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가수 이장희 저작권 다툼 “깨어진 40년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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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Sundayjournalusa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이장희 씨에게는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등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이른바 ’70-80’ 세대들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가슴 한켠을 저미게 한다.

그가 이처럼 가수로서 성공하는 과정에서는  ‘김 석(본명 김봉석)’이라는 매니저가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지난 40여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는 사실은 대중 음악계에서는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이른바 ‘세시봉 친구들’ 열풍으로 또다시 스타 덤에 오른 이장희 씨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과 소송에 휩싸이면서 김 석 매니저와 결별을 선언하는 등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분쟁 중심에 서있는 가수 이장희 씨의 40년 지기 김 석 씨가 이곳 LA를 방문해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고백과 함께 폭로전을 펼치며, LA에서의 제2라운드 소송을 예고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지난 10일 LA 한인타운 가든스윗 호텔에서는 전직 매니저인 김 석 씨가 ‘가수 이장희 씨 상대 배상소송 제기 및 사생활 폭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과거 LA에서 라디오코리아를 15년 가까이 운영했던 이장희 씨의 오랜 매니저이자 집사로서 라디오코리아 한국 지사장을 역임했던 김 석 씨는 이날 기자회견을 끝마친 뒤 선데이저널 취재팀과 별도로 만나 그간 베일 속에 숨겨졌던 이장희 씨의 여자관계, 마약류 취급 등 비밀 이야기를 여과없이 털어 놓았다.


<특별취재팀>


  • 관련기사 : 가수 이장희 전 매니저 김 석 씨 LA 폭로 기자회견













    ▲ 지난 10일 가수 이장희 씨의 전 매니저 김 석 씨가 LA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해 눈길을
    끌었다.

    ⓒ2011 Sundayjournalusa


  • 최근 한국 연예계를 강타하고 있는 ‘복고바람’의 중심에는 단연 ‘세시봉 친구들’이 서있다.

    지난달 LA에서도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는 등 그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LA에서 라디오코리아를 경영해 더 친숙한 가수 이장희 씨 또한 인기몰이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세시봉 열풍’을 일으킨 MBC 문화방송은 창립 50주년 기념 세시봉 콘서트를 미주지역 등 국내외적으로 이어가고 있으며, ‘가수 이장희’ 씨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는 등 LA에서도 바쁜 촬영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다.










    가수 이장희 씨는 누구?
    1975년 대마초 파동의 풍운아














    ▲ 지난 1974년 화제의 결혼에 골인했던 이장희 씨와 재벌가 2세 부인의 스토리를 다룬 한 주간지 기사.




















    이장희 씨는 지난 1947년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부산리에서 태어나 서울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지난 1971년 DJ 이종환 씨가 권유해 ‘겨울이야기’로 가요계에 데뷔해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등 주옥 같은 히트곡을 내며,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알’을 진행하는 DJ로서 명성을 날리는 등 한국 최고의 로맨티스트라는 찬사를 받아왔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74년 자신의 노래 주인공이자 첫사랑인 4살 연하의 재벌가 2세와 결혼발표를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장희 씨는 이화여대 불문과 출신으로 동일방직 고 서정익 회장의 딸인 서혜석 씨와 백년가약을 맺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끝내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인 지난 1975년에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발령으로 이른바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돼 활동정지를 당한 바 있다.

    당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대마초 파동’의 핵심인물이 된 배경에는 최고 권력자의 아들 P씨에게 마약류를 취급하게 한 장본인으로서 대대적 체포사건의 발단이 됐다는 후문은 파다했다.

    이는 이장희 씨가 동아방송의 ‘0시의 다이알’ 인기 DJ 시절 광적 팬이었던 P씨가 군부정권의 상징였던 검은 짚차를 타고와 새벽녘에 이장희 씨를 만나 ‘대마초’를 피웠는데, 이 사실이 상부에 발각되면서 이장희 씨를 포함한 가수, 연예인 등 80여명이 체포되는 대대적 긴급조치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유신정권에 단단히 미운 털이 박힌 이장희 씨는 이후 가수활동을 접은 뒤 1980년 도미해 LA에서 ‘로즈가든’이라는 뮤직바 개념의 레스토랑을 운영했으며, 지난 1989년에는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해 경영하는 등 언론방송인으로의 변신을 꾀했었다.

