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빠진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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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 등이 탑승한 비행기가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공항에 접근하던 중 추락, 탑승자 96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러시아와 폴란드가 수십 년 간 감정싸움을 벌여왔던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 추모식 참석길에 이 같은 변을 당해 악연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안타까움을 낳고 있다.
특히 사고기 기장이 관제탑 지시를 따르지 않고 짙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져 사고 원인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고기인 러시아제 Tu(투폴레프)-154 비행기는 이날 오전 10시 56분께(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50km 떨어진 스몰렌스크 공항 활주로 부근에 추락해 사고를 당했다.
특히 폴란드 정부 대표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0년 옛 소련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2만2000명을 처형한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참석하려고 러시아를 찾았다가 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데이빗 김 객원기자>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비상대책부 장관은 이날 사고 현장을 방문한 푸틴 총리에게 사고 개요를 보고하면서 “카친스키 대통령을 비롯해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했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러시아 당국은 가족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시신을 모스크바로 옮길 예정이며 훼손 정도에 따라 DNA 검사도 한다는 방침이다. 처참한 사고 현장을 찾은 카친스키 대통령의 쌍둥이 형제인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전 총리는 대통령 부부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이 보도했다.


사고 직전 기장 관제탑 지시 거부, 왜?

이번 추락 사고의 원인을 둘러싸고 의문이 커가고 있다. 핵심적인 의문 중 하나는 사고기 기장이 왜 지상 관제탑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짙은 안갯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했느냐는 것이다.
사고기는 공항 주변에 짙은 안개가 낀 상태에서 착륙을 시도했고 활주로에서 300여m 떨어진 숲 속 나뭇가지 끝에 부딪히면서 추락했다. 항공 사고 전문가들은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기체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면서 추락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특히 사고 직전 조종사가 벨라루스 민스크로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4번이나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한 공군 고위 관계자는 “통





카친스키 대통령은 누구



레흐 카친스키(Kaczynski·61) 폴란드 대통령은 ‘친(親)서방, 반(反)러시아’ 성향을 보여온 우파 정치인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항거한 레지스탕스 출신 아버지 밑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반골 기질을 이어받아 1970년대 반공산당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80년대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기수였던 레흐 바웬사(Walesa)의 연대노조 파업을 도우면서 바웬사의 측근인사가 됐다. 카친스키는 1989년 연대노조 부위원장직에 올랐고 1990년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요직인 보안장관 자리를 맡았지만, 두 사람은 노선 차이로 1년 만에 결별한다.
한동안 주목을 못 받던 그는 2006년 새로 들어선 우파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맡으면서 중앙 정치무대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후 강력한 반부패 단속으로 인기를 모은 카친스키는 2001년 법과정의당(PiS)을 창당하고 이듬해 바르샤바 시장에 당선된다.
그는 2005년 ‘폴란드의 자존심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대선에 출마, 시민강령(PO) 도널드 투스크 후보(현 총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쌍둥이 형인 야로슬라프 카친스키가 동생을 위해 총리직을 포기하는 우애를 보여줘 화제가 됐었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재임 시절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으로부터 폴란드의 군사 현대화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미사일방어(MD) 기지를 자국 내에 건설하는 데 동의했다. 반면 러시아와는 사사건건 불협화음을 빚어왔다.
그는 지난 2008년 한국과의 수교 2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으며, 지난해 7월 폴란드를 답방한 이명박 대통령은 그에게 폴란드의 원전 건설에 한국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제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조종사가 하강 속도를 높였다”면서 “다른 공항(벨라루스 민스크)으로 회항하라는 지시도 무시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당국은 그러나 기체 결함 등 다른 요인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정확한 사고 원인을 말하기 어렵다”면서 “회수한 비행기록장치(블랙박스)에 대한 분석 작업이 끝나면 정확한 원인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국 안정 주력

