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에 책 펴낸 어느 ‘민초’(民草)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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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김용하(90)옹은 실업자다. 나이 90세에 실업자라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김 옹 자신은 “이제 나는 실업자”라고 말한다. 그의 나이 80세에 시작한 글쓰기가 10년 만에 끝나는 바람에 스스로 더 할 일이 없어 “실업자”라고 자칭한다.
김 옹은 지난 12월에 ‘방랑 90년 민초의 세상 이야기’(도서출판 책과 사람 2010)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발행부수는 달랑 50부. 주위에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만 전해졌다. 이 책을 받아 든 사람들은 나이 90세에 책을 펴냈다는 사실에 놀랐고, 책을 읽으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직접 붓으로 써 내려갔으며, 책을 쓰기 위해 90평생 틈틈이 적어 놓은 메모지가 엄청났다고 한다. 김 옹은 일본군, 광복군, 미군, 한국군 등 4개국의 군대를 복무한 기록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김 옹이 펴낸 책은 자서전이 아니다. 그가 90 평생을 살아오며 주위를 둘러보며 지녔던 생각들과 평생에 귀감이 되었던 좋은 글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역마직성(驛馬直星)의 팔자소관을 타고 난 여행이야기, 노년에 배운 서예 관련 글들과 순간순간의 단상을 모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최근 건강이 나빠져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 입원 중인 김 옹을 <선데이저널> 취재진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진 취재부기자>



지난 14일 세인트 빈센트 병원 521호실을 노크하자 병상에 누워있던 김 옹은 벌떡 일어났다. 기자가 “그대로 누워 계시라”고 만류 하여도, 한사코 일어나 반듯하게 앉았다. 겉으로 보기에 환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다만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기자가 “보청기는 하셨는가”라고 귀에 대고 말하자 “이제 나이가 많아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 90세에 책을 펴낸 동기를 묻자, 그는 기자에게 책을 건네주며 “이 책은 나의 일대기도 아니고, 문학적 작품도 더더욱 아니다”라며 “천학비재(?學菲才)의 습작 정도로 보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 책을 50부만 찍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냥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내 못다한 이야기를 전해 주려고 한 것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언제 퇴원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내 주에 퇴원할 예정이다. 집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데…책을 펴내느라 하도 고생을 해 당분간 쉬고 싶다”면서도 “그래도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흔 평생에 남는 기억 중에 생생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김 옹은 노래 가사를 힘차게 불렀다.
“총 어깨에 메고 피 가슴에 뛴다/ 우리는 큰 뜻을 품은 한국혁명 청년들/ 나아가 나아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그는 “광복군 노래”라면서 “아직도 그 때 불렀던 광복군가가 생생하다”고 했다. 일본 해군에 끌려 갔다가 만주에서 광복군에 입대했다.
김 옹은 1920년 8월 27일 평북 정주군 임포면 원단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정주는 민족 정기의 본산인 오산학교가 있던 곳이다. 그 고장에서 시인 김소월도 태어났다. 김소월은 김 옹의 친척이기도 하다. 김 옹은 “어줍잖은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보려는 것도 아마 같은 공주 김씨인 동향의 김소월 시인의 영향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안동성 봉황에 있는 심상고등과에서 2년 과정을 졸업하면서 한국인 학생으로서는 초대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 후 큰 형의 주선으로 압록강 수풍발전소에서 근무하였고, 나중에는 운창광업에서 운영한 금광에서도 근무하다가 1943년 일본군에게 징집당해 일본해군에서 복무했다. 45년 중국 산동성에서 일본의 패망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했다.
당시 중국 국부군에 편입되어 있던 광복군에서 20대 청년인 김 옹은 처음으로 마음 놓고 애국가를 불렀으며, 광복군가를 부르면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광복군에는 이대영 목사가 군인들의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고,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를 조국을 향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안목을 넓혀주었는데 당시 김 옹도 이 목사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조국이 해방된지 1년 만에 미군 함정을 타고 인천을 통해 그리운 고국 땅을 밟은 김 옹은 고향 정주를 한번 돌아 본 후 서울에 정착해 ‘용마운수회사’를 설립해 역마차로 서울 시민의 발이 되어 장안을 누볐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택시회사를 운영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 옹은 미육군 제3사단에 입대해 미군의 신분으로 일본에서 3개월간 특수훈련을 받고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전투를 벌였다.
이후 함흥에 주둔하다가 흥남 철수 작전 때 미주리 함을 타고 후퇴해 낙동강 사수 작전에 투입되어 나중 서울 탈환 후 철의 삼각지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휴전을 맞았다. 그는 미국에서 상사 계급으로 복무하면서 한국군인을 대표해 각종행사에도 참석했다.
휴전 후 김 옹은 한국군으로 편입되어 통신병과에서 근무하다가 고령으로 제대했다. 1943년 일본 해군에 끌려간 이래 11년 만에 4개국 군인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그의 20대 청춘 생활을 군인으로 보냈던 것이다.
김 옹은 “10여년 이상 군인 생활을 하면서 여러 나라를 공짜로 구경한 재미도 있다”며 “아마도 나처럼 4개국 군인 생활을 한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도 몇 안될 것”이라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군인생활에 대해 “민족 수난 시대에 비록 말단의 존재였으나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의 산 증인”이라며 “나 혼자만의 어려움이 아니지 않는가”로 치부하고 있다. 지금도 중앙일보에 연재되는 백선엽 장군의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연재물을 읽으며 옛 전우들을 그리워한다.