    하지만 이장희 씨의 대마초 등 마약류 취급에 관한 일화는 LA로 도미한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했다.

    이 씨가 3가와 라브레아 길에서 운영했던 ‘로즈가든’은 이른바 ‘대마초 아지트’로 불리웠으며, LA에서는 그가 지인들과 함께 마약류를 취급했다는 사실은 LA에서 더 이상 풍문이 아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지 오래다.

    결국 이러한 그의 방탕한 생활은 복잡한 여자관계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1남 1녀의 가장으로서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 채 끝내 이혼에 이르게 되는 배경이 됐었다.

    한편 라디오코리아라는 LA 최고의 명물 방송국을 창립했던 이장희 씨. 지난 2003년말 돌연 ‘전파 임대료’ 상승을 이유로 ‘방송중단’을 강행해 구설수에 오른 바 있으며, 이후 울릉도에 매입해 둔 별장에서 칩거(?)생활을 펼치던 중 최근 ‘세시봉 친구들’ 열풍에 힘입어 가수생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이렇듯 가수로서의 ‘재기’를 꿈꾸는 이장희 씨는 얼마전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라는 신곡을 발표하는 등 지난 몇년 간의 섬생활과 함께 울릉도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가삿말로 눈길을 끌고 있다.

    아울러 오는 가을에는 전국 콘서트를 준비하는 등 한때 잊혀졌던 ‘스타’로서의 명성을 되찾으면서, 그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재조명받는 등 ‘저작권료’가 짭짤한 수익원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장희 씨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특별히 예금해 두는 통장을 두지 않는다”고 밝힐만큼 특이한 재테크 방식으로 주목을 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습관이 부메랑이 된 것인지 그간의 저작권료를 지인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맡겨두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분쟁의 씨앗을 스스로 남겼다.


    4선 신상호 한국저작권협회장과의 분쟁


    지난해부터 한국 음악계를 ‘7080’의 복고 분위기로 이끌고 있는 ‘세시봉’ 열풍. 그 뜨거운 열기가 도무지 꺼질 기세가 아닌 가운데, ‘조영남-송창식-윤형주-김세환’과 함께 이들의 음악친구인 가수 이장희 씨 또한 재조명되고 있다.

    세시봉 열풍의 시발점이 된 ‘MBC 유재석-김원희의 놀러와’ 특집 콘서트 뿐 아니라 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는 등 말 그대로 상종가를 달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의 과거 히트곡들이 라디오-TV 전파를 타면서 저작권료가 알게 모르게 급상승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장희 씨는 사실상 30여년 넘게 대중음악계를 떠나면서 LA에서 라디오코리아를 경영하는 등 언론방송계로 전업했고, 그 과정에서 저작권료를 오랜 지인이자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수장였던 신상호 회장에게 위임장을 써 맡겨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인기세를 실감하자 저작권료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됐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큰 액수인 것을 확인하고 뒤늦게 위임 당사자인 신 회장과 알력이 생기게 됐다고 한다.

    이에 이장희 씨는 한국 검찰에 신상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을 고발하는 등 초강수를 뒀으며, 증인으로 전 매니저인 김 석 씨 등이 검찰의 소환을 받는 등 조사절차가 한창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신상호 회장 측은 “오랜 지인이자 절친인 이장희 씨가 내게 위임장을 맡겨 이혼한 전처와 매니저 김 석 씨에게 매달 나오는 저작권의 일부를 지급해달라고 당부했었다”며 “이에 이장희 씨를 대신해 저작권을 관리해 왔으나 뒤늦게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며 소급을 요청하는 등 이율배반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이장희 씨는 “그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의 금액이라고 말해 전혀 신경쓰지 않았는데 우연히 저작권 내역을 살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신 회장이 최소한의 성의라도 표시했다면 검찰 고발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이같은 ‘저작권료 분쟁’에 휩싸인 이장희 씨의 전직 매니저 김 석 씨가 LA를 방문해 폭로 기자회견을 갖는 등 향후 LA에서 역소송 방침을 밝혀 눈길을 끈다.

