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황장엽 망명 숨겨진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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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심장마비로 별세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14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치됐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황 전 비서 별세 후 8일 만인 지난 18일 그의 망명을 도운 LA 동포 백영중 전 흥사단미주위원부 위원장도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이 크다. 또 두 사람의 갑작스런 비보에 남다른 애환과 슬픔을 지닌 미국인 여성의 사연도 눈길을 끈다.
백영중 회장이 없었다면 1997년 황 전 비서의 충격적인 망명은 역사 속에 없었을지 모른다. 또 미국인 북한운동가 수전 숄티 여사가 없었다면 황 전 비서가 미국 땅을 밟아 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 전 비서는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냈고 1970년 당중앙위원을 거쳐 1980년 당비서에 오른 북한 내 최고위급 인사였다. 사실상 ‘주체사상’의 뼈대를 세운 ‘브레인’으로 요직을 거친 그는 1997년 북경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망명했다.
망명 후 한국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황 전 비서는 2003년 수전 숄티 여사의 도움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해 백영중 회장을 만나 극적인 해후를 나눈 바 있다.
황 전 비서와 함께 북한 인권운동을 전개했던 솔티 여사는 태평양을 건너 황 전 비서의 장례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솔티 여사는 북한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했던 고인의 뜻을 회고하면서 “황장엽 선생님은 남은 자들의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그것은 모든 탈북자들이 지고 있는 바로 그 짐이었다”라고 토로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황장엽 전 비서와 백영중 회장이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밀착 취재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평남 성천이 고향인 백 회장은 6·25전쟁 중인 50년 흥사단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합의가 이뤄진 뒤 클린턴 정부는 국가안보회의(NSC) 주도로 미국 기업인들을 북한에 보냈고 당시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백 회장은 패코 스틸 기업주로 미국 기업인시찰단 12명의 일원이 돼 95년 2월 북한을 방문했다.
백 회장은 당시 북한에 있는 노모와 동생들을 만날 것을 기대했었다. 그때 북한에서 미국 기업인 대표단을 담당한 부서가 노동당 국제부였고 담당 비서가 바로 황장엽 전 비서였다. 그러나 백 회장은 당시 가족들과 상봉을 하지 못했다.
이에 낙담한 백 회장에게 황 비서는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서 “이번 회담을 통해 백 선생이 미국에서 존경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3개월 뒤 가족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그때 다시 방문해달라”고 귓속말로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95년 9월, 백 회장은 황 비서의 초청장을 받고 다시 방북, 초대소에서 97세 노모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기에 이르렀다.
방문 일정이 끝나가던 날 밤, 황 비서 수행원은 백 회장을 찾아와 이번에 만나지 못한 두 동생(당시 두 동생은 수용소에 있었다고 했다)을 만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백 회장이 당황하자 그들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백 선생의 모든 것을 보고했다. 위원장께서는 백 선생이(동생을 만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으로 믿고 계신데 큰일 났다”라며 불안해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백 회장은 수년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는 함부로 약속할 일이 아니었다. 북한에 돈을 보내는 것은 미국정부 자산금지법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백 회장은 “그날 밤 공포감에 휩싸여 ‘거짓말이 돼도 좋다면, 하나 써주겠다’고 제의하여 황장엽 비서 앞으로 50만에서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메모를 써줬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그리고 백 회장은 “그 쪽지가 나중에 황 전 비서의 망명에 이용될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망명 수단 된 ‘메모 한 장’

당시 북한은 외화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 일은 황 비서가 담당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황 비서에게 외화벌이를 독촉하는 입장이었다. 극비리에 망명을 준비 중이던 황 비서에게 백 회장의 메모는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구실이 됐다.
그는 의형제인 여광무역 총사장 김덕홍씨, 이연길 회장 등과 망명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 황 비서는 96년 문제의 메모지를 이연길 회장에게 건네며 “이 돈을 받아다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망명을 결심한 황 비서는 1997년 2월 김정일에게 일본 여행을 신청했다. 여행 목적 가운데는 미국에 있는 백 회장의 돈을 받아 오는 내용도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황 비서는 일본 여행 중 망명을 결행한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내 조총련의 경호가 너무 강해 빠져 나오기가 힘들어 할 수 없이 귀국길에 베이징에서 망명을 결행키로 계획을 수정했다. 당시 일본에서 이 회장은 황 비서의 경호책임자인 문씨를 호텔 내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봉투를 전했다. 안에는 2000달러가 들어 있었다.
이날 이 회장이 황 비서에게 인사하고 싶다고 하자 문 씨는 그를 황 비서의 객실로 안내했다. 이 회장은 황 비서를 만난 자리에서 “지금 재미교포 백영중 선생이 100만 달러를 전해드리기 위해 도쿄에 와 계시다. 그런데 이 호텔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곤란하니 힐튼 호텔로 와달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황 비서는 암묵적인 상황을 눈치 채고 “공화국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돈인데, 받아가야지”라며 큰소리로 화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감시가 심해 망명은 중국에서 결행키로 했다. 아무래도 중국은 북한과 이웃이고 당시로는 북한이 중국을 자신의 관할 구역으로 생각해 모든 것이 느슨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2월 11일 황 비서 일행이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이연길 회장은 다시 쪽지에다 백 회장의 글인 것처럼 메모를 적어 황 비서에게 전했다. 메모에는 ‘일본에 약속한 돈을 가져왔는데 주위의 눈들이 많아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 황 비서님께 먼저 30만 달러를 전해드리게 할 테니, 꼭 받아서 공화국에 돌아가시







백영중 회장은 누구?