원인 규명과는 별개로 폴란드 정치권은 정국 안정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폴란드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은 브로니슬라브 코모로브스키 하원의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희생자 애도에 좌도 우도 없다”며 이번 사태로 인한 어떤 정치적 동요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임시 중앙은행 총재직을 맡게 된 피요트르 비시올레크 부총재 역시 “중앙은행은 아무런 문제없이 정상 업무중”이라고 밝혔다. 비행기 추락으로 육군참모총장 등 지도부 상당수를 잃은 군도 임시명령체제를 발동하는 등 별다른 동요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도널드 투스크 총리는 12일 긴급각료회의를 소집, 카친스키 대통령 장례식 일정을 확정지을 예정이다.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폴란드는 현재 투스크 총리가 국정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0일 ‘카틴 학살’70주년을 맞아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을 방문하려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은 그러나 외교정책 분야에서 강경한 반 러시아 입장을 취하는 한편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종종 투스크 총리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폴란드는 당초 오는 10월 대통령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대통령 유고사태를 맞아 6월 중·하순쯤 대선을 치르게 됐다. 코모로브스키 대통령 권한대행은 곧 대선일정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폴란드 헌법에 따르면 하원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시작하는 날부터 14일 이내에 선거일정을 공표해야 하며, 공고일부터 60일 이내 대선을 치르게 돼있다.
현재로선 코모로브스키가 차기대통령으로 가장 유력시된다. 그는 이미 지난 3월 투스크 총리가 이끄는 시민강령(PO)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상태다. 올해 58세인 코모로브스키는 당의 1970~1980년대 공산체제하에서 수차례 체포, 수감된 적이 있으며 자유주의적 경제정책노선을 취하고 있다. 10월 대선에서 코모로브스키와 경쟁을 벌일 예정이었던 고 카친스키 대통령은 최근 경제난으로 인해 지지율이 크게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폴란드 대선 결과를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게 됐다. 여당인 ‘법과정의’당에 동정표가 몰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법과정의’당이 대선후보로대통령의 동생인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당수 겸 전 총리를 내세울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이번 비극으로 인해 여당이 확실시됐던 선거 패배로부터 승리 기회를 잡게 됐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폴란드 애도 정국


슬픔에 빠진 폴란드 국민들은 붉은 장미와 흰 장미, 촛불을 들고 수도 바르샤바의 구시가지에 있는 대통령궁으로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대통령궁에는 조기가 게양됐고 바르샤바 주택가 곳곳에도 폴란드 국기가 내걸렸다. 성당에서는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가 열렸다.
야니나 세바스티노브(78) 씨는 AFP 통신에 “장을 보다가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온몸이 굳었고 거의 실신할 뻔했다”면서 “모두 훌륭한 분들로, 그들을 잃는 것은 보상받는 것이 불가능한 막대한 손실”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 전후사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현대사에서 이런 류의 비극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투스크 총리는 이날 오후 사고 현장을 방문, 현장을 둘러보고 희생자들을 위해 헌화했다.
각국 정상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10일 조전을 보내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폴란드 국민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버락 오바마 美대통령도 투스크 총리에 전화를 걸어 “폴란드는 물론 미국과 세계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손실”이라며 깊은 조의를 전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등도 카친스키 대통령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폴란드 정부는 일주일간 애도 주간을 선포하는 한편 11일 정오에 2분간 전국에서 묵념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폴란드 국민에게 조의를 표하고 12일 하루를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폴란드 전체 합심 위기 대처 빛났다






그 어떤 나라라도 대통령과 참모총장, 중앙은행총재 등 80여명의 지도급 인사가 동시에 사망하면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폴란드가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전용기 추락사고로 초대형 국가위기를 맞았지만 예상 밖으로 순탄하게 국정을 추스르고 있다.
1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폴란드는 국민이 비탄과 슬픔에 잠겼지만 도날트 투스크 총리 등 가까스로 화를 면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체제가 빠르게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하원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중앙은행 총재 자리는 부총재가 이어받았다. 숨진 육군·해군 참모총장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후임자가 공백을 메웠다. 숨진 국회의원들의 의석은 지역구 2위 득표자들에게 승계됐고, 조기 대선도 7월 이전에 실시될 예정이다.
폴란드는 그동안 여야 대립으로 오래도록 정치 혼란을 겪었지만, 초유의 국가 위기를 맞아 놀랄 만큼 단결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로 폴란드가 민주화 20년의 시험대에 올랐지만 잘 이겨내고 있다고 평했다.
그동안 골치를 썩였던 러시아와의 관계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매듭이 풀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카친스키 대통령이 러시아가 폴란드 엘리트를 숙청한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 기념식에 가던 도중 변을 당해 러시아와의 관계가 냉랭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으나, 오히려 위기 상황을 맞아 양국 관계가 진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측은 이번 사고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각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애도를 표했고 러시아 국민도 애도시간을 가졌다. 사고 현장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투스크 총리와 헌화한 뒤 이례적으로 끌어안고 위로하는 모습까지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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