    지난 10일 LA 한인타운 가든스윗 호텔에서 이장희 씨의 전 매니저 김 석 씨는 “한국 검찰 조사과정에서 이장희 씨가 40년간 집사역할과 매니저를 자처해온 나를 마치 구걸하는 거지인 양 표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며 “이 자리를 빌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고 전했다.


    돈 앞에 무너진 ‘40년 형제애’


















    ▲ 현재 법정고소 분쟁에 휩싸인 세 사람. 좌로부터 신상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가수 이장
    희 씨, 전 매니저 김 석 씨(사진 위). 40년 지기로 2살 터울의 의형제로 지내온 가수 이장희 씨
    와 매니저 김 석 씨의 다정했던 한때(사진 아래).
     
    ⓒ2011 Sundayjournalusa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끝마친 뒤 본지 취재팀과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에 응한 ‘김 석(본명 김봉석)’ 씨.

    아직도 무엇인가 아쉬움과 억울함이 교차하는 듯 나즈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끝날 사이가 아니었는데….”

    김 석 씨는 “가수로서 형으로서 예술가로서 존경했던 이장희 씨를 이제는 내가 먼저 지우려 한다”며 “물론 적은 돈은 아니었겠지만 치졸할 정도로 사실을 왜곡하는 그의 이중적 태도에 이별을 고하겠다”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이장희 씨가 나를 두고 한국 검찰 조사과정에서 오도 갈데도 없는 구두닦이를 내가 데려다 키웠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들었다”며 “지난 수십년의 세월 속에서 때로는 매니저로 때로는 집사로 때로는 해결사로 나서 그의 마약류 취급, 여성편력 등을 앞장서 무마시키고 미국 도피과정을 도왔던 과거사가 한스러울 뿐이다”고 전했다.

    이어 김 씨는 지난 64년경 이뤄진 이장희 씨와의 첫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매니저 생활 등에 대해서 하염없는 풀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이장희 씨 본지 발행인과의 인터뷰
    “나는 4억 8천만원 저작권 침해 피해자”













     















    이장희 씨는 본지 발행인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최근 불거진 신상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과 전 매니저였던 김 석 씨와의 분쟁에 대해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오랜 기간 속았다”며 “신 회장의 주장은 적반하장 격으로 나는 사실을 바로 잡고 싶었다”고 전했다.

    다음은 이장희 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최근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을 검찰에 고소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오랜 기간 지인으로 지내왔던 신상호 회장에게 저작권료 관리를 맡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거액을 수령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숨겨진 착복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노출돼 검찰에 고소를 하게 됐다.”


    -신상호 회장과 매니저였던 김 석 씨의 주장은 이장희 씨의 주장과는 다르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주장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신 회장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저작권료가 월 1-200만원에 불과했고 많아야 500만원 대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역서를 받아보니 4억 8천만원이 넘는 거액이 출입금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하지만 신 회장은 일언반구의 언질도 없이 그 돈을 유용한 것이다. 김 석 씨는 고소대상이 아닌데 이 분쟁에 왜 끼여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저작권을 관리하지 않은 책임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현 상황은 검찰의 조사를 받은 김 석 씨가 LA에서 역소송을 준비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입장인가?

    “가져간 돈의 일부라도 갚고 잘못을 인정했더라면 이러한 고소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부정부패와도 연결고리가 있어 끝까지 싸울 것이다. 신 회장의 경우 이번 케이스말고도 다른 분쟁사례가 많은 것으로 안다. 한국 음악인들의 저작권 보호를 위한 투쟁으로 생각하고 시시비비를 반드시 법정에서 가리겠다.”


    -신상호 회장과 전 매니저인 김 석 씨는 3자 대면을 원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자는 취지로 보여지는데 어떤 입장인가. 특히 김 석 씨의 경우 LA를 직접 방문해 폭로 기자회견을 갖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갖고 있다.

    “만나고 싶지도 만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간의 합의는 없을 것이며 법의 심판대로 해결될 것이다. 다만 김 석 씨 개인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없는데, 신상호 씨가 방패막이 삼아 그를 이용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장희 씨와는 두살 터울로 1949년생인 김 석 씨는 당시 속칭 ‘주먹 깨나 쓰는’ 시절을 거쳤으며, 우연히 알게 된 이장희 씨와의 인연은 “아직도 소중한 기억이다”고 토로했다.

