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 특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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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1950~1953)에 참전한 미군들은 ‘쵸신퓨’(Chosin Few)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 북한 땅 장진호(미군은 이를 ‘초신퓨’라 불렀다) 일대에서 중공군과 벌인 치열한 전투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500여명을 상대로 싸운 미 해병 에드워드 벨트란(Edward Beltran, USMC Veteran) 상병의 투혼은 미 국방 전사에도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치열한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이기고 고향에 돌아온 벨트란 상병은 함께 싸운 전우들의 충정을 화폭에 담아 한국전을 널리 알렸다.
80세를 훌쩍 넘긴 그는 지난 19일 한미문화협회(회장 김원보)가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사은의 밤’ 행사에 부인 리브(Liv-Anna) 여사가 끄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옛 전우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기자를 만난 노병 벨트란씨는 여전히 북한에 한국전쟁 국군 포로들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면서 “60년이 지나는데 아직도 국군포로들이 돌아오지 못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며 “그들은 조건 없이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한국전쟁의 회상기다.
                                                                                                 <성진 취재부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8월5일 한국전쟁에 투입된 22세의 청년 에드워드 벨트란 상병은 미 해병 1사단 제5해병 5연대 1 대대 중화기 소대원이었다.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인천을 거처 서울 탈환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해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그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그 해 12월 6일, 벨트란 상병은 북한 땅 장진호 저수지 남쪽 하갈우리에 있었다. 그날 밤 영하 20도에 눈과 바람이 앞을 가릴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벨트란 상병이 소속된 제5연대가 바로 하갈우리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중화기 중대의 공격화기조의 바주카포 포수였다.
6일 아침 2대대의 D중대는 지난주 동안 점거하고 있던 동부고지로부터 중공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날 밤 눈보라의 엄호 하에 중공군이 반격을 가해왔다. 바로 이 전투가 장진호 전투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격심하고 처참했던 전투였다.
벨트란 상병이 소속한 해병팀은 유담리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가로 지르는 철로 부근에 위치했다. 동부고지와 또 다른 작은 언덕이 미 해병대 정면에 놓여 있었다. 중공군은 두 언덕의 좁은 골짜기와 철로를 따라서 공격해왔다. 6일 초저녁에 벨트란의 바주카포 장전병이 탄약을 가지러 갔을 때 그는 중공군의 기관총 공격을 처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가 바주카포를 쏘았더니 중공군 기관총좌에 적중은 하였으나 기관총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가 혼자서 재장전을 하고 있는데 측면 시야에서 중공군 한 명이 들어 닥쳤다. 중공군이 이미 충격수류탄을 그에게 던졌다.
벨트란은 기절하면서 상대편을 향해 총격을 가한 후 쓰러졌다. 멍해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그는 다른 장전병의 부축을 받았다. 그는 수류탄을 던진 중공군을 자신이 사살했다는 것을 어슴프레 기억했다.
이날 충격수류탄으로 벨트란은 이미 지난 11월 28일 전투 때 왼쪽 얼굴에 파편으로 부상당한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렀으나 그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였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동료 해병은 여전히 “위생병! 위생병!”을 부르고 있었다.
이날 중공군의 공격은 더 심해졌다. 한편 이날 일찍부터 눈에 익었던 미육군 탱크가 벨트란의 시선을 끌었다. 이 탱크는 자그마한 야산에 있었는데, 그 사격방향은 북동이며 좁은 골짜기는 물론 철로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공격도 방어하고 있었다.
탱크가 포사격을 그치고 포신이 후방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일부 파손한 것 같았다. 한 군인이 (후에 알았지만 이 탱크의 지휘관인 중사가 50구경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전방의 30구경 기관총은 후면을 향해 후방의 전투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총소리도 잠잠해졌다.
그 탱크 지휘관이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류탄의 충격으로 아직 휘청거렸지만 그에게 달려가 권총탄띠와 멜빵으로 옮겨서 다른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마른 웅덩이에 끌고 가 눕혀 놓았다. 그 탱크 지휘관은 배에 총을 맞았다고 했으나 출혈은 거의 없었다.