아내 미소엔 가슴 설레

그는 1953년 8월 지인의 소개로 평생의 반려자인 부인 전근옥 씨와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다.
50년대 어려운 시절 그는 대한극장 옆 공터에 대형천막을 치고 온돌을 깔아 난방을 만들어 놓고 천막식당을 개업했는데 김희갑 등 당대의 인기배우들이 드나들었으며, 나중 중앙시장에 상록수 식당을 차려 장안의 곱창은 다 가져 올 정도로 장사가 잘되어 큰 돈을 벌었다. 또한 영등포에 3층 건물을 매입해 상하연인숙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넓은 세상이 그리워 남미로 이민을 갔다가 1977년 7월 7일 단신으로 뉴욕 공항에 내렸다. 그 후 가족들을 초청해 80년대 LA로 이주해 다운타운에서 한인들이 아닌 히스패닉 계를 포함한 타 소수인종들을 상대로 한 첵-케싱 사업을 운영해 임대해 사업을 벌였던 건물도 구입해 착실히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두 딸도 아버지를 도왔으며 나중 대학에 진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버거 킹 체인 식당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금 김 옹에게는 자신보다 부인 걱정이 더 많다. 부인은 10여년 전부터 신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현재 김 옹이 입원하고 있는 세인트 빈센트병원에 다른 입원실에 머물고 있다.








김 옹은 “내 마음이 착잡하다”면서 “평생 나와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하였는데 내가 그 은혜를 갚지 못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부인이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지으면 가슴이 설레인다고 한다.      
그는 세상일에 무관할 수가 없다. 최근 일본의 독도 야망에 대해 그는 “독도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된다. 선진국인 일본이 어찌….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아직도 월드컵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책에서도 월드컵이란 제목의 글에서는 “우리 역사에 언제 이렇게 신명나는 잔치를 한바탕 치른 적이 있는가? 지는 싸움만 했지 언제 우리가 한번 이겨 보았는가. 3.1운동 때를 생각해보라. 8.15 해방 때 감격보다도, 4.19 의거 때보다도, 6.29 항쟁 때보다도 더 많은 국민이 거리를 메웠고 세계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합창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이르는 시발점이 될지어다”라고 적었다.
그는 과거 남미 지역에 살 때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 “아순션”이라는 모임을 통해 매월 또는 격월로 만나고 있는데 벌써 30년이 넘었고, 5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고 있으며, 만날 때 마다 이런 저런 소식들이 넘쳐나는 정겨운 모임이다. 김 옹은 그 단체에 회장직도 맡은 적이 있다.
바둑도 김 옹에게는 뗄 수 없는 취미이다. 요즈음 입원 중이라 마음만 바둑판에 가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나의 지난 시절은 악마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양성의 세태였으며, 전쟁과 평화, 비극과 희극의 연쇄적 파동이었고, 급변하는 속도의 시대였으며 파란만장의 세월이었고, 숙명적이면서 남다른 기구한 운명의 한 세상이었다”고 말했다.
한인동포들에게 혹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했을 때 김 옹은 손사래를 치며 “내가 무언데 동포들에게 말을 하는가”라면서도 “꼭 이 말은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즈음 세대들은 근대사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면서 “우리 세대에서 비참한 6.25전쟁, 2차대전 중 민족수난사 등을 알고 또 후세에 전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책을 쓴 것도 나의 체험을 들려주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그의 책은 수필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책은 한 제목 당 200자 원고지 3~5매 정도로 간결하게 쓰여 있다. 이야기 묶음은 모두 7장으로 되어 있으며, 미국이야기, 웃음이야기, 세상이야기, 소중한 이야기, 종교이야기, 여행이야기, 민초이야기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글에서 그가 세상을 살아 오면서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고 의미있게 담았다. 그래서 그는 지난 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라고 했다.
다가오는 시간은 뭔가 좋은 변화에 대한 기대와 새로워지고자 하는 의욕으로 기다릴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신체적으로는 노인이지만 정신은 아직도 20대 청년으로 만주 땅 광복군 시절의 힘찬 군가를 부르고 있다.
그는 책에서 이제 글 쓸 일이 없어 실직자가 된 것이 섭섭하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는 세상이야기를 집필하면서 남은 삶에 대한 소망이 더 커진 것이 수확이라고 했다. 생전의 이루고 싶었던 꿈(책을 펴내는 일)을 달성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책은 달랑 50부만 찍었다. 김 옹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주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이 분들만이라도 읽어준다면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김 옹은 이 책 말미에 왜 이 책을 출간했는지에 대한 글을 적어 놓았다.
“이제 하늘소풍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이 글을 통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다. 우리 부부의 10년 노환을 극진한 효심으로 돌봐준 사랑하는 두 여식, 은혜와 은자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다. LA 성 빈센트 병실에서 민초를 간호하며 이 글을 받아 적어준 김영미 선교사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무엇보다 나와 한평생 동행하여 주시고 이제 천국으로 부르고 계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센 빈센트 병원 병실을 나오며, 기자는 김 옹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전해왔다. 기자는 김 옹에게 “아직도 팔팔하십니다. 오래 사세요”라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김 옹의 철부지 소년 같은 아롱진 눈망울이 돌아오는 길 내내 뇌를 떠나지 않았다.







