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터뷰] 신연성 신임 LA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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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오는 3월 9일 부임 예정인 신연성 신임 LA공관장과 국제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 기후변화 대사실에서 인수인계 작업에 한창인 그는 국제전화를 통한 인터뷰에서 신임 공관장으로서의 당찬 포부를 밝혔다.


신 대사는 “LA는 지난해 12월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총회 참석 때 경유지로 들렸다”면서 “아직도 기후변화 대사로서 마지막 잔무를 남겨 놓고 있어 바쁘다”고 근황을 전했다. 조만간 후임 기후변화 대사와 인수인계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LA 공관장으로서의 부임 준비를 할 예정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그는 “코리아타운이 낯설지 않은 곳”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공적이나 사적으로 잠깐이지만 LA코리아타운을 여러 번 경험했다는 그는 “LA는 역동적인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LA에 가족, 친척 또는 친지들을 둔 한국인들이 상당수 있듯 신 대사 역시 LA에 상당한 인맥이 있다. 기자가 ‘LA에서 고려대학교 동문들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전하자 그는 “그렀습니까”라면서 반색하기도 했다. 신 대사는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신 대사는 아직은 신임 LA총영사로서 포부를 밝히기에 이르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지만 외교관으로서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우리 문화를 전파하는 사명감은 어디에 주재하든 변함이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전문 외교관답게 “동포들이 살고 있는 현장에서 함께 토론하겠다”고 말했다. 신 대사는 “가능한 많은 동포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문제점을 나누고 싶다”며 “무엇보다 현지 한인 언론들의 조언과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 대사는 요르단 대사 시절 중국어학과, 일본어학과도 없던 국립요르단 대학교에 한국어학과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그 결과 국립요르단 대학교는 이제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류를 전파하는 문화공연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국립요르단 대학교 한국어학과 설립은 그가 대사로 있었던 2005~2007년 지상사들에게 시청각실 설립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다른 나라보다 한국문화가 잘 보급된 LA에서도 분명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사명감을 나타냈다. 신 대사는 기자가 ‘SAT-2 한국어를 성공적으로 성취한 한국어진흥재단이 미국 정부의 외국어 지침과 현지실정에 맞는 한국어교재도 처음 발간했으며, 현재 AP한국어 추진운동을 하고 있다’고 전하자, “부임하면 관계자들을 만나 함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영성 대사는 한국과 미국의 최고학부를 거쳤으며 국제경제국심의관, OECD 공사, 요르단 대사,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등 30여 년을 전문 외교관으로 활동해온 전문 외교통이다.
LA총영사 자리는 해외 최대 동포사회의 공관장으로서 잘하면 ‘본전’, 잘못하면 ‘망신’을 당하는 자리로 회자되곤 한다.
신 대사가 부임한 이후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실시될 재외국민 투표권 제도 추진을 앞두고 상당한 과제가 쌓일 전망이다. FTA 비준 이후 준비 역시 그의 몫이다. 두 동강난 LA한인회 문제 역시 그의 조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최초의 현지 동포출신으로 총영사로 인기를 모았던 김재수 총영사와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그는 재외국민참정권 실시에 대해 “투표율 높이기보다는 투표에서 소외 되는 동포들의 입장을 더 염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총영사로서 우선순위는 동포들의 권익옹호와 대변이라는 것이다.
LA 총영사 내정 이후 주위에서 적잖은 우려와 질문도 많았다며 신 대사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LA총영사로 부임하는 것에 큰 부담이 없다”고 밝혔다. LA도 사람 사는 곳이니 시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미 그는 해외 임지를 다니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겪어온 인물이다.
신 대사는 과거 요르단 대사 시절에 현지 동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사업을 추진한 경험도 있고, 딱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의 호소를 들어준 외교관이었다. 요르단 대사로 일할 때 신 대사는 다른 공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큰일에 맞닥뜨린 적이 적지 않다.
일례로 어느 날 한 현지 동포여성이 살려달라면서 대사관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그 한인 여성은 이슬람인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는데, 정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따금 해외토픽에 보도되는 이슬람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슬람인들의 ‘명예살인’이 동포여성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엄청난 위기에 부닥친 동포여성에게 신 대사는 이슬람 관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포를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성실히 완수했다.
싱가포르 총영사 때는 한국인 근로자들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것을 보았고, 이들의 시신을 책임지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한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재수 총영사가 동포들을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민간 출신 총영사는 LA 한인 역사에도 커다란 자산이 될 겁이다. 동포들이 그분의 이임을 아쉬워하겠지만, 동포들을 위해 섬기는 자세로 일한다면 저 또한 신뢰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친환경’이 지배할 전망이다. 한국의 외교관으로 기후변화대사로서 탁월한 활동을 남긴 그가 LA동포사회를 대상으로도 ‘친환경 공관장’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성직자의 길은 험난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2000여 년 전 이 땅에 와서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다 빌라도 앞에서 극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어서 골고다까지의 올라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인류를 구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직자의 길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지난 10여 년 간 밸리 지역에서 목회를 했던 갈보리 한인교회(LA Calvary Korean Church)의 담임인 김영모 목사는 최근 코리아타운에서 새롭게 교회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매주일 타운 내 윌셔와 윌턴 코너 사회보장국 빌딩 뒷편 초등학교(4063 Ingraham Street LA, Ca 90005)강당에서 1부(9AM) 2부(11AM), 3부(1:30PM)의 예배를 인도한다.