벨트란은 그 군인의 혁대를 풀고 상처를 만져 보았다. 손으로 그의 배를 옆으로 더듬어보니 세 개의 총알구멍이 있었다. 그 부상병은 벨트란의 눈을 올려다보았는데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벨트란은 그 군인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며 가능한 편하게 해주었다. 그 군인은 죽어가면서 “놈들을 저지하라, 놈들을 저지하라”고 외쳤다.
이에 벨트란 상병은 탱크로 달려가 포탑에 올라가서 기관총을 작동했다. 당시 그는 50구경 기관총에 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있어 도움이 되었다. 그가 총을 쏘기 시작해 그날 밤 온 밤을 새워 쏘아댔다.
분명, 한 탱크병이 살아 있어서 탄약 상자를 그에게 보급해 주었기에 그가 계속해서 사격을 했을터인데 그는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속 총을 쏘기만 했다. 기관총을 쏘면서 그가 기억할 수 있던 것은 조명탄 아래 끝도 없이 다가오는 중공군의 집단이었다. 때로는 그가 타고 있던 탱크 앞 30 야드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중공군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고 있었다.
박격포, 기관총, 소화기의 사격은 극심했다. 그가 나중에 기억한 것은 탱크에서 뛰어내려 선채로 현장을 살폈다는 것이었다. 해가 뜨고 중공군의 공격은 일단 끝났다. 전투는 온 밤과 12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 땅에는 온통 중공군의 시체천지였다. 추후 보고서에 따르면 그 자리에 중공군의 시체수가 400 내지 500명으로 그 탱크의 앞과 옆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벨트란은 탱크에서 온밤을 새우며 사격을 끝내고나서 아침에 부상당한 그 탱크 지휘관에게로 달려 갔다.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그 시신 자리에 앉아서 벨트란은 “우리는 적을 물리쳤다!”고 울면서 보고했다. 죽은 군인이 들어주기를 바라듯이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벨트란은 여기저기에 쓰러져있는 중공군과 아군 사상자들을 보면서 ‘이 같은 아군 적군 간에 대량살상이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가’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가운데 부대를 따라 천천히 후퇴길에 나섰다.
후퇴하면서도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흥남 부두에 다다랐고 남쪽으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후퇴 중에 그가 받은 상처가 심화되어 동상까지 걸려, 일본 요꼬스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고 다시 하와이 해군병원으로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발레호 해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1952년에 의무제대로 고향 샌타바바라로 돌아왔다.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의 혁혁한 공적으로 동성훈장, 상이기장, 선행기장 등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의 전우들은 벨트란 상병이 장진호에서 중공군과 싸운 혈투는 미국최고훈장감이라며 미 국회에 재상신을 하는 중이다.
그는 제대 후 고향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전쟁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국전쟁과 다른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한 그림을 제작하여왔다. 그는 특히 전쟁 중 포로가 된 사람들과 실종자들을 위한 작품에 주력해왔다.
지난 1990년 초 LA 남쪽 샌페드로 ‘우정의 종각’ 공원 부지에 계획된 미재향군인회와 한인사회 공동으로 600만달러 ‘한국전 참전기념비’ 모형의 12명 군인들의 모습을 직접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워싱턴DC에 건립된 ‘한국전기념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등으로 지연되어왔다.
그 후 이 계획은 예산상의 문제로 지연되었고, 미재향군인회에서 재정 부담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이후 2003년에 들어서 한인사회에서 국제한국전기념재단(이사장 토마스 정)이 구성되면서 이 계획을 부활시키는 운동이 일어났다.
국제한국전기념재단측은 한국전참전기념비를 다시 새로운 모형으로 제작해 LA카운티미재향군인회와 ‘우정의 종각’ 한국전기념비 건립운동을 펼치기로 했으나, 미국측의 경비조달 문제로 계속 지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 김원보 회장


한국전쟁(Korean War)은 그동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올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특히 올해 6월 25일 전후로 미주한인사회 곳곳에서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들에 대한 한인사회의 감사와 보은의 잔치가 뜻 깊게 펼쳐졌다.
지난 19일 샌타바바라 미재향군인회관(Veterans Memorial Building)에서도 한미문화협회(회장 김원보, 이사장 김은경) 주최로 한국전참전용사를 위한 감사의 잔치가 산타바바라, 벤추라 지역 거주 미군참전용사와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한인사회 인사들을 포함해 4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한미우호의 잔치를 벌였다.
