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스파이 사건 후폭풍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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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가 때아닌 ‘스파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햄버거 정상회담’으로 우의를 과시한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가 활동하던 20세기에나 어울릴 법한 일이 21세기에 일어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6월 28일 미국 내에서 10여 년 동안 ‘보통사람’처럼 살면서 러시아를 위해 첩보 행위를 벌여 온 11명을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뉴욕, 보스턴, 용커스 등지에 살면서 미국의 핵무기 정보와 이란 정책을 파악해 왔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7년 전 이런 낌새를 눈치채고 이들을 감시해 오다가 핵심 용의자가 출국을 시도하자 체포했다고 밝혔다.
                                                                                <데이빗 김 취재부 객원기자>




러시아 발끈, 백악관은 몸 낮춰

미국 언론은 특히 11명의 첩보원 가운데 ‘미모의 여자 스파이’ 안나 채프먼(28)에 주목했다. 첩보영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그의 행보에 대해 ‘미녀 첩보원의 섹시한 접근’ 등 선정적인 묘사가 따라붙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예견해 유명해진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와 일부 재계 인사들도 그녀와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국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첩보원의 수가 냉전시대와 비교할 때 줄어들지 않았다”고 전했다. 서방 언론은 러시아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는 듯이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스파이를 파견한 것으로 지목받은 러시아 정부는 도리어 발끈하고 나섰다. 세르게이 랍로프 외무장관은 미국 당국에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 달라고 촉구했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 법무부가 왜 냉전시대처럼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미국이 스스로 양국 관계 재설정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백악관은 한껏 몸을 낮췄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체포는 사법 당국이 행한 것이므로 두 나라 관계에 악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백악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불과 나흘 전 양국 정상이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햄버거 가게를 찾아 치즈버거를 함께 먹으며 우의를 과시한 것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러시아가 체포된 11명 가운데 일부가 자국 국적자임을 인정하면서도 고자세로 나오는 근거는 이들의 첩보 행위가 ‘미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일이 왜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가 일각에서는 미국 내 강경파가 이번 일을 꾸몄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지낸 니콜라이 코발료프 의원은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은 미국 내 매파들이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을 견지할 필요가 있음을 알리려고 벌인 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러시아 간첩들이 땅에 묻힌 공작금을 찾아갔다는 기소 내용에 대해 “마치 첩보 소설 같다”면서 “21세기에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블라디미르 콜레스니코프 의원도 “유감스럽게도 미국 내에 아직도 냉전 유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며 화살을 미국쪽으로 돌렸다. 그는 “미국 첩보요원들도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면서 “과거에는 간첩 혐의로 적발된 미국인들을 조용히 추방했지만 앞으로는 그들에게 더 엄한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번에 드러난 스파이들의 활동이 그동안 두 나라가 암묵적으로 묵인해 온 수준의 정보 수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지 W 부시와 푸틴이 집권하던 당시 ‘신냉전’이라 불릴 정도로 악화된 두 나라 관계가 오바마와 메드베데프의 등장 이후 급격히 가까워진 데 부담을 느낀 미국 내 강경파가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이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6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햄버거 가게에서 함께 치즈버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작 빼낸 정보 인터넷서도 가능

미국 내에서도 이번 사건에 대한 의문이 터져나왔다. 스파이들이 특수 훈련을 받고 최첨단 기구로 무장했으며, 미국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는 등 ‘완벽한 간첩’의 면모를 갖췄지만 정작 얻어낸 정보는 별것 아니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이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인터넷으로도 수집할 수 있는 정가의 소문이나 정책 논쟁을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실제 이들의 기소장에는 ‘간첩’ 혐의 대신 신분을 속인 채 외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내용만 적시됐다. 신문 내용이나 외교·안보 분야의 주요 인물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정도가 이들의 임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굳이 이 정도의 일을 맡기기 위해 러시아가 비밀요원들을 미국에 파견한 데 대해 과거 공산권의 CIA 지부에서 비밀리에 활동한 밀턴 비어든은 ‘해일 메리 패스(Hail Mary pass)’라는 단어를 써 설명했다. 미식축구에서 경기가 끝날 무렵에 전방을 향해 무작정 공을 던지는 것처럼 여기저기 첩보원을 심어 놓고 혹시 낚일지 모르는 ‘대어’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다채로운 연장을 동원했음에도 대어를 낚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21세기판 미·러 첩보전’은 요란스럽게 세간에 공개됐지만 이렇다할 외교적 파장을 불러오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러시아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해법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불거져 나오고 있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알렉산드르 토르신 러시아 연방의회 부의장은 “이번 사건이 대규모 간첩 스캔들로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냉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언론은 이번 일로 미국 내에 오바마의 대(對) 러시아 유화 정책에 대해 불신하는 세력이 있음이 드러났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과 러시아는 지난해 미국의 새 정부 출범 이후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힘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시한이 만료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대체할 새 협정에도 합의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한목소리로 규탄하며 추가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때아닌 스파이 사건이 해프닝으로 끝날지, 양국 관계의 후퇴를 불러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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