    “군대 입대를 앞둔 나에게 처음 먹어보는 돈까스를 사준던 형의 모습에 평생을 이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군제대 후 이장희 씨의 제의로 이른바 ‘로드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누가 뭐래도 이장희 씨와 실과 바늘 관계로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김 석 씨가 소중히 간직해 온 여러 장의 사진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 눈에 들어오는 두사람의 우정이 묻어나 있었다. 아울러 김 씨의 소개로 친분을 갖게 된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과의 다정했던 한때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가수 이장희 씨는 30여년 넘게 음악계를 떠났던 인사로 이른바 ‘75년 대마초 파동’에 휩싸여 도미한 것 아닙니까”라고 언급하며 잠시 뜸을 들인 뒤 “그가 미국에 오기까지의 배경, 풀스토리 속에 제가 모두 개입돼 있습니다”고 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다 잘못한 일이고 그 때문에 뒤늦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장희 씨는 지난 1980년 가을 도미길에 올랐다. 세간에 알려진 것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 가요제에 가수 김태화 씨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초청받은 데 따라 작곡가 김도향, 가수 김태화 씨와 함께 제작자 이장희 씨가 캐나다행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 석 씨의 주장은 달랐다.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비밀이었지만, 1980년 당시에도 이장희 씨가 대마초 혐의로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지리산 등지에서 은둔생활을 펼치던 중 캐나다 행에 올랐던 것이다”며 “사실 매니저인 내가 갈 자리를 양보해가면서까지 이장희 씨의 도미를 도운 바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석 씨는 “당시 캐나다에서 일행과 함께 하루짜리 비자를 받고 뉴욕으로 건너갔다가 이장희 씨는 한마디로 미국에 눌러앉은 것이다”며 이장희 씨 미국 정착과정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했다.

    이미 LA에서는 잘 알려진대로 이장희 씨는 뉴욕에서 LA로 건너와 모 한인방송국에서 DJ 생활을 하던 중 영주권을 취득했으며, 이후 ‘로즈가든’이라는 라이브 뮤직바 형태의 레스토랑을 LA에서 경영했다. 하지만 로즈가든 운영 당시 이장희 씨는 끝내 마약류를 끊지 못했으며, 거의 매일같이 몇몇 지인들과 함께 ‘로즈가든’에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당시를 어렴풋이 회고한 김 석 씨는 “LA로 우연히 놀러와 이장희 씨를 만나보니 이대로 ‘마약쟁이’로 냅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내가 다시 한국행을 주도했다”며 “이에 지난 1988년 귀국해 가수 김완선 3집의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등을 프로듀서하는 등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 또한 나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당시 지금은 이혼한 형수가 LA에서 돌아온 이장희 씨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며 “그 당시 형수와 아들, 딸이 대치동 은마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이장희 씨가 본가를 찾아갔다가 딸에게 ‘외간사람’이라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해프닝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김 씨는 “형수와 헤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장희 씨의 복잡한 여성편력 등이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며 “나는 끝까지 두사람이 잘 되길 바랬던 사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바람기와 외도를 묵인했던 한사람으로 뒤늦게나마 참회의 심정이 간절하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담았다.

    아무튼 지난 88년 다시 귀국길에 오른 이장희 씨의 한국 ‘연예계 복귀’는 소리소문 없이 실패작이 됐고, 이 씨와 김 씨는 새로운 사업구상을 위해 홍콩 여행길에 올랐다가 LA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라디오코리아-스포츠서울USA 지분싸움




