특히 산타바바라시에서 한인들이 최초로 개최한 이날 잔치에는 산타바바라시의 헬렌 슈나이더 시장(Hon. Helene Schneider, Mayor of City of Santa Barbara) 을 포함해 96세의 노장 폴 듀프레(Col.(USMC, Ret.) Paul Dupre) 해병대령(예)을 비롯한 ‘장진호 전투의 영웅’이며 예술가인 에드워드 벨트란(82, Edward Beltran.USMC) 미 해병용사(예비역) 등 역전의 용사들이 참석해 한인사회의 우정과 옛 전우들의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한국관광공사 유미애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한미문화협회의 킴벌리 김 이사장(한국명 김은경)은 환영사를 통해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러분 미군용사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국출장으로 이날 행사에 불참한 김재수 LA총영사는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결코 참전용사들의 공헌을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날 헬렌 슈나이더 샌타바바라 시장은 축사를 통해 “한인사회가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해 감사의 잔치를 개최하여준데 대해 시민을 대표하여 감사한다”면서 “한국과 미국이 혈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하여 양국 발전에 기여하자”고 말했다.
그는 이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주 김재수 총영사와 만나 매우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면서 “한국정부와 한인 커뮤니티와 우리 산타바바라시와 앞으로 상호 협력의 길을 다져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위해 한국관광공사LA지사(지사장 김명선)는 6명의 직원을 현장에 파견해 행사를 도왔으며, “Korean War”를 비롯한 오늘의 한국 발전상을 담은 책자들을 배포해 참전용사들과 가족들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김명선 한국관광공사지사장은 인사말에서 “한국이 오늘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60년전 한반도에 와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여러분 용사들의 공헌”이라며 “우리 모두는 여러분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날 한인사회에서 유희자무용단(단장 유희자), Way of Oriental 태권도(사범 이종학), 고 라인 댄스팀 등이 출연해 미 참전용사들을 기쁘게 했다. 이날 감사 잔치에 김봉구 미주한인방송인협회상임고문, 이선주 목사, 이종구 전미한인복지협회, 윤수진 국제한인라이언스전총재, 이상오 전 한국관광공사 이사 등을 포함해 미군에 복무했던 한인들도 참석해 행사를 빛냈다.
하지만 이 같은 뜻 깊은 행사에 LA총영사관(총영사 김재수)이나 한국문화원(원장 김재원)은 관심을 두지 않아 한인사회와 대조를 보였다. LA한인회(회장 스칼렛 엄)도 후원단체로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회장 임원 중 어느 누구도 참석치 않았다.
한편 이 자리에 참석한 로벨르또 갈씨아(81, 벤추라가운티 거주, 미해병 제1사단 중화기 소대원)씨는 “내가 싸워 지켜준 한국이 오늘날 12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면서 “오늘 우리를 잊지 않고 감사의 잔치를 개최하여 준데 대해 너무나 고맙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룬 김원보(72) 회장은 한인사회에서는 “입양아의 대부”로 잘 알려진 올드타이머다. 거주지는 산타바바라지만 70년대부터 LA코리아타운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 온 봉사자이다. 그가 참전용사 사은의 밤을 처음 개최했을 때는 1984년 한국이 올림픽 대회를 처음 개최했던 때였다.
당시 미 참전용사들은 중장년이었고 한국의 올림픽 개최에 남다른 감회를 지녔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 참전용사협회’가 생기는 등 주류사회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동안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7회에 걸쳐 행사를 개최해 오다가 중단되기도 했는데, 올해가 한국전 60주년이기에 다시 힘겹게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사회에서도 힘든 모임을 한인사회가 했다는 점에서 산타바바라 미 주류사회에서도 김원보 회장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이번 행사에 산타바바라 시장이 직접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는 점이 남다르다.
이번 행사에 대해 김 회장은 “우리가 미국 땅에 와서 살면서 참전용사들에게 감사를 표시한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부여하는 것이고, 후대를 위해서도 뜻있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의 활동에는 항상 남편의 뜻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내조하는 부인 김은경 여사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주위에서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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