故 백영중 회장은 1930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홀로 월남해 연세대 재학 중 26세 때 흥사단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1956년 미국에서 유학했다. 그는 오레곤 주립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철강분야에 투신한 그는 팩코(Paco Engineering Co.)사를 창립해 80년에 빔을 개발해 일약 ‘철광왕’으로 불리며 미국산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90년대 연간 매출 1억 5천만 달러를 올리는 탄탄한 기업을 일군 덕분이었다.
1982년에는 ‘올해의 아시안 비즈니스맨’으로 선정됐으며 1994년에는 아시안 경제인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환담했다. 그 인연으로 1995년 미국 경제 대표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해 헤어졌던 가족과 만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북한에서 그를 상대한 인물이 훗날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다.
백 회장은 1997년에 아칸소주에 대형 철강빔 공장을 건설한 후 1999년 미국 제2의 종합철강회사인 뉴코 스틸과 합작해 미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1997년 ‘올해의 기업인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2005년 자서전을 출판했고 연세대 등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기도 했다. 흥사단 미주위원장을 오래 역임했으며 2004년 한상대회에서 ‘거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국민회관 기념재단의 공동이사장을 맡은 그는 2008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1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연세국제재단을 위해 기증해 화제가 됐다. 지난해 소수민족연대협의회(NECO)가 수여하는 엘리스아일랜드상도 수상했다.
18일 향년 80세로 별세한 백 회장은 유족으로 부인과 두 아들이 있으며 최근 ‘루케미아’(백혈병)로 치료를 받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황 비서를 감시하는 경호 책임자도 이 글을 보았다.
황 비서는 일본을 떠나 2월 11일 중국에 도착 북한 대사관에 여장을 풀었다. 대사관 전화가 울렸다. 김덕홍 회장의 전화였다. “재미교포 백영중씨가 보낸 사람이 저와 함께 있다. 제가 내일 아침에 대사관으로 갈 테니 저와 함께 그 사람을 만나신 뒤 평양에 들어가자”는 내용이었다. 북한대사관이나 황 비서 수행원들은 그를 백 회장의 ‘30만 달러’를 전하기로 한 사람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다음날인 2월 12일 오전 중국 베이징의 북한 대사관에서 황 비서는 경호책인 문씨에게 “나는 미국교포 백씨의 돈을 받아 올 테니 공항에서 만나자”라며 따돌렸다. 이후 북한대사관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김덕홍씨가 대사관으로 들어가 “미국 교포 백씨가 보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도 의심을 하지 못했다. 황 비서는 김씨와 함께 북한대사관 문을 나서 대기한 승용차에 올랐다. 승용차는 쏜살같이 달려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 후 필리핀을 거처 한국에 망명한 황 전 비서는 수잔 솔티 여사의 노력으로 2003년 10월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백 회장은 황 전 비서를 다시 만나 회포를 풀면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며 황 전 비서를 반겼지만 백 회장은 그 후 북한에 남겨진 두 동생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당시 황 전 비서는 백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할 말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황 전 비서의 망명 후에도 북한 측은 백 회장과 연락을 취하며 “동생을 만나고 싶으면 공화국에 오라”고 종용했으나, 이에 응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북한 측은 어떤 때는 위협을 했고, 어떤 때는 유화책을 썼다. 이후 북한에서 전해진 소식은 두 동생이 수용소에 있다는 이야기였으나 백 회장은 동생들을 죽은 것으로 애써 생각했다.
백 회장은 생전에 “원래 두 동생도 함께 월남하려 했으나, 나이가 어려 함께 가다 붙잡힐 염려가 있어 내가 ‘나중에 꼭 데리러 온다’고 하고 헤어졌다”며 “황 전 비서가 망명하면서 자연히 나와의 관계도 북한이 알게 돼 고민을 많이 했었다”고 말했다. 
 








故 황장엽 전 비서에게는 남다른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북한 인권을 위해 한국인보다 더 열정적으로 활약해 온 수잔 솔티 여사(51, 디펜스 포럼 재단 회장)다. 두 사람은 2001년 황 선생이 “북한 인권을 위해 애쓴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에 온 숄티 여사를 숙소에 가서 처음 만난 뒤 10년 동안 가깝게 지냈다. 숄티 여사는 1년에 2~3차례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황 전 비서를 만났다.
황 전 비서는 지난 11일 숄티 여사와의 만남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난 4월 자유북한주간 행사 이후 6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후는 약속 하루 전인 10일 심장마비로 황 전 비서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불발됐다.
솔티 여사는 조선일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에 만나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기회’라고 말하려 했다”며 못다 한 얘기를 털어놨다.
숄티 여사는 “3대 세습에 대해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슬슬 쏟아져 나오는 이 시점에 더 많은 이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려 북한을 개방시켜야 한다고 전하려 했다”며 “그는 내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했다. 숄티 여사는 “탈북자들은 장기 비전을 제시해준 보호자를 잃었다”며 황 전 비서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생전에 황 전 비서는 숄티 여사에게 “통일이 되면 평양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남한처럼 ‘대동강의 기적’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고 전했다. 그녀는 “제겐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저를 늘 격려하고, 큰 힘이 돼 주셨다. 통일이 되면 평양 에 제 동상을 세워주시겠다고 농담을 하곤 하셨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수잔 숄티 여사는 탈북자 지원과 북조선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미국의 비정부기구 디펜스 포럼의 회장이다. 2008년 제9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미국 의회의 북한인권법 통과와 탈북난민 강제북송 금지 운동 등에 앞장서 왔다. 2003년 황장엽 전 비서의 미 의회 증언 성사시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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