 ▲ 김영모 목사


김영모 목사는 예배를 인도하기 전 산속에서 홀로 기도를 하며 주님과 약속을 한다. “오늘 하루도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는 약속이다.
매주일 아직은 비록 50명도 안 되는 신도들이 참석하는 일요예배이지만 김 목사는 무엇보다 설교를 위해 많은 생각을 한다. 크리스찬의 삶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하는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는 왜 이 길을 가야하는가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고민을 한다.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광주민주화항쟁운동에서 김 목사는 현장에 있었다. 자신의 친한 친우와 함께 김 목사는 시민군의 일원으로 자리를 지켰다. 계엄군과 대치한 시민군은 마지막 계엄 진압군의 진입을 예상하고 있었다. 김 목사와 친구 문 씨는 서로가 먼저 보초 임무를 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마침 김 목사의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만나러 도청 건물에 오면서 친구 문 씨는 김 목사에게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가지라’며 자신이 교대 임무를 맡겠다며 자청했다. 어머니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아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잠든 아들의 옷가지를 모두 감추었다. 그날 밤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펴면서 양측 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새벽 총소리에 잠을 깬 김 목사는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옷도 없었고, 자신을 붙들며 “너의 형도 죽었는데 너마저 죽으면 나는 어찌할꼬”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보며 어쩔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친구 문 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역사는 그 밤에 변했고, 김 목사의 친우 문 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김 목사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 다시 세상을 원망하고, 망월동 묘지에 친구의 비석을 세우며 하늘을 원망했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김 목사는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어렵사리 고등학교까지 마쳤으나 대학에 갈 학비를 댈 수가 없었다. 고향 땅의 한 전도사가 김 목사의 배움의 길을 안타까이 여겨 신학교 진학을 주선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으나 어머니와 누나의 허락으로 호남신학교에 장학생으로 목회자의 길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 온 35세 젊은 나이의 형이 젖먹이 아들을 두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 목사는 주님이 원망스러웠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 같은 형이 젊은 나이에 죽기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믿고,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인데 그 길에 대한 회의감이 김 목사를 엄습했다. 자연히 방황의 길로 들어섰다. 십자가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

김 목사는 신학교 입교 2학년 때 군복무를 위해 전투경찰대에 시험을 치루고 입교했다. 전경대 복무는 병역의무를 함께 할 수 있는 제도였다. 당시 전경대는 군대와 다름없이 훈련이나 기합이 심했다.
하지만 신앙심이 강했던 김 목사는 전경대 복무 중 ‘주일 날 교회출석’을 건의해 전경대의 허가를 받고 매주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주일을 지켰다. 당시 사회는 부정이 만연했던 시절이었고, 전경대 내부도 다름이 없었다.
전경대 내부에서 별명조차 “전도사”였던 김 목사에게 급식부를 담당케 했다. 그때만 해도 전경대 내부에 수송 차량부에서는 기름을 내다 팔았고, 급식부에서는 식품을 내다 파는 것이 상례였다.
김 목사가 급식부를 맡으면서 부정사례가 없어져 부대 상급자들도 좋아하게 되고 꿈꼼한 재정관리에 전경부대원의 급식도 좋아졌다. 전경대 제대 2개월을 남겨놓고, 전남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입학이 취소될지도 모를 일이였다.
부대에서는 제대 날까지 영외 거주를 허가해 학교를 다니게 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은 김 목사였다. 제대하는 날, 후배 대원들은 도열해 김 목사의 앞날을 기원해주었다. 전경대와 후배들이 마련한 제대식을 마치고 나오는 김 목사는 한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대학교로 돌아온 김 목사에게 전남대 학생들을 총학생회장을 맡겼다. 당시 총학생회장의 자리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운동권의 학생회장 출신들은 나중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출세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마음속 한쪽에는 ‘나도 출세해보고 싶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 목사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났다. LA 빌라델비아 교회 조천일 담임목사 시절 부목사로 목회를 하다가 10여 년 전에 밸리에 개척교회 갈보리한인교회를 설립했다.
김 목사는 아들 3명을 두고 있다. 사모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번 주일에는 어떤 음식으로 신도들을 대접하나’면서 봉사의 길을 걸었다. 그 흔한 ‘사모님’ 소리보다, 행여 다른 소리를 들을가 노심초사하며, 김 목사의 길을 옆에서 말없이 지켜주었다.
코리아타운에서 새롭게 개척교회를 이끌어 가는 김 목사에게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과 기쁨을 주어야 하는데 자신의 능력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세한 동향인들이 가끔 ‘미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할 때면 김 목사는 더욱 외로워진다.
그럴 때면 산에서 홀로 기도를 하면서 어떤 때는 바위를 치며 자신의 기도가 하늘에 닫기를 염원한다. 사모도 한국 친정에 경조사가 있어도 내색을 할 수가 없어 주일을 피해 몰래 다녀오곤 했다. 성도들 보다 헌금을 더 내기 위해 집안 살림을 아껴 쓴다.
이제는 성인이 된 세 명의 아들도 목사이면서 아버지인 김 목사의 힘든 삶을 지켜보며 자랐다. 어느 해 생일 날, 김 목사는 세 아들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세 아들들은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은 거액의 돈을 아버지에게 선물하면서 ‘고생하시는 어머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 오시라’고 했다.
외로운 사람, 힘든 처지의 사람, 물질은 풍부해도 정신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며 십자가의 길을 보람 있게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갈보리 한인교회를 찾아가보면 십자가의 길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문의 : (213)718-0098
LA갈보리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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