안수산 여사 96세 생일 맞아
“살아있는 미주한인의 전설”








도산 안찬호 선생의 맏따님 안수산(Susan Ahn Cuddy)여사가 지난 16일로 96세 생일을 맞았다. 미주한인 이민사를 연구하는 관계자들은 “미주 땅에서 태어난 초기 한인이민 2세 중 최고령자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날 안 여사는 가족, 친지들과 함께 조촐한 생일 파티를 즐겼다.
안 여사는 아직도 기억력이 생생하며, 보청기 없이도 친지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눈다. 또한 안 여사는 노스리지 자택에서 가끔씩 방문하는 지인들과도 만나 담소를 나눈다. 그의 옆에는 아들 필립 커디씨가 항상 보필하고 있다.
지난 동안 안 여사는 한인사회에 아버지 도산과 어머니의 유산을 전하는데 공헌하고 있으며, 한인 청소년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 주는데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도산의 3남 2녀 중 장녀인 안수산 여사는 1915년 1월 16일 LA에서 출생했다. 안 여사는 아버지 도산의 항일정신을 따르고자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에 입대해 장교학교에 지원했지만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가 다시 지원해 비행사들에게 공중전 전략을 가르치는 미해군 역사상 백인을 포함해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포격술 장교가 된 기록의 여성이다. 1946년 제대한 후 연방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암호를 분석하는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안 여사는 1959년 NSA에서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 D.C.에서 300명의 냉전 관련 학자들을 지도하는 부서장을 역임했는데 별명이 ‘작은 히틀러’일 정도로 철저한 업무 처리로 유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에 나섰을 때 UCLA 강당에서 후보 지원 연설을 했으며, 오바마 지지 유권자 중 최고령자로서도 화제를 모았다.
미주한국일보는 지난해 안 여사의 95세 생일 잔치를 보도하면서 “도산의 히스토리(his-story)에 독립운동가의 선구자적 고뇌가 살아있다면 안 여사의 허스토리(her-story)에는 개척자로 당당하게 삶을 이끌어 간 긍정의 힘이 살아있다. 도산의 ‘무실역행’정신은 딸 안 여사의 삶에서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고 안 여사의 인물을 평가했다.
안 여사의 생애를 담은 영문 전기출판은 번역문학가인 차학성씨에 의해 지난 2003년에 출간됐다.영문판의 제목은 ‘버드나무 그늘'(Willow Tree Shade)이다. UC 버클리 아시안 아메리칸학과의 일레인 김(Elaine H.Kim)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식민지 시대의 조국 독립운동과 전쟁 배경의 미 서부지역 코리언 아메리칸 이민자들의 개척사’라고 평을 했다.
저자 차학성씨는 이 책이 한인 이민 2세들이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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