금 미래은행에 있는 6009주를 매각하여 임경자 금융회사에 투자하면 많은 이익이 있다고 논의하였다. 이에 모두 찬성 통과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부도성금도 10만$ 넘어

1993년 2월 28일 남가주한인공인회계사협회(당시 회장 최상봉)는 산하 폭동성금감사위원회(위원장 오영균)가 4.29폭동성금 접수기관에 대한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위원회는 1992년 5월1일부터 1993년 2월28일까지의 한국일보, 중앙일보, 라디오코리아,KTE(현재 KBS아메리카),미주한인방송, 미주한인복음방송 등 언론기관들의 성금관리 현항을 감사했던 것이다.
이 감사 결과보고서에서 본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에서 모은 성금을 제외한 미주 지역에서만 모금된 성금이 총 5백5만5천5백53 달러(이자 2만7천9백68달러93센트)였으며, 이중 지출 총액은 3백72만5천9백87달러78센트이며, 잔액은 감사 마감일 현재(2월28일) 1백77만9천5백65달러43센트였다고 밝혔다.
감사위원회측은 “본국 성금을 이관 받은 폭동피해자협의회가 자체적으로 미국의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는다는 이유로 감사위원회 감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여 부득이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공인회계사협회의 감사결과 발표는 그나마 성금창구의 단일화와 함께 잡음을 일으켰던 성금 모금과 사용 내역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당시 성금 단일화 작업은 이민휘 4대 한미구호기금재단 이사장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당시 감사위원회는 한인언론 기관들의 모금 상항을 감사하면서 일부 방송사의 경우 구두로 성금을 내겠다고 약속해 놓고 내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도 수표와 지불정지 수표도 많았다고 밝혔다. 위원회측은 성금을 약정하고 이행치 않은 액수가 8만여 달러에 이르고, 부도 및 지불정지 된 수표 액수가 2만여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당시 부도수표를 낸 사람 중 한인사회의 이름 있는 사람도 많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는 50달러 수표에서 1만 달러 수표까지 부도를 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폭동성금 감사를 위해 당시 한인공인회계사협회의 30여명 회원들이 자원봉사로 감사를 담당했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미주 한인 언론사 가운데 가장 많은 성금을 모은 언론사는 한국일보로 총 297만2천7백53달러89센트였다.
다음이 라디오코리아로 117만7천7백91달러98센트, 이어 중앙일보가 49만5천5백70달러19센트, 미주한인방송이 25만9천5백59달러76센트, KTE방송(현재 KBS아메리카)은 17만4천4백21달러47센트, 복음방송이 4만7천9백50달러였다. 그리고 LA총영사관과 한미구호기금재단이 받은 성금이 43만7천5백5달러92센트(이자 2만7천968달러93센트 포함)였다. 
그 후 감사위원회에 따르면 라디오코리아의 경우, 감사마감 후 4월 20일에 보관했던 32만 달러를 한미구호기금재단으로 이관했다. 그리고 당시(2월28일 현재) 미주한국일보가 51여만 달러를 보관하고 있으며, 한미구호기금재단에서도 95여만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고 발표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1993년 2월 28이 현재 미주 지역에서 언론사가 모금한 성금에서 지출된 액수를 제하면 한미구호기금재단에서 보유한 금액은 177만9천5백65달러43센트로 나타났다.
감사에는 본국 성금이나 폭동피해자협의회가 한국으로부터 1차 전달 받은 445여만 달러는 제외되었기에 2차 성금 현황과, 실제로 1993년 2월 28일 현재 남은 성금을 합친다면 적어도 2백만 달러 내지 그 이상 4백만 달러까지도 추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성금 400여만 달러의 행방에 의혹이 남겨진다는 것이다. 이 400여만 달러의 행방은 폭동 발생 직후부터 파헤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92년 7월 당시 한국일보는 미국본사에서 250여만 달러, 국내 본사에서 모금한 성금이 270여만 달러라고 밝혔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언론사들이나 교회, 적십자사 등에서도 엄청난 성금을 모았으며,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도 성금을 모았다.
앞으로 폭동성금은 금융기관들의 협력을 포함한 관련 기관단체들의 협조로 성금수표 행방과 사법당국의 조사로 성금의 내역이 밝혀져야 한다는 과제가 한인사회에 남아있다. 본지는 관련 단체나 인사들을 계속 추적해 성금의 진상을 밝혀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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