    ▲ 가수 이장희 씨가 한국 검찰 고소과정에서 김 석 씨가 자신의 매니저가 아니라고 주장함에 따
    라, 김 석 씨는 지인들에게 매니저 역할을 한 사실확인서를 확보하는 등 검찰에 증거자료를 제출
    한 상태다. 김 씨는 과거 킹레코드사를 통해 조달한 5천만원의 자금이 라디오코리아 초기 설립자
    금으로 공동투자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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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의 명물방송국인 ‘라디오코리아’의 출발과정에는 사실 초대 대표인 김병우 씨의 자본과 가수 이장희 씨의 자본이 결합돼 출발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김용석 씨가 개인 추가자본을 투자해 대주주가 3명이 되기도 했으나, 끝내 50% 지분을 갖고 최대주주 위치를 고수했던 이장희 씨가 두사람의 축출(?)에 성공하면서 100% 지분을 취득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 김 석 씨는 “당초 라디오코리아 설립을 위해 동아방송에서 0시의 다이알 PD로 이장희 씨를 스타로 만들어준 김병우 씨가 20만 달러, 이장희 씨가 20만 달러를 대기로 했었다”며 “나중에 두사람의 돈 조달이 여의치 않아 김병우 씨가 6만 달러, 이장희 씨가 약 11만 달러를 투자했었다”고 기억해냈다.

    바로 이장희 씨의 이러한 라디오코리아 초기투자 설립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김 석 씨가 담당했고, 김 씨에 따르면 이장희 씨가 “나(이장희)와 너(김 석)의 지분을 50%로 정하자”고 수차례 구두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간 형제애로 40여년 지기로 뭉쳐왔고, 이장희 씨가 김 석 씨를 라디오코리아 한국지사장으로 두고 신임했을만큼 서로 사이가 좋았을 때는 묵인했지만 “이제는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는 설명이다.

    이미 라디오코리아를 매각해버린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장희 씨를 상대로 LA에서 지분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 증거로 김 석 씨는 과거 킹레코드사에서 자신이 조달했던 5천만원 지급 사실확인서를 제시했다.

    또한 라디오코리아의 계열사였던 스포프서울USA의 창립도 김 석 씨의 지인인 윤흥렬 전 스포츠서울 사장과의 친분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었다며 뒤늦게나마 자신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뜻임을 분명히 했다.






    돈 욕심 없다는 이장희 씨 “알고보면 재력가”
    LA 구 라디오코리아 사옥 등 소유 천만장자












    ▲ 현재 이장희 씨 명의의 구 라디오코리아 킹슬리 사옥(626 S. Kingsley Dr.)은 시가 450만
    달러 이상을 호가하고 있다. 지난 95년 60만 달러(30만 달러 다운페이)에 매입했으며, 3차례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쳐 현재 약 15만 달러의 론이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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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희 씨는 지난 2003년말 라디오코리아 경영을 사실상 접은 뒤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하고 ‘울릉도 집(울릉 天國 팻말이 세워져 있는 세칸짜리 별장 :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현포리 12번지)’에서 기거하며, 서울-울릉도-LA를 오가는 ‘수도자(?)’ 생활을 해왔다.

    이같은 그의 행보는 지난 2002년 9월 한국의 유력 월간지인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여자도 마약도 대자연만큼 날 사로잡진 못했다”며 어릴 적 꿈이었던 탐험가로서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시사해 어느 정도 예고돼 왔던 시나리오다.

    당시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장희 씨는 “나는 평생 통장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강조했으며, 이와 관련 가수 조영남 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장희는 평생 벌은 돈 다 쓰고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말했을 정도로 주위사람들에게 재물과는 미련이 없음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한국 언론을 통해 결코 부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는 이장희 씨는 알고보면 상당한 재력가다. LA에서는 구 라디오코리아 사옥인 ‘킹슬리 건물(626 S. Kingsley Dr.)’이 여전히 그의 소유(영문명 Lee Jang Hee)로 현재 시가가 450만 달러(한화 50억원 상당)를 넘어선다.

    본지가 확인한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지난 95년 12월 28일 60만 달러에 매입하는 과정에서 윌셔은행을 통해 30만 달러 1차 모기지 융자를 받았는데, 3차례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쳐 현재는 나라은행에 약 15만 달러의 론이 남아있다. 만약 이 건물을 매각할 경우 400만 달러 이상의 시세차익을 얻는 셈이다.

    또한 이장희 씨는 과거 라디오코리아와 함께 경영했던 스포츠서울USA 이사를 맡겼던 자신의 아들 명의의 럭셔리 콘도를 한인타운에 소유하고 있는 등 LA지역에 숨겨진 재산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이 씨는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2단지 한양아파트 72동 1채(20억원 상당)를 소유하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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